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호주 오픈
메디컬 타임이 끝나고 다시 시작한 3세트.
지혁은 잔뜩 긴장된 얼굴로 서브를 준비했다.
과연 어플로 향상된 실력이 머레이에게 얼마나 통할지 짐작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숨겨둔 수를 모두 사용해서 이번에도 승기를 잡지 못하면 상당히 곤란해진다.
“후우···.”
심호흡을 하면서 토스를 시작한 지혁.
회전 없이 붕 떠오른 공은 2m 높이에서 정점을 찍고 천천히 하강했다.
“흐읍!”
탕!!
온몸을 쥐어짜 내며 라켓을 휘두르자 서브는 강력한 스핀이 걸린 채 날아갔다.
쿵!! 바닥에 떨어지고 기괴한 각도로 바운드 되는 공.
예고도 없이 트위스트 서브가 등장했다.
하지만 머레이는 침착한 표정으로 몸을 뒤로 젖히며 라켓을 움직였다.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자세를 보면 미리 예측하고 있었던 건 아닌 것 같다.
뛰어난 반사신경만으로 리턴에 성공한 것이다.
‘이걸 받아낸다고?’
분명 라켓에서 느껴진 감각은 최고였는데.
실제로 트위스트 서브의 퀄리티는 오늘 경기에서 보여준 서브들 중 손에 꼽을 정도로 뛰어났다.
지혁은 당연히 에이스를 얻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기에 지금 상황이 어이가 없었다.
‘발리는···. 안 되겠구나.’
머레이는 자세가 무너진 상태에서도 반격을 생각한 건지 공은 마치 로브를 친 것처럼 날아왔다.
샷의 완성도라도 낮았으면 네트 앞으로 달려가서 발리로 본 때를 보여줬을 텐데.
하지만 머레이의 리턴 코스는 점프를 해도 라켓이 닿지 않을 정도로 높았다.
공이 떨어지길 기다리고 있자 반대편 코트에서 머레이가 자세를 정비하는 모습이 보인다.
저 정도로 만전의 상태라면 어떤 공을 쳐도 어렵지 않게 받아낼 수 있을 것이다.
통! 경쾌한 소리와 함께 바운드 되는 공.
“하아앗!”
지혁은 커다란 기합을 내지르며 혼신의 힘을 다해 포핸드를 쳤다.
앞으로 있을 스트로크 대결에서 먼저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보통 랠리 상황에 돌입하게 되면 대부분의 승부는 5구 안에 결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워낙 타구 속도가 빠르다 보니 선수들의 실력이 뛰어나더라도 위닝샷이 순식간에 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포인트를 사용한 효과가 있었는지 랠리가 상당히 길게 이어졌다.
5구, 10구, 15구.
오오오오오!
랠리의 횟수가 점점 늘어날수록 관중석에서 커다란 비명이 계속 터져 나왔다.
두 선수의 경기력에 얼마나 놀랐는지 입을 커다랗게 벌린 채로 침을 흘리는 관중들도 있을 정도다.
탕!! 탕!! 탕!!
경기에 몰입한 관중들은 타구 소리가 들릴 때마다 고개를 시계추처럼 좌우로 움직였다.
그렇게 스트로크가 20구를 넘었을 때.
지혁의 포핸드 위너가 서비스라인 위를 스치고 코트 뒤편으로 빠져나갔다.
드디어 길고 길었던 랠리가 마무리 된 것이다.
[피프틴 러브.]
“허억···허억···.”
지혁은 심판의 콜이 들리자 드디어 참고 있던 숨을 급하게 내쉬었다.
워낙 격렬하게 코트를 뛰어다니느라 경기 동안 제대로 호흡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진짜 죽을 것 같네···.’
4세트가 시작한지 고작 몇 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벌써 폐와 근육이 타들어가는 것 같다.
그렇게 코트 위에서 선수들의 거친 숨소리만 들리고 있을 때.
드디어 여운에서 빠져 나온 관중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기립 박수를 쳤다.
우와아아아!
리! 리! 리! 리!
***
[25구! 26구! 27구! 아! 다운 더 라인! 27구까지 이어진 장시간의 랠리가 결국 이지혁 선수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베이스라이너의 정수를 보여준 대결이었어요. 이번 승부가 경기의 승세를 바꿀 수 있는 기회가 되면 좋을 텐데요.]
[박 해설님 말대로 그렇게 되면 좋겠습니다. 아! 다시 경기가 시작합니다.]
3세트는 해설자들이 말했던 것처럼 흘러가는 듯 했다.
이후 휴식 시간마다 어플을 사용한 덕분인지 지혁이 점점 머레이를 제압하는 모습을 보여줬던 것이다.
[게임 리. 6-6. 타이 브레이크.]
4-2이라는 불리한 세트 스코어를 극복하고 마침내 만들어낸 타이 브레이크.
분명 좋은 상황이지만 지혁의 몸 상태는 한 눈에 보기에도 심각해 보였다.
몸을 아끼지 않는 허슬 플레이를 한 여파가 이제야 나타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드 코트에서 슬라이딩과 다이빙을 그렇게 해댔으니 당연한 일이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위험한 행동이지만 너무 중요한 상황인지라 어쩔 수 없었다.
[치열한 접전 끝에 결국 3세트가 타이 브레이크로 접어듭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뒷심을 보여줬어요. 이지혁 선수 정말 끈질깁니다!]
[이렇게 되면 경기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몰라요!]
[맞아요! 3세트만 이기면 결승까지 올라갈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승패를 짐작할 수 없는 경기에 얼굴이 상기된 해설자들.
그들은 방송이라 최대한 상황을 긍정적으로 말했지만 솔직히 경기의 결과가 이미 정해졌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지혁이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경기를 보고 있는 대부분의 시청자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혁은 그들을 비웃듯이 지금의 상황을 만들어냈다.
[2세트 중반부터 밀리던 게 거짓말 같습니다. 설마 아직도 숨겨둔 실력이 있는 걸까요?]
[······제가 보기에는 그런 게 아닙니다.]
[네?]
[믿을 수 없지만 이지혁 선수의 실력이 경기 초반보다 더 상승한 걸로 보입니다.]
[경기 중에 성장하고 있다는 뜻인가요?]
[그게 아니라면 지금 상황을 설명할 수 없어요. 머레이가 일부로 사정을 봐준 게 아니라면요.]
ㅡ 이게 이지혁 클래스다. 의심하고 있던 놈들 다 어디 숨었냐?
ㅡ ㄹㅇ 아까 전만해도 지혁좌 진다고 도배하던 ㅅㄲ들 다 숨었네 ㅋㅋㅋ
ㅡ 아 진짜 경기 중에 성장하지 말라고 무슨 게임 캐릭터냐고 ㅡㅡ
ㅡ 버그 신고합니다. ^^ 좋은 말로 할 때 3세트 머레이한테 넘기세요.
ㅡ 하느님 제발 토토충 정의구현해주세요 ㅠㅠㅠ
ㅡ 토토충들 여기 다 몰려왔네 ㅋㅋㅋ 응 너희들 오늘 굶어야해 컵라면이나 먹어~
ㅡ 이런 얘가 한국에서 열리는 대회에 출전했으니 ㅋㅋㅋ 진짜 국내 테니스 선수들 불쌍하다.
ㅡ 이지혁 실시간으로 성장 중인데 이러다가 다음 세트되면 경기 뒤집히는 거 아님?
ㅡ 그러면 진짜 레전드인데;; 결승전 상대 페더러잖아.
ㅡ 페더러 작년 US오픈 결승전에서 델 포트로한테 진 걸로 아는데?? 그러면 이지혁 우승 가능성 있는 거 아닌가? 이지혁>델 포트로>페더러 ㅋㅋㅋ
ㅡ ㄴㄴ 솔직히 델 포트로 그때 작두타서 이긴 거임. 이번 호주 오픈에서 경기하는 거 봤는데 거품 잔뜩 껴있더라.
‘조금만, 조금만 더.’
지혁은 결승의 고지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더 필사적으로 코트 위를 뛰어다녔다.
하지만 타이 브레이크의 결과는 그의 바람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플의 효과로 잠깐 동안 우세를 잡을 수 있었지만 결국 머레이라는 거대한 벽을 넘지 못했던 것이다.
[5-5 리.]
[6-5 머레이. 세트 포인트.]
쿵!! 바닥에 박힐 것처럼 내려꽂히는 머레이의 묵직한 포핸드.
[세트 머레이]
“컴온!!!!”
머레이는 어렵게 얻은 승리가 짜릿했는지 목에 핏대가 보일 정도로 크게 포효했다.
반대편 코트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지혁은 마음에 들지 않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한 끝 차이로 경기를 내준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2포인트만 따냈으면 3세트를 얻을 수 있었는데.’
결국 한 걸음이 모자라서 패배하게 되었다.
‘······이래도 이길 수 있는지 보자.’
지혁은 곧바로 체어 엠파이어에게 10분의 휴식을 요청했다.
“음···.”
벤치에 앉아 수십만에 달하는 포인트를 사용하자 평소처럼 엄청난 정보가 쏟아진다.
[플레이어 레디.]
휴식 시간이 끝나고 지혁은 자신감을 되찾은 얼굴로 코트 위로 올라갔다.
이번에는 결과가 다를 거라는 확신이 있었던 것이다.
[게임 리 1-0.]
지혁이 첫 서비스게임을 어렵지 않게 지켜내자 경기를 보고 있던 시청자들은 그의 실력상승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아무래도 투자된 포인트의 양이 이전과 차원이 달랐기 때문이다.
[오! 정말로 박 해설님의 말이 맞았습니다. 이지혁 선수의 샷이 이전보다 더 날카로워졌어요.]
[이미 경기가 끝나간 다는 게 너무 아쉽네요. 처음부터 이런 모습을 보여줬다면 상황이 더 좋았을 텐데요.]
[머레이와 경기를 하면서 뭔가 깨닫고 있는 걸까요?]
[이때까지 저런 재능을 가진 선수를 만나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습니다. 아마 정확한 사정은 이지혁 선수 본인만 알겠죠.]
경기가 이미 기울었지만 해설자들의 표정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준결승전에서 패배하더라도 오늘 지혁이 보여준 재능을 생각하면 몇 년 안에 그랜드슬램에서 충분히 트로피를 들어 올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혁의 어린 나이를 생각하면 앞으로 기회는 차고 넘칠 정도로 있다.
“하앗!”
탕!!
[게임 머레이.]
4세트는 3세트와 비슷하게 흘러갔다.
분명 처음에는 실력이 상승한 지혁이 유리한 모습을 보였지만 머레이가 승리하는 방향으로 경기가 뒤집힌 것이다.
[게임 세트. 매치 머레이.]
그렇게 호주 오픈 준결승전은 3-1로 머레이가 승리하게 되었다.
지혁의 실력으로는 빅4를 넘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아쉽지만 고작 1년 만에 여기까지 온 것도 엄청나게 대단한 일이다.
승자가 정해지자 경기장이 흔들릴 정도로 쏟아지는 환호성.
하지만 오늘따라 응원 소리가 전혀 달갑지 않았다.
전부 결승에 진출한 머레이를 위한 응원이었기 때문이다.
‘······역시 아직은 넘을 수 없는 벽이구나.’
과거에 머레이와 몇 번이나 대회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다.
물론 경기의 결과는 오늘처럼 지혁의 패배로 끝났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때보다 실력이 더 상승해서 인지 이번 경기에서 상당히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
한 시대를 풍미할 정상급 선수의 실력을 거의 바닥까지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따라 잡지 못할 정도는 아니야.’
과거에는 머레이와 경기하고 나서 감히 이런 생각을 하지도 못했다.
순위 차이는 고작 50계단에 불과했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프로와 아마추어보다 더 큰 격차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몇 년 안에 머레이를 넘어설 자신이 있다.
물론 그 기간 동안 머레이의 기량이 성장하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니 이번이 첫 번째 패배구나.’
회귀한 이후로 이때까지 한 번도 경기에서 져 본적이 없었는데.
당연히 언젠가 무패행진이 끊어질 거라 생각했지만 아쉬운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지금처럼 유명해지는 데는 무패의 전적도 상당히 많은 기여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소소한 이득도 이제는 끝났다.
“후······.’
지혁은 씁쓸한 표정으로 경기장 출구로 걸어갔다.
좀 있으면 승자 인터뷰가 있어서 자리를 비켜줘야 한다.
등 뒤에서 위로하는 응원 소리와 박수가 쏟아졌다.
그렇게 지혁의 첫 번째 그랜드슬램 도전은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