23화. 호주 오픈
바브린카는 회심의 공격이 저지당하자 제대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연달아 실책을 저질렀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경기의 흐름이 꼬인 것이다.
[폴트!]
[더블 폴트! 게임 이지혁 2-0.]
결국 바브린카는 서브를 연속으로 실패해서 첫 서비스 게임을 브레이크 당했다.
실책을 하자마자 주먹으로 라켓 면을 때리는 게 지금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원래 잘만 들어가는 서브가 컨트롤이 되지 않으니 화가 난 모양이다.
‘저 기분은 나도 잘 알지. 미안하지만 이번 세트는 내가 가져가야겠어.’
그렇게 기세를 잡은 지혁은 1세트를 얻기 위해 집중했다.
이미 브레이크를 한 번 성공했으니 이제 서비스 게임만 지키면 된다.
쿵!!
베이스라인 깊숙이 떨어지는 헤비 스핀 스트로크.
바브린카는 다시 한 번 백핸드 슬라이스로 공을 걷어냈다.
완숙한 실력이었지만 슬라이스의 특성상 한계가 뚜렷하다.
타구의 속도와 방향이 뻔했던 것이다.
그리고 예상할 수 있는 샷은 전혀 위협적이지 않다.
통. 통.
잠시 후 바브린카의 코트에 공이 튀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슬라이스를 기다리고 있던 지혁의 드롭샷이 코트를 살짝 넘어서 떨어진 것이다.
[게임 리 4-2.]
바브린카는 베이스라인 뒤로 물러나있어서 코트 앞에 떨어지는 드롭샷에 전혀 대응하지 못했다.
‘확실히 예전보다 실력이 는 것 같네.’
과거였다면 우위를 잡은 상황에서도 방금처럼 깔끔하게 성공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단순히 난이도가 문제가 아니라 상대의 빈틈을 찔러야 성공할 수 있는 게 드롭샷이기 때문이다.
‘어플의 효과가 크구나.’
하지만 어플로 인해 백핸드가 A-가 된 지금은 자연스럽게 다음 움직임이 떠올랐다.
어디를 쳐야 득점을 할 수 있을지 대강 짐작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세트 리.]
결국 1세트는 지혁의 승리로 돌아갔다.
요행으로 얻은 브레이크와 한손 백핸드를 노린 작전이 제대로 효과를 발휘한 것이다.
‘잘하면 이길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예상했던 것보다 1세트가 싱겁게 끝나자 관중석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미성년자가 그랜드 슬램에 출전하는 것 만해도 신기한 광경이었는데 바브린카에게 승기까지 잡아내자 모두 당황한 것이다.
[플레이어 레디.]
그렇게 120초를 휴식하자 경기는 2세트로 접어들었다.
지혁은 쐐기를 박기 위해 템포를 더 빠르게 했다.
5세트까지 간다면 독이 되어 돌아올 행동이다.
남은 세트를 생각하지 않고 플레이를 하면 5세트로 갔을 때 체력이 방전돼서 대가를 치러야 할 가능성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기의 흐름은 지혁이 의도한 것처럼 순조롭게 흘러갔다.
[게임 리 5-3.]
지혁의 포핸드가 다시 한 번 득점을 만들어냈다.
사이드라인을 절묘하게 때린 다운 더 라인이 다시 한 번 성공한 것이다.
‘인간계 최강이라는 바브린카도 스트로크를 제압당하면 이런 결과가 나오는 구나.’
단지 한손 백핸드만 묶어놨을 뿐인데 경기가 일방적으로 흘러간다.
[세트 리 6-4.]
2-0 세트 스코어.
만약 작년에 출전한 챌린저급 대회였다면 2세트를 이긴 시점에서 지혁의 승리로 경기가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호주 오픈은 3세트를 이겨야하는 그랜드 슬램이라서 아직 1세트를 더 얻어 내야한다.
‘이제 1세트만 따내면 돼.’
***
SBC 스포츠에서 지혁의 64강 경기를 중계하기 시작한 시간은 오후 4시였다.
경기를 보기 좋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사람들의 관심이 많이 몰린 경기였던 만큼 2세트가 막 끝났을 때.
SBC 스포츠의 중계 시청률은 4%가 넘었다.
한국 최고의 인기 스포츠는 야구다.
그 야구의 시청률이 1%가 되지 않은 걸 고려하면 4%는 상당히 괜찮은 수치다.
“이게 어떻게 된 거죠? 이지혁 선수가 바브린카를 압도하고 있습니다!”
해설자는 2세트가 끝나자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경기가 이렇게 흘러갈 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고작 16살 선수가 바브린카에게 이런 결과를 만들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도 경기가 시작하기 전 방송 멘트로는 이길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긴 했지만.
해외의 테니스 전문가들처럼 지혁이 패배할 확률이 90%가 넘을 거라고 내심 생각하고 있었다.
“2세트까지 얻어낸 만큼 충분히 경기를 이길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럴 것 같습니다. 이번에 승리하면 32강 진출이에요.”
32강, 그 말이 해설자의 입에서 나오자 시청자들의 반응도 술렁거렸다.
이 정도까지 왔으면 정말로 32강에 진출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 미쳐따!!! 이제 1세트만 더 따면 32강 진출!!
- 2-0 실화냐고 ㅋㅋㅋ 다음 상대 누구냐? 이대로만 하면 16강도 가능하겠다. ㅋㅋㅋ
- 이지혁 대체 한계가 어디까지임??
- 바브린카가 이렇게 허무하게 진다고? 진짜 미쳤네 ;;
- 역대급 재능 나왔네 ㄷㄷ 진짜 올 타임 넘버원이다.
- 와;; 이제 올림픽에서 테니스 중계도 볼 수 있겠네.
- 한국에서도 메시급 선수 나오는 거냐??
- 그 정도까진 아닌데 일단 일본의 니시코리 케이는 뛰어넘은 것 같다.
- 지금 보여주는 것 만해도 아시아 최강인 것 같은데? ㅋㅋ
***
바브린카의 서브로 시작된 3세트.
“흐어엇!”
엄청난 강서브가 지혁의 코트로 내려 꽂혔다.
[SERVE SPEED 223km/h]
[피프틴 러브.]
에이스를 내준 지혁의 이마에 한줄기 땀이 흘러 내렸다.
‘아직도 힘이 많이 남았나보네.’
벌써 경기 시간이 1시간이 훌쩍 넘었는데 1세트보다 서브 속도가 빨라진 것 같았다.
이것만 봐도 바브린카의 체력이 얼마나 좋은지 짐작할 수 있다.
쿵!!
[게임 바브린카.]
4번 째 백핸드 앵글샷으로 실점을 한 지혁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갑자기 리버스 포핸드가 먹히지 않는 것 같은데?’
2세트까지만 해도 이런 샷이 자주 나오지 않았다.
바브린카가 백핸드 쪽으로 오는 탑스핀 스트로크에 제대로 적응을 하지 못해서 슬라이스만 사용했기 때문이다.
‘설마··· 벌써 감을 잡았다고?’
지혁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쿵!!
[피프틴 포티.]
‘말도 안 돼···.’
다시 한 번 초강력 백핸드가 옆을 관통하자 지혁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금방 대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순한 운으로 백핸드를 5번 연속 성공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렇게 바브린카가 리버스 포핸드에 어느 정도 적응을 하자 경기는 급격하게 기울어 가기 시작했다.
쿵!!
[게임 바브린카 3-1.]
또 다시 떨어지는 백핸드 다운 더 라인.
‘···역시 전성기가 아니더라도 만만하지가 않구나.’
2010년 이후의 테니스 선수 중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바브린카를 너무 무시한 것 같았다.
과거였다면 쳐다도 보지 못했을 것인데 말이다.
애초에 이 정도 선수가 그렇게 허무하게 패배할리가 없었다.
[게임 바브린카 5-3.]
탕!!
날카로운 각도로 날아오는 스트로크에 지혁은 넘어질 듯이 달려갔지만 라켓은 허공을 갈랐다.
[세트 바브린카 6-4.]
2-1의 세트 스코어.
“······.”
처음으로 세트를 얻어 낸 바브린카.
객관적으로 보면 아직까지는 1세트를 더 얻어낸 지혁의 상황이 더 유리했다.
하지만 경기를 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번 경기가 뒤집힐 거라는 예감을 느꼈다.
바브린카가 3세트에서 보여준 경기력이 이전과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점점 적응해 간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진짜였네···.’
지혁은 어떻게 해서든 다음 세트에 끝내기로 결심했다.
상대에게 리버스 포핸드가 파훼 된 이상 이제부터는 시간을 끌수록 점점 더 불리해질 것이다.
그렇게 얼마 후 다시 시작되는 4세트.
[세트 바브린카 6-2.]
계획했던 것과 다르게 지혁은 이번에도 세트를 잃게 되었다.
‘3세트 까지만 해도 가능성이 약간은 있었는데.’
스코어 격차가 이전보다 더 벌어졌다.
압도당했다고 말하는 게 정확한 설명일 것이다.
‘여기까지인가···.’
냉정하게 평가하면 처음부터 순수한 실력은 바브린카가 월등히 우세했다.
비록 전성기가 아니지만 현재의 랭킹도 21위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까지 온 것도 전부 상성 상의 우위를 이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더 이상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지혁은 후들거리는 다리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벌써 3시간이 넘게 지났네.’
전광판에 보이는 시간이 벌써 7시가 다 되어간다.
모두 두 선수가 베이스라이너라서 경기가 길게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나마 바브린카가 공격형이라 다행이지 둘 다 수비형 베이스라이너였다면 지금보다 경기가 더 길어졌을 것이다.
***
“아! 이지혁 선수, 4번 째 세트를 아쉽게 내줬습니다. 결국 2-2까지 왔네요.”
“처음 2세트를 따냈을 때 빨리 마무리를 지었어야 했어요. 바브린카가 그렇게 만만한 선수가 아니거든요.”
SBC 해설들은 4세트가 끝나자 아쉬운 표정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들이 보기에 이미 승기가 바브린카에게 넘어간 게 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두 선수들의 기량 차이가 뚜렷해서 돌파구가 보이지도 않았다.
“아, 지금. 4세트 하이라이트가 나오네요.”
세트가 넘어갈 때마다 120초의 휴식 시간이 있는 만큼 SBC 스포츠는 그 시간 동안 이전 세트의 하이라이트를 다시 송출했다.
중계 화면에서는 지혁이 득점하는 장면도 나왔지만 4세트 자체가 패배한 세트인 만큼 실점하는 장면이 더 많이 나왔다.
“바브린카가 이지혁 선수의 리버스 포핸드에 완전히 적응한 것 같네요. 1, 2세트처럼 실수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아요.”
해설자는 지혁이 바브린카의 백핸드로 실점하는 장면이 나오자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옆에서 말을 듣고 있던 캐스터는 점점 지혁의 패배가 기정사실이 되는 것처럼 분위기가 흘러가자 PD가 주는 신호를 받았다.
시청률이 떨어질 것을 염려한 것이다.
“그래도 아직 경기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지혁 선수가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 한다면 결과가 어떻게 될 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시청자들도 바보가 아닌 만큼 이제 승리할 확률이 많이 낮아졌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커뮤니티는 지혁이 패배할 거라는 얘기로 가득했다.
- 아 결국 64강에서 탈락하네.
- 다 이겼었는데 너무 아깝다. ㅠㅠ
- 한 시간 전만해도 이기고 있었는데 갑자기 왜 이렇게 된 거임???
- 초반에 잘하더니 아직 체력이 부족해서 그런가? 서브 속도는 아직 쌩쌩한 것 같은데
- 그게 아니라 리버스 포핸드가 간파당해서 그런 거임. 한손 백핸드로 재미 좀 봤는데 이제 안 통하니까 순수한 기량싸움이 된 거잖아. 랭킹 21위랑 88위가 싸움이 될 것 같냐?
- 애초에 클래스 차이가 너무 났음. 2라운드부터 바브린카라니 ;;
- 이걸 대진 탓을 하네 ㅋㅋ 탑 시드 선수 안 만난 것 만해도 행운이지.
- ㅇㅇ 아직 이지혁 실력이 부족한 거임. 여기가 한계인 것 같네.
- 이거 보려고 강의도 쨌는데 젠장···
- 5월에 열리는 롤랑 가로스나 기다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