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CF
지혁이 매니지먼트를 선택하자 이후의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의 가치가 테니스 선수들 중에서도 상당히 높았기 때문에 IMG측에서도 최대한 신속하게 움직였던 것이다.
그렇게 이틀 만에 성사된 매니지먼트 계약.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이 일이 처리됐지만 IMG는 명성대로 풍부한 인프라를 보여주었다.
고작 하루 만에 전문가들로 이루어진 팀을 파견한 것이다.
IMG가 아시아와 한국에 수많은 지사를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며칠 후, IMG 한국지사 회의실.
“제시카, 스폰서 협상은 얼마나 진행 됐어요?”
“여기 정리 된 목록이에요.”
테이블 위에 서류를 내려놓는 제시카.
지혁은 보기 좋게 정리된 제안서를 천천히 읽어봤다.
“음··· 역시 가장 좋은 조건을 제시한 건 나X키, 라X스테, 아디X스네요.”
“네. 아무래도 의류와 신발의 시장 규모가 다른 물건들보다 훨씬 크니까요. 경기에 노출되는 시간도 차원이 다르고요.”
지혁은 제시카의 답변에 이해가 가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금발 머리의 미인이 자신의 담당이 됐다고 들었을 때는 매니지먼트의 의도를 의심했었다.
정확한 나이는 모르지만 제시카의 겉모습은 수십, 수백억이 왔다갔다하는 계약을 중재하기에 너무 어려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오해였지.’
지혁은 며칠 동안 제시카가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난 후 가지고 있던 대부분의 편견들을 해소할 수 있었다.
그녀의 뛰어난 일처리와 협상 능력으로 이때까지 멈춰있던 계약들이 믿기지 않는 속도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벌써 대부분의 스폰서 제안이 선택만 하면 될 정도로 정리되었으니 제시카의 능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짐작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녀도 사람인 이상 찾아보면 부족한 점이 있겠지만 그래도 지혁이 생각하기에 이 정도로 뛰어난 사람을 찾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IMG같이 세계적인 매니지먼트가 거물로 성장할 가능성이 높은 지혁에게 제시카를 담당으로 배정한 건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계약금은 나X키가 150억, 라X스테, X디다스는 130억을 제시했네요?”
“지혁의 활약에 비해 부족한 금액이죠? 아직 프로 활동 기간이 짧아서 기업들이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것 같아요. 메이저 대회에서 한 번 더 좋은 모습을 보여주면 적어도 50%이상 계약금을 올릴 수 있을 거예요.”
‘딱히 부족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지금 제안도 총 5년 계약이니 매년 지원 받는 금액이 25억에서 30억이다.
이 정도만 해도 투어 비용을 충당하기에 차고 넘친다.
‘그래도 전문가인 제시카의 말이 맞겠지.’
지혁은 제법 긴 프로 생활을 했지만 이런 업계의 사정을 자세하게 알지 못했다.
과거에도 테니스 의류와 라켓을 스폰 받은 경험이 있었지만 지금처럼 계약금이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균적으로 금액이 1억 5천 정도였고 가장 높을 때가 3억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것도 US오픈 8강에 진출하고 랭킹 50위를 찍은 전성기 시절에나 받을 수 있었지 ATP랭킹이 100위 아래일 때는 단 한 번도 스포츠 기업에게 후원 제안을 받지 못했다.
물론 그랜드슬램 예선전을 통과했다면 대접이 달라졌겠지만.
그 당시 지혁의 실력을 생각하면 상위 랭커들을 뚫고 본선에 진출 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때는 5억도 감지덕지하며 받았는데 지금은 백억이 넘는 계약금이라니.’
역시 스포츠 세계는 정상급 선수가 독식한다는 말이 전적으로 맞았다.
이렇게 소수가 돈을 쓸어 가는데 랭킹이 낮은 선수들에게 돈이 풀릴 리가 없었다.
실력대로 대우를 받는 것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라켓은 요X스, 윌X에서 연락이 왔어요. 계약 기간은 3년, 계약금은 45억, 50억이고요.”
‘확실히 옷과 신발보다는 조건이 떨어지네.’
라켓은 노출도가 높은 편임에도 불구하고 의류와 신발에 비해 시장의 규모가 작아서 상대적으로 계약금이 낮은 것 같았다.
그래도 연간 지급되는 돈이 15억이 넘으니 작은 편은 아니다.
“그밖에도 시계, 차량, 정장, 향수, 구두 등 다양한 브랜드들과 협의 중에 있어요.”
“그래서 총 금액이 얼마인가요?”
“음. 계약금을 다 합치면······300억이 약간 넘네요.”
담담한 어조로 300억이라는 금액을 말하는 제시카.
지혁은 비현실적인 숫자를 듣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금액이었기 때문이다.
그러기도 잠시 지혁은 급한 움직임으로 서류를 살펴보았다.
직접 눈으로 확인해보기 위해서였다.
‘304억이라······.’
모든 스폰서 계약을 체결한다면 받을 수 있는 계약금이다.
평범한 서민의 입장에서는 정말 천문학적인 수치.
물론 연간 스폰서 비용이 500억을 넘는 페더러와 비하면 조촐한 수준이다.
나달, 조코비치, 머레이, 바브린카만 해도 연 수입이 200억을 가볍게 넘으니 말이다.
하지만 국내 테니스 선수들 중에서는 이 정도만 해도 전례가 없었다.
“거기다 S증권에서 지급된 보너스도 있어요.”
“아, 옵션이 있었죠.”
계약서를 쓸 때 옵션을 넣긴 했지만 설마 이렇게 빨리 적용될 줄이야.
하긴 S증권도 예상하지 못했으니 그렇게 후한 조건을 제시했을 것이다.
“호주 오픈 준결승에 진출했으니까 보너스는 14억이네요.”
“S증권에서 속 쓰린 사람들이 많겠네요. 계약을 담당한 직원이 징계를 먹는 건 아니겠죠? 십억이 넘는 돈을 지불해야 하잖아요.”
“후후. 글쎄요. 그렇진 않을 걸요?”
지혁의 말이 재밌는지 희미한 웃음을 짓는 제시카.
그녀의 반응처럼 현재 S증권의 내부 분위기는 상당히 괜찮았다.
이번 호주 오픈으로 얻은 홍보 효과가 적어도 삼백억 이상이라는 분석이 나왔기 때문이다.
마케팅 업계에서도 이번 투자가 성공적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저렴한 비용으로 지혁을 선점해서 이만한 성과를 얻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실제로 비슷한 실력의 탑랭커를 섭외하려고 했으면 지금보다 세 배 이상의 계약금을 지출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니 지혁과 스폰서 계약을 추진한 직원은 아마 높은 확률로 성과급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 돈을 어디에다 써야하지······.”
엄청난 돈을 벌었지만 아직 미성년자 신분 때문에 마땅히 사용할 곳이 없다.
스포츠카를 운전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명품 같은 사치품을 구입하려고 해도 이미 협찬으로 인해 넘치도록 있다.
게다가 항상 훈련을 생활화 하고 있어서 캐주얼한 옷을 입는 상황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보통 교복을 제외하면 운동복을 입고 다니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우선 집부터 알아보는 게 어떨까요? 지금 지내는 곳은 보안이 너무 취약하잖아요.”
“음···. 그렇긴 하죠.”
이번 호주 오픈 이후로 어떻게 사는 곳을 알았는지 집 앞까지 찾아오는 사람들이 생겼다.
경찰이 개입하고 나서 그런 일이 많이 줄었지만 아직도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런 점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좀 더 고가의 집으로 이사하는 게 나을 것이다.
“그러면 제시카가 알아봐 줄래요?”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 최대한 빨리 리스트를 뽑아 드릴게요.”
그 이후로 두 사람은 어떤 스폰서 기업과 계약할지 의논하면서 오후를 보냈다.
계약금이 가장 높은 기업을 선택하면 좋겠지만 앞으로 몇 년 동안 사용할 용품이 정해지는 만큼 이런 일은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
자칫하면 경기력 저하가 올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
한국 지사에 방문하고 이주일 후.
지혁은 CF를 찍기 위해 아침부터 촬영장에서 메이크업을 받고 있었다.
“와··· 이지혁 선수, 피부가 정말 좋네요. 어떻게 관리한 거예요? 보통 운동선수들은 까무잡잡하지 않나?”
“테니스 선수라는 걸 몰랐으면 배우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아요. 언니, 여기 머릿결 부드러운 거 봐.”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은 화장과 머리를 해주면서 한참이나 호들갑을 떨었다.
아무래도 어지간한 배우보다 훨씬 더 잘생긴 지혁의 실물에 놀란 모양이다.
분장실 주변에는 그녀들을 제외하고도 힐끔힐끔 훔쳐보는 시선이 많았다.
지혁이 미디어에 노출된 경우가 극도로 적어서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
벌써 보름이나 지났는데 아직까지 인기가 식지 않은 모양이다.
“······.”
그렇게 주변에서 머리가 아플 정도로 관심이 쏟아졌지만 지혁의 표정은 의외로 덤덤했다.
언제부터인가 주위에서 보내는 칭찬에 아무렇지도 않을 정도로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호주 오픈에서 만 명이 넘는 관중들에게 둘러싸인 경험도 영향이 있겠지만 이렇게 변한 가장 큰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아마 작년 여름부터 그랬었지?’
외모의 등급이 상승한 이후로 학교에서 지금과 비슷한 상황이 상당히 많이 일어났다.
팬을 자청하는 여학생들이 쫓아다니거나 고백을 받는 일이 마치 일상처럼 벌어진 것이다.
B등급일 때도 그랬는데 이번에 A등급이 되면서 안 그래도 뛰어난 외모가 한 번 더 업그레이드 됐다.
예전의 모습이 평범한 배우와 비슷했다면 이제는 독보적인 얼굴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러니 그녀들이 호들갑을 떠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됐다.
‘그런데 생각보다 오래 걸리네.’
지면 광고를 촬영했을 때는 상당히 빨리 끝났던 걸로 기억한다.
하지만 CF는 개런티를 많이 주는 만큼 준비 시간도 많이 걸리는 모양이다.
‘언제쯤 끝나려나. 오늘 안에는 돌아갈 수 있을까?’
연기를 해본 적이 없어서 촬영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아마 NG를 생각하면 빨리 끝나지는 않을 거다.
‘이래서 웬만하면 CF를 거절하려고 했는데.’
이제 돈에 구애받을 정도로 궁핍하지 않아서 광고를 받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든든한 스폰서들이 뒤에서 버티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혁은 어쩔 수 없는 사정 때문에 이번 광고를 받아들였다.
CF의 광고주가 지금까지 투어 비용을 부담해 준 S증권이었기 때문이다.
‘개런티라도 작았으면 그걸 빌미로 요청을 거절했을 텐데.’
하지만 출연료마저 최상급 대우여서 도저히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메인 스폰서가 이렇게까지 배려해줬는데 후원받는 선수 입장에서 거절하는 게 쉽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해외 원정을 다니면서 S증권에게 받은 배려들을 생각하면 솔직히 이 정도는 양심상 받아들이는 게 맞았다.
스폰서 계약 기간이 많이 남은 만큼 앞으로의 관계를 생각해서도 말이다.
“이제 끝났어요.”
메이크업이 끝났다고 말하는 직원,
지혁은 드디어 분장실을 벗어날 수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촬영장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들리는 맑은 목소리.
고개를 돌리니 TV에서나 보던 사람이 보인다.
본업은 아이돌이지만 여배우로 더 유명한 인물.
이번에 같이 CF를 찍게 될 최하늘이다.
‘도착했을 때는 없었는데 언제 왔지? 그런데 역시 배우는 배우네.’
“정말 팬이에요! 이지혁 선수 경기를 보고 저도 테니스를 배우고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