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성장
“첫 ATP마스터즈가 미국에서 열리는 인디언 웰스 오픈이었지?”
3월 초반에 열리는 대회라서 참가한지 오래됐는데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웰스 오픈은 96명의 선수가 본선에 참가했었지···. 역시 이번에도 만만하지는 않겠네.”
프로 테니스 대회 중 가장 권위 있는 그랜드슬램의 본선 진출자가 총 128명이다.
그런데 96명이라니, 이 정도면 미니 그랜드슬램이라 불러도 부족하지 않은 거대한 규모다.
아마 최상위 랭커들도 모두 참가할 테니 우승 경쟁률도 호주 오픈과 크게 차이나지 않을 것이다.
“그 기간 동안 ATP250와 ATP500이 몇 개나 오픈했었지? 10개 정도였나?”
웰스 오픈이 개최되기 전까지 지혁이 참가할 대회라면 넘치도록 많았다.
이제 랭킹도 높아서 원하는 곳에 참가 신청만하면 어렵지 않게 본선 자동 진출권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다른 선수들처럼 힘들게 예선전을 치를 필요도 없다.
마스터즈에서 만날 탑랭커들을 생각하면 ATP250에 연습 삼아 참가하는 것도 나름 괜찮은 선택이다.
“분명 좋은 기회지만······. 지금은 훈련을 하는 게 더 중요해.”
3월까지 프로 대회에 출전하지 않으면 랭킹을 올리는데 상당한 불리함이 생길 것이다.
그러다보면 롤랑에서도 시드를 받지 못할 확률이 매우 높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라면 따로 훈련할 시간이 없다.
“마음 같아선 4월까지 쉬고 싶은데 조금 아쉽네.”
아마 모든 선수들이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겠지만, 지혁은 항상 만전의 상태로 경기에 임하고 싶었다.
순수한 실력이 아니라 컨디션 난조나 부상으로 패배하는 게 너무나 싫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ATP랭킹 79위 안의 선수들은 마스터즈 대회에 무조건 참가해야한다.
만약 부상 같은 뚜렷한 사유가 없다면 불참했을 때 제법 큰 패널티를 받게 될 것이다.
떠오르는 유망주의 활약을 기대하던 대중들의 시선도 좋지 않을 것이고 말이다.
아마 인기와 돈 맛을 보고 테니스에 관심이 떨어졌다고 수근거리겠지.
“······롤랑을 대비한 연습 경기라고 생각하자.”
지혁은 그런 무리수를 둘 만큼 어리석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 웰스 오픈은 반드시 참가할 생각이었다.
대회에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지만,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주어진 여건 안에 최선을 다하는 게 맞다.
“······이제 몸도 풀렸으니 훈련을 시작할까.”
복잡하던 생각이 어느 정도 정리되자 지혁은 스트레칭을 마무리하고 라켓을 챙겼다.
실내 코트에는 그를 도와줄 사람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지만 훈련을 하는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오늘은 서브 하나만 연습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흐읍!”
탕!!
그렇게 시작된 지혁의 서브 훈련.
비록 스피드건이 없어서 서브의 속도를 측정하는 게 불가능했지만, 공은 쏜살같이 반대편 코트로 날아갔다.
쿵!!
잠시 후 묵직한 소리와 함께 공이 바운드 되었다.
“휘유······.”
지혁은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이렇게 빠른 서브라니, 이 정도 속도면 호주 오픈보다 적어도 10km는 더 빨라진 것 같았다.
“아직 컨트롤이 떨어지는 게 조금 아쉽지만···.”
그래도 이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다.
탕!! 탕!! 탕!!
사람 한 명 없는 실내 코트에서 계속해서 들리는 임팩트 소리.
저녁 훈련은 2시간이 넘어서야 마침내 끝났다.
“허억···허억···.”
2시간의 하드 트레이닝을 마치자 전신에서 탈력감이 느껴질 정도로 체력이 고갈되었다.
이 상태로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지혁은 코트 위에 대자로 누워서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실력이 향상되는 게 뚜렷하게 체감되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육체적으로 힘들어도 이런 보상이 있다면 얼마든지 고통을 감수할 가치가 있다.
“언제 봐도 믿기지 않는단 말이야.”
보통 이런 성장은 몇 년에 걸쳐서 일어나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어플은 지혁의 기량을 단기간에 몇 단계나 상승시켰다.
“이대로 몇 년이 지났을 때가 기대되네.”
과연 어떤 경지까지 도달할 수 있을까.
어플의 한계가 막히는 경우나 여러 가지 변수를 고려하면 정확한 결과를 예상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지금 추세라면 ATP랭킹 5위까지는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다.
“결국에는 머레이도 꺾을 수 있겠지.”
그때가 되면 호주 오픈 준결승전에서 느꼈던 패배감도 되돌려 줄 수 있을 것이다.
지혁은 그 날이 빨리 오길 바라면서 꼼꼼하게 마무리 스트레칭을 했다.
체력이 모두 고갈된 상태에서 꼼짝도 하고 싶지 않았지만, 괜히 게으름을 피웠다가는 원하지 않는 근육통이 생겨서 내일 훈련에 지장이 있을 수도 있었다.
아주 낮은 확률로 부상이 생길 수도 있고 말이다.
그런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절대 꼼수를 부리면 안 된다.
***
아카데미에 출석하길 며칠.
지혁은 오랜만에 구지연을 만날 수 있었다.
한국으로 귀국하고 나서 간간히 연락을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만나는 건 오늘이 처음이다.
그동안 워낙 스케줄이 바빴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끔 아카데미에서 훈련을 하더라도 사람이 없는 저녁 시간에나 출입을 했으니 물리적으로 마주칠 방법이 없었다.
“오빠! 저랑 한 약속은 잊지 않았죠?”
지연은 아카데미에서 지혁을 만나자마자 잔뜩 기대하는 눈빛으로 말했다.
“시간나면 경기 상대를 해달라고 말한 거? 당연히 기억하고 있지. 통화할 때마다 매번 부탁했는데 어떻게 잊어먹겠어.”
“후후후. 드디어 호주 오픈 4강 진출자의 실력을 경험해 볼 수 있겠네요. 제가 얼마나 기대했는데요.”
“그런데 경기는 이전에도 자주 하지 않았나? 별로 다를 건 없을 건데.”
“호주 오픈에서 실력이 엄청나게 늘었잖아요! 분명히 달라진 점이 있을 거예요. 저도 그 비결을 배우고 싶어요.”
그러고 보니 지연의 말이 마냥 근거가 없는 것도 아니다.
최근 그녀와 경기를 한 게 벌써 한 달이 넘었다.
‘그때보다 기량이 많이 증가하긴 했지.’
호주 오픈에 출전하기 전의 실력이 ATP 랭킹 50위 수준이라면 지금은 대략 10~20위와 비슷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고작 30위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한 번이라도 랭킹 20위 안에 들어가는 선수는 정말 극소수다.
테니스 선수는 랭킹이 높아질수록 필연적으로 부딪치게 되는 커다란 벽이 있기 때문이다.
지혁도 과거에 100위와 50위를 돌파할 때 제법 긴 시간동안 고생했었다.
“그래, 몸은 다 풀었어?”
“당연하죠. 바로 시작하면 돼요.”
신난 표정으로 반대편 코트로 달려가는 지연.
실력차이가 뚜렷했던 만큼 경기는 정식 규정을 따지지 않고 널널한 분위기로 진행되었다.
“하앗!”
탕!
그렇게 지연의 서브로 시작된 경기.
거의 보름 만에 서브를 받았지만, 지혁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다리를 움직였다.
‘너무 느린데······.’
불과 한 달 전까지 탑랭커들의 공을 받았던 영향인지 공이 슬로우 모션이 걸린 채로 날아오는 것 같았다.
하긴 바브린카, 칠리치, 로딕, 머레이 같은 최강의 서버들을 상대하면서 밥 먹듯이 220km가 넘는 서브를 받았으니, 180km도 안 되는 지연의 서브가 느릿하게 느껴지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퉁!
그림과도 같은 지혁의 포핸드 리턴.
감탄이 나올 정도로 훌륭한 자세였지만, 지연은 흔들림 없이 스트로크를 받아낸다.
물론 한 달 사이에 그녀가 깨달음을 얻어 지혁을 상대할 수준이 된 건 아니다.
승패가 중요한 경기가 아니다보니 지혁이 나름대로 배려를 해준 것이다.
애초에 지혁이 본래의 실력을 발휘하면 제대로 경기가 진행되지도 않는다.
고작 고등부 여자 테니스 선수가 그랜드슬램 4강 진출자의 전력을 받아낼 수 있을 리 없으니 말이다.
탕! 탕! 탕!
두 사람의 랠리는 안정적으로 흘러갔다.
지혁이 치기 좋은 코스로만 스트로크를 보냈기 때문이다.
그렇게 20구가 넘어가자 지혁은 자신의 실력이 증가했음을 확실하게 체감할 수 있었다.
탕!
‘스텝이 두 걸음이나 남네.’
분명 바운드 지점까지 도착했는데도 아직도 공이 떨어질 기미가 안 보인다.
상대의 스트로크 파워가 약한 이유도 있지만, 이건 이전보다 향상된 신체 능력과 스플릿 스텝의 영향이다.
‘부족한 부분도 보이고······.”
어플로 인해 전반적으로 테니스 기술의 숙련도가 올랐기 때문인지 지연에게 개선해야할 약점들이 뚜렷하게 보인다.
분명 예전에는 발견하지 못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역시 뭐든지 아는 만큼 보이는 모양이다.
그렇게 지혁은 지연이 만족할 만큼 경기 상대를 해줬다.
아직 밸런스가 깨져있어서 만전의 상태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지연을 상대하면서 그런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처음부터 전력을 발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통제 할 수 있는 수준으로 힘을 사용하면 지금도 서브와 스트로크의 컨트롤이 흔들리는 일은 없었다.
쿵!!
지혁의 포핸드 위너로 마침내 두 사람의 경기가 끝났다.
무려 한 시간이 넘는 대결이었다.
반대편 코트에 있는 지연의 표정을 봤을 때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았다.
거친 숨을 내뱉을 정도로 지친 상태였지만 만족한 표정이었으니 말이다.
“음?”
그렇게 경기가 끝나고 잠시 후, 지혁은 실내 코트에서 사람을 한 명 발견할 수 있었다.
집중하고 있어서 몰랐는데 누군가 경기를 구경하고 있었나 보다.
라켓 가방을 옆에 두고 있는 걸 보니 테니스를 치러 온 것 같았다.
‘새로운 수강생인가?’
지혁이 시선을 다른 곳에 두고 있자 얼마 지나지 않아 지연도 실내 코트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 현주 언니!”
“아는 사람이야?”
“네. 얼마 전부터 아카데미에서 같이 수업을 듣고 있어요. 현주 언니도 고등부 테니스 선수에요. 나이는 오빠랑 동갑이구요.”
‘고등부 선수라고? 실력은······뛰어나 보이지는 않네.’
기억에 없는 걸 보면 분명 유명한 선수는 아니다.
그래도 미래에 프로가 될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겠지만, 훈련을 하러 오면서 잔뜩 꾸미고 온 걸 보면 별로 가망성이 없어 보인다.
보통 지금 시기에는 테니스에만 집중해도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좌절하는 선수들이 부지기수인데 저렇게 다른 곳에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으니 말이다.
정말 대단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면 좋은 성과를 얻기는 힘들 것이다.
타다다닷!
현주는 자신에게 시선이 집중되자 고개를 푹 숙이며 지연에게 달려왔다.
얼굴이 빨갛게 변한 게 뭔가 부끄러운 모양이다.
그래도 운동선수라서 달리기는 일반인보다 빨라 보인다.
속닥속닥.
들리지 않게 작은 목소리로 대화하는 두 여자.
무슨 내용인지 모르지만 자꾸 이쪽을 훔쳐보는 걸 보면 아마도 자신의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지혁은 두 사람 사이에 끼어 들 수도 있었지만 굳이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 벤치에 앉아서 그녀들을 기다렸다.
어차피 용건이 있으면 알아서 찾아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