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귀국
마침내 끝난 공식 일정.
지혁은 대회의 결승전을 관람하기 위해 곧바로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한동안 멜버른에서 잔류했다.
그렇게 결승전 당일, 호주 오픈의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린 건 로저 페더러였다.
대부분의 테니스 팬들과 전문가들이 예상한 대로였다.
페더러는 이번 우승으로 인해 그랜드슬램 16번 우승이라는 범접할 수 없는 기록을 세우며 다시 한 번 자신의 클래스를 증명했다.
“설마 그렇게 쉽게 패배할 줄이야.”
아직도 머레이가 준결승에서 압도적인 경기력을 보여준 게 생생하다.
하지만 절대자의 포스를 풍기던 그조차도 결국 3-0으로 허무하게 패배했다.
지혁은 그 경기를 직관하고 나서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이제야 페더러의 실력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그냥 대단한 선수라고 생각했을 뿐인데···.”
그랜드슬램 준결승에 진출할 정도로 실력이 상승하게 되니 비로소 페더러가 역대 최고의 선수라고 평가받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테니스의 황제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건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에게는 그렇게 불릴만한 자격이 충분히, 아니 넘치도록 있었다.
“이제 한국으로 돌아갈 일만 남았네.”
호주에서의 용건을 전부 해결했으니 더 이상 남아있을 이유가 없다.
물론 준결승까지 진출한 보상으로 90만 호주 달러, 한국 돈으로 7억이 넘는 상금을 타게 돼서 멜버른에 머무르며 훈련을 소화해도 문제가 없을 테지만.
그래도 익숙한 한국에서 쉬는 게 가장 편하고 좋다.
“이번 대회의 여파가 얼마나 오래갈까?”
머레이와 한 준결승전은 시청률이 35%를 넘었다.
게다가 지혁의 이름이 공중파와 인터넷을 한동안 점령했으니 큰 일이 생기지 않는 이상 한동안 관심이 유지 될 것이다.
짧은 기간이지만 어지간한 톱스타보다 훨씬 더 많이 매체에 노출 되었으니 말이다.
“호주 오픈에 출전할 때부터 각오한 일이니······.”
지혁은 개인 시간을 방해받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스포츠 선수의 직업 특성상 팬들의 관심을 받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부와 명성 뒤에 따라오는 세금이라 생각해야하는 것이다.
“그래도 없는 것 보다는 나으니까.”
선수 생활을 편하게 하려면 인기는 무조건 높을수록 좋다.
괜히 애매한 유명세를 가지고 있으면 얼굴마담으로 이리저리 불려 다닐 확률이 높다.
차라리 지금처럼 관심을 많이 받으면 영양가 없는 국내 대회에 강제로 차출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수많은 국내 팬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행동하지는 못할 테니 말이다.
***
호주 오픈 결승전이 끝나고 이틀 후.
마침내 지혁은 비행기를 타고 인천 공항에 내릴 수 있었다.
‘이제 저 문만 지나면 되는 구나.’
주니어 그랜드슬램에서 우승했을 때처럼 저 너머에 기자들이 대기하고 있을 것이다.
사전에 연락 받기는 했지만 과연 얼마나 모여 있을지 모르겠다.
‘이번엔 시니어 대회에 출전했으니 저번 보다는 기자들이 많겠지?’
그렇게 입국장의 문을 통과하는 지혁.
파바밧! 파바바밧!
하지만 바깥의 광경은 그의 예상을 한참이나 벗어나 있었다.
400명이 넘는 기자들이 입구에서 빽빽하게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혁은 그 광경을 보자 지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을 때.
지나가던 시민들이 지혁을 발견한 건지 비명을 질렀다.
반응이 뜨거운 게 아직 호주 오픈의 효과가 유지되고 있는 모양이다.
하긴 준결승전이 치러진지 아직 3일밖에 지나지 않았다.
“꺄아아!”
“저기 이지혁이다!”
“어디!? 어디!?”
“진짜 이지혁이야!”
“와··· 입국장 앞에 있는 사람들 다 기자들인가?”
“진짜 엄청나네. 나는 할리우드 배우라도 온 줄 알았어.”
“얼마나 잘생겼는지 실물이나 한 번 보자.”
카메라들과 플래쉬가 공항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는지 입국장 근처로 점점 인파가 몰려들고 있다.
점점 소란스러워 지는 공항.
자칫하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보안직원들은 지금 상황을 대비하고 있었는지 지혁에게 달려와서 주변을 통제했다.
사람들의 불만 소리가 들리는 것 같지만 그들은 무덤덤한 표정이다.
아마도 공항에서 근무하다 보니 이런 상황을 많이 경험해 본 것 같았다.
“이틈에 빠져나가시죠. 더 지체하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어요.”
“네. 감사합니다.”
그렇게 지혁은 보안 직원들의 철통같은 경호를 받으면서 기자회견장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기자회견장.
지혁은 단상 위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얼마나 온 거야···.’
입국장에서도 숫자를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기자들이 많았는데.
이동하는 동안 연락을 돌렸는지 적어도 100명은 더 늘어난 것 같았다.
아마 한국에 있는 모든 언론사에서 자신을 취재하러 나온 모양이다.
‘기자회견장이 이렇게 좁았었나?’
분명 몇 개월 전에 왔을 때는 회견장이 엄청나게 넓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런 공간도 몇 백명이 들어차니 움직일 공간조차 없을 정도로 좁아 보인다.
“이제 시작할까요?”
커다란 카메라를 바닥에 배치하고 대부분의 기자들이 좌석에 앉았을 때.
진행자로 보이는 남자가 지혁에게 다가와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건넸다.
“저는 언제든지 가능해요.”
지혁의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파바바밧!
언제 겪어도 익숙하지 않는 플래쉬 세례.
몇 백이나 되는 기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지만 인터뷰는 생각보다 질서정연하게 진행되었다.
아마도 사전에 언론사들 끼리 순서를 협의하고 온 모양이다.
하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각각 자기 할 말을 하면 도저히 진행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이지혁 선수, 호주 오픈에서 좋은 성과를 얻은 걸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정말 대단한 활약이었어요.]
“감사합니다. 우승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조금 아쉽긴 하네요.”
평범한 답변임에도 호의적인 미소를 짓는 기자들.
워낙 대단한 성과를 얻어서인지 무슨 말을 하더라도 플러스가 되는 모양이다.
이걸 보면 지혁의 인기가 얼마나 높은지 알 수 있었다.
[한국인 최초로 그랜드슬램 4강 진출을 달성했습니다. 소감이 어떻습니까?]
“사실, 제대로 실감이 나지 않아요. 호주 오픈은 모든 테니스 선수들이 꿈꾸는 무대잖아요. 그런 대회에서 제가 준결승까지 진출하게 되다니···.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네요.”
가식이나 겸손을 떠는 걸로 보일 수도 있지만 방금 한 말은 솔직한 진심이었다.
지혁도 이번 호주 오픈에서 이렇게 좋은 결과를 얻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과거 10년 동안 프로 생활을 하면서 얻은 최고의 성적이 US오픈 8강이었으니 이번에도 8강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대진 운이 좋을 경우를 가정했을 때 말이다.
[준결승에서 패배한 요인이 뭐라고 생각하나요?]
“음···. 아무래도 실력 차이겠죠. 솔직히 머레이 선수의 경기력이 저보다 더 뛰어났어요.”
굳이 변명을 하자면 피지컬, 대전 상대, 탑랭커를 상대한 경험, 경기 상성 등 구구절절하게 패배의 원인을 나열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혁은 굳이 그런 사족을 붙이지 않았다.
앞의 조건들이 모두 충족된다고 해도 지금 실력으로는 머레이를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회도 끝났는데 허세를 부리면 추태밖에 되지 않는다.
[이지혁 선수는 이번 대회에서 탑랭커인 바브린카, 마린 칠리치, 앤디 로딕에게 승리를 따냈습니다. 5월에 열리는 롤랑 가로스에서도 비슷한 성적을 기대해도 될까요?]
“이번에 전력이 많이 드러나서 쉽지 않을 것 같네요. 그래도 최선을 다해보려고 합니다.”
[호주 오픈이 이제 막 끝났는데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입니까?]
“다음 대회에 출전할 때까지 훈련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지혁 선수, 마지막으로 팬들에게 한 마디······.]
그렇게 지혁은 2시간이 지나서야 기자회견장을 벗어날 수 있었다.
***
한국으로 돌아 온지 삼 일.
그동안 지혁을 찾는 곳이 엄청나게 많았다.
예능국, 잡지사, 시청, 협회, 광고주 등.
휴대폰 번호를 어떻게 알았는지 섭외가 물밀 듯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지혁이 가장 먼저 미팅을 잡은 것은 매니지먼트 회사들이었다.
아무래도 더 이상 혼자 활동하기에는 덩치가 너무 커졌기 때문이다.
이제 수입이 어지간한 중소기업을 넘었으니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진짜 이상한 제안도 많네. 무슨 생각으로 이런 계약서를 보낸 걸까?”
지혁은 변호사에게 검토 받은 계약서들을 하나하나 읽으면서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이번 호주 오픈에서 임팩트가 컸는지 접촉해온 매니지먼트는 국내외를 합쳐 20개가 넘었다.
그런데 외국에서 온 제안들은 대부분 괜찮았는데 한국에서 온 제안들이 정말 양심이 없다.
“이건 뭐야? 개인 매니지먼트?”
심지어 이번 기회에 매니지먼트 회사를 차려보겠다는 제안을 한 테니스 관계자도 있었다.
지혁이 돈이 될 거라는 예감이 들자 기회를 노리고 달려든 것이다.
계약을 체결하기만 하면 최소한 수십억은 챙길 수 있으니 ‘제발 걸리기만 해라‘라는 심정이겠지.
“예상했지만 역시 한국계 매니지먼트는 전부 수준 미달이네.”
감언이설이 많아서 업계를 잘 모르는 선수가 봤다면 분명 혹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혁은 산전수전을 다 겪으며 프로 생활을 했기 때문에 이런 제안들이 실속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툭. 툭. 툭.
지혁은 쓸모없는 계약서를 바닥으로 하나씩 던지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한 시간이 지나자.
책상에는 IMG와 STM의 제안서만이 남게 되었다.
두 회사는 제안이 온 회사들 중 가장 규모가 큰 글로벌 스포츠 매니지먼트였다.
IMG는 테니스에 맞춤 지원과 방대한 인프라로 유명하다면 STM은 선수의 상품성을 극대화 시켜주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런 곳에서 제안이 올 정도면 지혁의 위상이 얼마나 높아졌는지 알 수 있다.
“······역시 이쪽이 낫겠지.”
한참동안 고민하던 지혁은 결국 IMG의 손을 들어줬다.
그에게는 돈보다 명예가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그랜드슬램에서 지금보다 더 좋은 성적을 얻으면 부는 자연스럽게 따라 올 것이다.
“라파엘 나달과 로저 페더러도 IMG 소속이었지?”
이제 매니지먼트도 같아졌으니 운이 좋으면 휴식 시즌 때 같이 훈련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상대방 측이 허락해줘야 가능하겠지만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지혁의 제안이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높았다.
나달과 페더러같은 정상급 선수들은 전력을 발휘할 수 있는 훈련 상대가 항상 부족했으니 말이다.
“일정만 맞춰주면 거절하지 않을 거야.”
성격이 좋은 그들이라면 아마 재능 있는 유망주의 요청을 기분 좋게 받아들일 것이다.
지혁은 경외하던 선수들과 훈련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IMG와 계약하려는 마음이 더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