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CF
걱정했던 것과 달리 순조롭게 진행된 촬영.
처음 예상했던 것보다 NG가 적어서 벌써 촬영은 상당히 많이 진척됐다.
‘만약 나 혼자였으면 힘들었을 거야.’
옆에서 리드해 주는 사람이 있으니 확실히 편하다.
잘 모르거나 애매한 부분이 있을 때마다 상대 배역인 하늘이 친절하게 연기 코칭을 해준 것이다.
괜히 S증권이 비싼 출연료를 지불하고 출연자를 늘린 게 아니었나 보다.
광고를 처음 찍는 지혁을 커버하기 위해 요즘 연기력으로 유명한 하늘을 섭외한 것이다.
그녀가 아니었더라면 오늘 촬영이 어떻게 됐을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컷! 좋았어요. 이번에는 이지혁 선수가 하늘 양에게 테니스를 가르쳐주는 장면을 찍겠습니다.”
감독의 말이 끝나자마자 스튜디오 안으로 테니스 라켓을 전달해주는 직원.
촬영이 지연되지 않고 수월하게 흘러가자 감독의 표정은 싱글벙글해 보였다.
오늘 운동선수랑 광고 촬영을 한다고 해서 단단히 각오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지혁이 보여주는 모습을 생각하면 그런 걱정이 기우였나 보다.
탑배우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외모와 일반인치고 나쁘지 않은 연기력 덕분에 아무렇게나 찍어도 모든 장면들이 화보처럼 나왔던 것이다.
감독은 이 많은 컷들 중에 어떤 걸 사용해야 될지 벌써부터 걱정이 되었다.
딱!
촬영의 시작을 알리는 슬레이트 소리.
지혁은 미리 약속된 대본대로 하늘의 옆에 붙어서 스윙 자세를 교정해주었다.
물론 실제로 테니스를 가르치는 건 아니었다.
그저 보기 좋게 상황을 연출한 것이다.
“다리 간격을 조금 더 벌리고 팔을 몸 쪽에 붙여야 해요.”
후웅!
지혁은 하늘의 손을 감싸며 라켓을 천천히 휘둘렀다.
그렇게 스윙을 지도를 하는 장면을 찍다보니 어쩔 수 없이 뒤에서 껴안는 자세가 되었다.
선남선녀가 스킨십을 하는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짓는 촬영장 사람들.
그저 연기일 뿐이지만 계속 붙어있다 보니 두 사람 사이에서 뭔가 미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하지만 다행히도 당사자들만 눈치챌 수 있는 아주 미세한 느낌이라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한 것 같았다.
“컷! 이제 됐습니다.”
짝짝짝짝.
“너무 잘하시는데요? 연기 쪽에도 재능이 있나 봐요.”
여덟 번의 재촬영 끝에 마침내 떨어진 오케이 사인.
이전보다 더 빨리 끝난 상황에 감독은 박수를 치며 지혁을 칭찬했다.
지혁의 연기가 처음보다 더 능숙해졌기 때문이다.
이제 처음에 대사를 버벅거리던 모습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다.
“······.”
그렇게 촬영이 끝나자 지혁의 품에 안겨있던 하늘이 빠져 나온다.
움직임이 느린 게 뭔가 아쉬운 모양이다.
힐끗힐끗
스튜디오 밖으로 퇴장하면서 몰래 지혁을 훔쳐보는 하늘.
무슨 이유에서 인지 그녀의 얼굴은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이제 단독 샷만 남았습니다. 이번 컷만 끝내면 집으로 돌아가실 수 있어요. 간단한 장면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멋있게 찍어 드릴게요.”
마지막 장면은 지혁이 테니스 선수라는 걸 강조하기 위해 라켓을 다루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같이 출연하는 하늘도 있었지만 그녀는 이번 장면에서 제외되었다.
아무래도 이번 광고의 주인공은 지혁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 누리고 있는 인기와 영향력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애초에 두 사람의 출연료가 다섯 배 이상 차이 났으니 말이다.
“그럼 몸 풀 시간을 드릴게요. 이지혁 선수가 만족할 만큼 준비가 되면 언제든지 근처에 있는 직원들에게 말씀해주세요.”
“네.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통. 통. 통.
그렇게 준비 시간이 주어지자 지혁은 라켓 면으로 공을 튕기면서 천천히 감각을 되찾아갔다.
30cm, 70cm, 1m, 2m, 3m.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상승하는 공의 높이.
그 모습이 마치 축구공으로 리프팅을 하는 것과 비슷하게 보였다.
라켓을 사용한다는 것이 결정적으로 달랐지만 말이다.
그렇게 5분 정도 지났을 때.
‘음. 이 정도면 연습은 충분해.’
휘릭-
지혁은 어느 정도 감각이 돌아왔다고 판단되었는지 갑자기 라켓을 90도로 돌렸다.
“앗!”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행동에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지켜보던 사람들이 작은 비명을 질렀다.
이대로라면 공을 놓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노란 궤적을 그리며 빠른 속도로 낙하하는 공.
퉁!
하지만 지혁은 딱딱한 라켓 프레임 옆면으로 테니스공을 컨트롤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퉁! 퉁! 퉁!
와아아아!
그 신기와도 같은 라켓 컨트롤에 주위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지혁의 표정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담담했지만 촬영장 사람들 입장에서는 정말 고난이도의 기술로 보였던 것이다.
실제로 일반인들은 탄력이 있는 스트링으로도 저렇게 안정적으로 공을 받아내기 힘들다.
라켓의 수평이 약간만 틀어져도 공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딱딱한 프레임으로 공을 저렇게 자유자재로 다루다니.
프로 중에서도 저런 광경을 보여줄 수 있는 선수는 극히 드물 것이다.
저런 모습은 선천적으로 감각을 타고나거나 지혁처럼 특출 난 실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기예였으니 말이다.
와아아아!
그렇게 환호성을 지르는 사람들로 스튜디오가 계속 소란스럽자 휴식을 취하고 있던 감독이 지혁의 기행을 눈치 챘다.
잠깐 놀란 표정을 하더니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감독.
눈이 반짝이는 게 뭔가 흥미로운 물건을 본 얼굴이다.
아마 더 좋은 장면을 찍을 수 있다는 생각에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거겠지.
“이지혁 선수! 촬영에 들어가면 지금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실 수 있나요?”
“물론이죠. 어려운 일도 아닌 걸요.”
퉁! 퉁! 퉁!
지혁은 감독과 대화를 하느라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로 말했다.
하지만 라켓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공을 계속 튕겨냈다.
그 여유로운 모습에 감독은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아무래도 좋은 장면을 찍을 수 있을 것 같았다.
***
“컷!”
짝짝짝짝.
“이지혁 선수, 수고하셨어요!”
“첫 광고 촬영이 힘들었을 텐데 열심히 해주셔서 감사해요.”
“그런데 연기를 정말 잘하시던데요?”
“다음 대회도 응원할게요!”
드디어 끝난 마지막 장면.
지혁은 촬영을 하면서 같이 고생했던 직원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며 인사를 했다.
그렇게 한참동안 인파에 둘러싸여 있다 풀려나니 근처에서 하늘이 다가오는 모습이 보인다.
아무래도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사람들이 빠질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나보다.
‘······.”
막상 2m 거리까지 가까워졌지만 어딘가 주뼛주뼛하는 하늘.
뭔가 말하지 못할 사정이 있는 모양이다.
원래 활발하던 사람이 갑자기 저렇게 행동하니 말이다.
그렇게 20초 정도 지났을까, 결국 지혁은 어색한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먼저 하늘에게 말을 건넸다.
“오늘 저 때문에 고생 많이 하셨죠? CF를 찍어 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혔는데, 하늘 씨가 도와주셔서 정말 큰 도움이 됐어요.”
“아···아니에요! 저도 많이 배웠는걸요.”
지혁의 말에 두 손을 저으며 부정하는 하늘.
표정을 보면 정말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다.
8시간이 넘는 촬영을 해서 그녀도 분명 피곤했을 텐데.
말이라도 저렇게 해주니 상당히 고맙다.
그렇게 대화가 지속되자 하늘은 긴장이 조금 풀린 모양이다.
“저···. 악수 한 번 할 수 있을까요?”
“얼마든지요.”
마지막 인사로 악수를 하려는지 손을 내미는 하늘.
바스락.
그렇게 손을 마주잡자 손바닥에서 이상한 느낌이 든다.
“음?”
“······저는 다음 스케줄이 있어서 이만 가볼게요.”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하늘의 얼굴을 쳐다보자 그녀는 다음 스케줄이 있다며 촬영장 입구로 뛰어간다.
정확한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정말 급한 일이 있는 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소속사가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CF촬영 날에 다른 일정을 잡아 놨을 리가 없다.
“······뭐지?”
지혁은 시야에서 하늘이 완벽하게 사라지자 쥐고 있던 손에서 천천히 힘을 풀었다.
그러자 예쁘게 접힌 쪽지 보인다.
아무래도 이걸 자연스럽게 전달하기 위해 악수를 하자고 한 모양이다.
부스럭.
주위에 있는 촬영장 직원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몰래 쪽지를 펼쳐보자 아기자기한 글씨로 적힌 편지 내용이 보였다.
오늘 촬영 정말 멋졌어요!
괜찮으시면 나중에 테니스 가르쳐 주실래요?
이지혁 선수랑 친해지고 싶어요!
혹시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ㅠㅠ
010-3514-XXXX
“허···.”
설마 연예인한테 연락처를 받을 줄이야.
같이 촬영할 때 분위기가 괜찮기는 했지만 지혁은 지금 같은 상황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하늘처럼 유명한 아이돌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올 줄 몰랐던 것이다.
‘그런데 의외네.’
분명 부끄러움이 많은 성격인 것 같았는데.
오늘 보여줬던 모습이 가식이 아니라면 정말 용기를 많이 낸 모양이다.
“어떻게 할까······.”
원래 이런 쪽지를 받았을 때 전혀 고민하지 않고 버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특수한 상황이라 조금 망설여졌다.
지혁도 어쩔 수 없이 미녀에게 약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하늘같은 여자가 지금처럼 호감을 표시하는 상황이 쉽게 올 리가 없었다.
“후······. 역시 안 되겠지.”
분명 절호의 찬스였지만 지혁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유명 아이돌과 엮이면 피곤해 질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만약 개인적으로 만나는 모습을 기자들에게 찍히기라도 하면 무조건 포털사이트 검색어와 연예 1면을 장식하게 될 것이다.
이제 지혁은 명실상부한 국내 최고의 스포츠 스타였으니 말이다.
그런 존재가 유명 아이돌과 교제하는데 언론들이 가만있을 리가 없었다.
“연애는 무슨, 연습이나 하자.”
결국 지혁은 수많은 장애물들을 극복할 자신이 없어서 하늘과 연락하는 걸 단념했다.
진심으로 좋아하는 여자였다면 분명 지금과 다르게 행동했겠지만, 아직 그녀에게 그 정도의 감정은 없었다.
***
CF촬영이 끝나고 다음 날 저녁.
지혁은 아카데미 실내 코트에서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이곳저곳 시험하고 있었다.
급격히 상승한 피지컬이 얼마나 몸에 체화됐는지 확인해보려고 요즘 들어서 매일 하는 행동이다.
얼마 전만 해도 아카데미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하지만 몇 주 동안 지혁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떨어져나갔다.
이미 국내 사람들이 모두 알게 될 정도로 유명해진 지혁이 더 이상 이곳에 나오지 않는 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음. 이제 괜찮아진 것 같네.”
보름이 넘는 기간 동안 몸에 데미지를 줄만한 하드 트레이닝을 하지 않아서 체력은 완전히 회복된 것 같았다.
하지만 키와 신체 능력이 증가한 영향으로 아직도 선명한 이질감이 느껴진다.
이래서 호주 오픈 대회 중에 어플의 한계가 해제 됐음에도 손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경기력에 영향을 줄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테니스의 스윙은 마치 정교한 기계와 같아서 약간이라도 밸랜스가 무너지면 급격하게 위력이 하락한다.
갑자기 힘과 움직임이 빨라진다고 해도 안 하느니만 못한 상황이 되는 것이다.
“그래도 지금 추세면 충분히 다음 대회까지 적응할 수 있어.”
무려 3개월에 가까운 시간이 있으니 아직 시간은 넉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