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호주 오픈
경기 초반부터 한손 백핸드를 꺼내든 지혁.
탕!!
지혁이 세트 초반부터 변칙적인 플레이를 구사하자 머레이는 당황했는지 흐름이 끊기는 모습을 보였다.
갑자기 스트로크 성질이 달라져서 선수가 바뀐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웃! 서티 올.]
라인을 아슬아슬하게 벗어나는 머레이의 포핸드.
‘역시 이 전략이 잘 먹힌단 말이야.’
지혁은 경기가 생각했던 대로 흘러가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마 다음 그랜드슬램에서는 지금 사용하는 전략이 높은 확률로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탑랭커들도 지혁에 대한 대처법을 넘치도록 준비할 테니 말이다.
하지만 이번 호주 오픈을 한정으로 하면 두 가지 백핸드 자세를 스위치하는 게 상당한 위력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현재 프로 대회에서 뛰고 있는 탑랭커들 중에 이런 방식으로 플레이하는 선수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하앗!”
쿵!!
[게임 리 2-1.]
“아자!!!”
지혁은 백핸드 위너로 첫 브레이크를 따내자 커다란 포효를 질렀다.
약간이지만 경기에서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이 보였던 것이다.
[음···. 이지혁 선수가 경기 초반부터 칼을 뽑아 들었습니다. 머레이에게 브레이크 당한 것을 그대로 갚아주네요.]
[이틀 전 로딕과 경기할 때도 그랬지만 스윙 자세가 저렇게 자유자재로 변하는데 백핸드의 정확도와 위력이 전혀 떨어지는 것 같지 않습니다. 이질감이 전혀 보이지 않아요.]
[괜히 천재라고 불리는 게 아니죠. 냉정하게 말하면 이지혁 선수는 머레이에 비해 전반적으로 부족한 면이 많습니다. 어린 나이 때문에 피지컬 차이도 많이 나고요. 하지만 그걸 재능으로 극복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게 1세트는 지혁의 우세로 흘러갔다.
“흡!”
드르르륵.
라켓에 공이 긁히는 느낌이 선명하다.
강력한 백스핀이 걸린 채로 네트를 넘어가는 드롭샷.
머레이는 플랫 스트로크를 생각하고 있었는지 한 발 늦은 동작으로 네트 앞으로 달려왔다.
끼이익-
급하게 방향전환을 한 탓에 날카로운 소음이 지혁의 귀를 자극한다.
퉁! 보통 선수라면 당연히 놓쳤을 거리지만 머레이는 믿기 힘든 움직임으로 낮게 바운드되는 공을 걷어 올렸다.
‘역시 코트 수비범위가 어마어마하구나. 그래도 이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어.’
“하앗!”
탕!! 지혁은 공이 치기 좋게 네트를 넘어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라켓을 강하게 휘둘렀다.
그러자 순식간에 코트를 관통하는 패싱샷.
머레이는 뛰어난 반사신경으로 라켓을 옆으로 뻗었지만 벌써 공은 한참이나 지나간 뒤다.
쿵!!
[세트 리.]
우와아아아!
관중들은 정교한 빌드업으로 지혁이 세트를 마무리 짓자 환호성을 질렀다.
눈이 환해질 정도로 높은 경기 수준과 화려한 퍼포먼스에 크게 감탄한 것이다.
[아! 세트 스코어 6-4. 아름다운 패싱샷이었습니다! 팽팽한 대결 끝에 결국 이지혁 선수가 1세트를 가져갑니다.]
[드롭샷으로 머레이의 균형을 무너트린 게 신의 한수였어요. 저게 한손 백핸드가 가진 특유의 장점이죠. 플랫 스트로크와 동작이 비슷해서 상대 선수를 착각하게 만드는데 유리하거든요.]
ㅡ 방금 페이크 드롭샷 봤냐??? 빌드업 지렸다 ;;
ㅡ 진짜 이지혁이 미친 재능러이긴 해 ㅋㅋ 두손 백핸드랑 한손 백핸드 섞어 쓰니까 머레이도 대응을 못하네 ㅋㅋㅋ
ㅡ 와···. 순간 페더러가 경기하고 있는 줄 알았다.
ㅡ 이대로 결승 올라가는 거임??
ㅡ 아 ㅅㅂ 머레이한테 걸었는데 망했다 ㅡㅡ 머레기야 제발 랭킹 값 좀해라
ㅡ 토토충 바로 컷!
ㅡ 지혁좌 호주에서 테니스 치면서 도박 근절도 해주시네. 역시 월클은 달라 ㅋㅋㅋ
ㅡ 그러게 나처럼 애국 배팅했어야지 ㅋㅋ
[플레이어 레디.]
머레이의 서브로 시작한 2세트.
2세트는 1세트와 매우 흡사하게 흘러갔다.
머레이가 탄탄한 기본기로 경기를 풀어 나갔다면 지혁은 트위스트 서브, 한손 백핸드, 트릭샷 등 일반적으로 보기 힘든 기술을 사용하며 머레이를 공격적으로 몰아붙인 것이다.
“하앗!”
지혁은 코트 반대편으로 떨어지는 다운 더 라인을 받아내기 위해 상체를 넘어질 것처럼 기울이며 스윙을 했다.
퉁! 라켓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리는 공.
다행히 스트로크는 네트를 넘어갔다.
찌릿찌릿.
하지만 임팩트 지점이 불안정해서인지 전완근에서 짜릿한 고통이 느껴진다.
분명 팔에 큰 부담이 쌓이겠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코트 좌우로 떨어지는 머레이의 스트로크를 감당하기 힘들다.
‘스플릿 스텝 덕분에 움직임이 빨라지긴 했구나.’
어제 풋워크를 시험해보면서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는데 극한의 상황에 몰리니까 그 효과가 확실하게 체감되는 것 같다.
방금 전 다운 더 라인은 이틀 전이라면 받지 못했을 정도로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반 발자국 정도 빨라진 것 같네.’
스플릿 스텝의 보폭이 짧은 걸 생각하면 이건 그리 큰 차이가 아닐 수도 있었다.
하지만 상대 선수와 실력이 비슷한 상황에서는 이 정도 차이도 충분히 경기의 승패를 가를 수 있다.
[게임 리.]
그렇게 서비스게임이 끝나고 찾아온 짧은 휴식 시간.
우물우물
지혁은 벤치에 앉아서 억지로 바나나를 입에 넣었다.
솔직히 숨이 헐떡거려서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지만 체력을 보충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경기 중간중간마다 에너지를 보충해주지 않으면 막대한 활동량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바나나를 먹어도 매번 경기를 3, 4시간 하다보면 몸무게가 몇 키로 씩 빠지는 일이 허다하다.
‘이렇게 경기가 길어지면 안 되는데···.’
원래 계획대로라면 지금 쯤 2세트가 종료되거나 마무리되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머레이가 얼마나 끈질기게 행동하는지 도저히 세트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웬만하면 체력을 생각해서 승산이 없는 게임은 설렁설렁 움직여야하는데 모든 게임을 거머리처럼 물고 늘어진 것이다.
‘이런 식으로 흘러가면 좋지 않아.’
이제 슬슬 변칙적인 플레이를 사용해서 득점하기도 힘들어졌다.
한 시간 동안 수십 번이 넘도록 같은 수법에 당하다 보니 머레이도 지혁에 대해 어느 정도 적응을 한 것이다.
머레이는 전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선수였으니 이 상황은 처음부터 예견되어 있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그 시점이 너무 빨리 다가왔지만 말이다.
쿵!!
[게임 머레이 4-3.]
그렇게 조금씩 기울어가는 경기.
지혁은 어떻게 해서든 2세트를 가져오려 했다.
하지만 머레이는 아주 작은 가능성도 허용하기 싫었는지 한 치의 양보도 보이지 않는다.
사이드라인을 때리고 지나가는 엄청난 속도의 백핸드.
흉내 내기도 힘든 엄청난 위력의 스트로크에 지혁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세트 머레이.]
결국 경기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이래서 최대한 빨리 끝내려고 했는데.’
아직 누가 유리하다고 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지혁은 남은 경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해도 좋은 결과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 아쉽습니다.]
[머레이가 이지혁 선수의 플레이 스타일을 완전히 파악한 것 같네요. 더 이상 꼼수가 통하지 않습니다.]
[갑자기 너무 불리해졌어요. 박 해설님, 혹시 경기를 뒤집을 방법이 없을까요?]
박 해설은 인상을 찌푸리며 한참 동안 생각하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어려울 것 같습니다. 2세트라도 따냈으면 모르겠는데 이제 상황이······.]
[네! 그렇군요. 비록 상황이 불리하지만 이지혁 선수는 항상 저희가 예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경기를 승리했습니다. 아직 세트가 많이 남아 있으니 승패를 짐작하기에는 너무 이릅니다.]
캐스터는 박 해설이 눈치 없이 경기를 부정적으로 평가하자 곧바로 말을 끊고 다음 멘트를 뱉었다.
그의 생각도 비슷하긴 했지만 괜히 시청자들의 심기를 거스르기 싫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박 해설을 욕하는 말이 실시간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ㅡ SBC스포츠 해설자 뭐함?? 이기라고 응원을 해도 모자를 판에 지라고 저주를 하네 ㅡㅡ
ㅡ 모르면 입이나 다물고 있어. 경기 보는데 방해 된다.
ㅡ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맞는 말 아닌가? 박 해설 전직 테니스 국가대표였잖아.
ㅡ 처 맞는 말이겠지. 그랜드슬램 본선도 참가한 적 없는데 무슨 자격으로 이지혁을 평가함?
ㅡ 말 한 번 잘못했다가 가루가 되도록 까이네 ㄷㄷ 이래서 사람은 입을 조심해야 해.
ㅡ 머레이형 이제 몸 풀린 거야? 제발 지금처럼만 해. 간만에 맛있는 것 좀 먹자.
ㅡ 악질 토토충 정의구현 해야 하는데 경기가 이렇게 되네 ;;
***
쿵!!
[게임 머레이 3-1.]
‘이러면 안 되는데······.’
3세트 중반.
지혁은 자신의 옆으로 스트로크가 떨어지자 갑자기 전신에서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서브라는 커다란 이점을 가지고도 게임에서 패배했기 때문이다.
분명 경기 초반만 해도 대등하게 흘러갔는데.
이제 머레이의 일방적인 우세라고 말 할 수 있을 정도로 경기가 기울어 버렸다.
가까운 관중들과 네트 근처에 있는 볼키즈들이 안쓰러운 표정을 짓는다.
그들도 눈이 있는 만큼 결말이 어떻게 될지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꽈아악-
지혁은 사람들의 측은한 눈빛에 마음이 심란했지만 라켓 손잡이를 강하게 쥐며 패배감을 가라 앉혔다.
경기를 포기하기에는 아직 모든 수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워낙 피드백이 커서 경기 도중에 사용하고 싶지 않은 방법이었지만.
상황이 급박하니 어쩔 수 없다.
‘쌓인 포인트는······70만 정도인가?’
마지막 수단으로 어플을 불러들인 지혁.
예전 같으면 스킬의 등급을 올릴 수도 있는 막대한 양이지만 이제 이걸로는 어림도 없다.
그래도 총량은 비슷하니 효과는 확실할 것이다.
“잠깐만요!”
지혁은 경기를 속행하지 않고 체어 엠파이어에게 다가가 메디컬 타임을 요청했다.
비록 경기 중 1번만 사용할 수 있는 권리지만 상황을 생각하면 지금이 가장 적절해 보였기 때문이다.
예상했던 대로 요청이 쉽게 받아들여지자 지혁은 지체하지 않고 벤치에 앉아 포인트를 사용했다.
[···리!······리!]
그렇게 몇 분이 지나자 가까운 곳에서 누군가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음······.”
두통 때문에 머리가 조금 지끈거리지만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체어 엠파이어가 시간이 다 되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턱!
고개를 좌우로 움직이던 지혁은 곧바로 라켓을 챙겨 코트 위로 올라갔다.
계속 시간을 지체하면 포인트가 깎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서브를 준비하면서 충분히 시간을 끌 수 있어서 상관없다.
‘아직 포인트를 전부 사용하진 못했지만 남은 시간을 생각하면 충분해.’
과연 이 방법이 얼마나 먹힐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결과를 얻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