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S증권 실업팀
20분 후, 지혁은 경기를 준비하기 위해 짧은 휴식을 마치고 벤치에서 일어났다.
“이지혁 선수, 잘 부탁합니다.”
고개를 꾸벅이며 인사하는 대희.
그는 지혁보다 나이가 6살이나 더 많았지만 깍듯한 태도를 보였다.
어지간한 선수라면 선배 노릇을 할 수 있겠지만, 지혁의 사회적 위치를 고려하면 마음대로 행동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의 눈치도 보였고 말이다.
“네. 서로 좋은 경험이 됐으면 좋겠네요.”
두 사람은 간단하게 악수를 하고 각자의 자리로 이동했다.
그러자 코트 주변에서 흥미로운 시선이 쏟아졌다.
아무래도 사람들은 호주 오픈 4강 진출자와 S증권의 최고 실력자의 대결이 기대되는 모양이다.
“박 코치님, 이번 경기는 어떻게 될 것 같아요? 동현이도 제법 선전했으니까 대희는 더 좋은 모습을 보여주겠죠?”
“흠······. 랭킹으로만 따지면 그렇긴 한데. 방금 전 경기를 보고나니 확신할 수가 없네.”
“하긴 동현이가 워낙 잘하긴 했죠. 정규 대회에 참가했을 때 오늘 같은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았을 텐데.”
“아직 입단한지 1년 밖에 안 된 녀석이니까 너무 서두르지 마. 오늘 보니까 경험만 쌓이면 투어 선수로 무난하게 성장할 수 있겠더라.”
코치들은 대희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얘기하며 경기가 시작하기를 기다렸다.
그들 중 지혁이 패배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무래도 직접 그의 실력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에 절대 반전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게 소곤소곤 대는 목소리가 한동안 들렸지만, 당사자들은 전혀 관심이 없는지 곧바로 경기가 시작되었다.
“흐읍!”
쾅!!
지혁은 처음부터 200km가 넘는 서브를 서비스 코트에 꽂아 넣었다.
그래도 위력에 비해 코스를 신경 쓰지 않은 덕분인지. 대희는 제법 안정적으로 리턴에 성공했다.
네트를 넘어서 베이스라인으로 날아가는 공.
‘오, 이걸 받아 낸다고? 역시 랭킹 값은 하네.’
확실히 프로 경력이 상당한 만큼 고속 서브를 받는 것도 익숙해 보인다.
물론 220km가 넘는 서브를 사용한다면 상황은 달라질 것이다.
그 정도가 되면 챌린저 대회에서 만날 수 있는 수준을 한참이나 벗어나니 말이다.
‘그럼 스트로크는 어떤지 한 번 확인해볼까?’
탕! 강력한 스핀이 걸린 채로 날아가는 지혁의 리버스 포핸드.
코트에 떨어진 공은 큰 각도를 만들어내며 높이 튀어 올랐다.
“크윽.”
대희는 부지런히 발을 움직인 덕분에 스트로크를 쫓아가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바운드 된 공에 탑스핀이 많이 걸린 탓인지, 그의 자세는 상당히 불안정했다.
머리 높이까지 튀어 오르는 공이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풀너풀하게 날아오는 공.
탕! 네트 앞에 바짝 붙어 있던 지혁은 발리로 첫 포인트를 마무리했다.
[피프틴 러브.]
첫 포인트를 따낸 지혁은 그 이후로 같은 방법으로 경기를 진행했다.
탐색전을 하면서 대희가 얼마나 자신의 실력을 받아낼 수 있을지 시험한 것이다.
[게임 이지혁 3-0.]
‘생각보다 너무 싱거운데?’
지혁은 두 번째 서비스게임을 승리하고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경기가 진행될수록 대희가 힘을 쓰지 못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스트로크와 풋워크의 숙련도를 보면 권동현 선수보다 실력은 더 뛰어난 것 같은데.’
하지만 따로 준비해온 전략이 없어서 인지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다.
챌린저 대회에 참가하면 무난하게 만날 수 있는, 그저 평범한 선수의 실력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정도 수준의 상대는 지혁에게 아무런 감흥도 줄 수 없다.
‘이게 당연한 거였지······.’
이전 경기에서 동현이 너무 좋은 경기력을 보여줘서 잠깐 착각했다.
그런 상황이 연달아 일어날 리 없는데 말이다.
애초에 자신을 만족시킬 만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300위라는 랭킹에 머무르지도 않았을 거다.
‘······그냥 빨리 끝내버리자.’
지혁은 상대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자 플레이 방식을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경기의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의도적으로 억제하고 있던 전력을 사용하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경기가 허무하게 끝날 가능성이 높지만, 그래도 지금처럼 의미 없이 체력과 시간을 낭비하는 것보다는 낫다.
***
[게임 세트. 매치 이지혁. 6-0, 6-0.]
두 번의 베이글 세트로 마무리 된 경기.
지혁이 대희의 사정을 봐주지 않고 진지하게 경기에 임하자 나온 스코어였다.
그 압도적인 결과에 주변은 침묵에 휩싸였다.
동현을 상대할 때 볼 수 없었던 탑랭커의 실력을 이제야 실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저 정도는 해야 그랜드슬램 4강에 진출하는구나······.”
“엄청 나네요······. 어떻게 해야 저런 샷을 칠 수 있을까요.”
코치들로 인해 웅성거리는 실내 코트.
그들은 자신이 본 광경이 믿기지 않는지 한참 동안 지혁에 대해 수근거렸다.
‘실전에서는 이 정도인가?
지혁은 주변에서 쏟아지는 따가운 시선들을 무시하며 방금 전 경기를 복기해봤다.
호주 오픈 이후, 실전에서 전력을 발휘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파워가 강해지니까 이점이 상당하구나.’
그리 까다롭지 않은 코스로 스트로크를 보냈는데 속도가 빨라지니 그것만으로도 샷이 엄청난 위력을 보였다.
경기 초반에 통하지 않았던 어중간한 스트로크가 번번이 득점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컨트롤은 아직 잡히지 않았어.’
그래도 최근에 했던 훈련이 효과가 있었는지 처음보다는 이질감이 많이 줄었다.
이대로 3월까지 시간을 투자한다면 계획대로 완전히 적응할 수 있을 것 같다.
저벅저벅.
마무리 인사를 하려고 지혁에게 다가온 대희.
그는 표정이 약간 어두웠지만, 크게 충격을 받은 것 같지는 않았다.
이미 프로 생활이 상당했던 만큼 경기의 결과를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스코어가 너무 처참해서 기분이 조금 상했을 뿐이다.
“역시 상대가 안 되네요. 탑랭커다운 실력이었어요.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희는 악수를 하고 별말 없이 등을 돌렸다.
그렇게 준비됐던 경기가 모두 끝나자 지혁은 같이 왔던 코치들과 함께 훈련장을 떠났다.
이왕 방문한 김에 연습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지금 몸 상태를 고려하면 쉬는 게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
3월 2일, 금화고등학교 개학날.
방학 동안 지혁은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으며 시간을 알차게 보냈다.
서브와 스트로크의 숙련, 피지컬 트레이닝, 전략 연구, 탑랭커 분석 등 계획했던 훈련들을 완벽하게 소화한 것이다.
쉬는 날이 단 하루도 없었으니 일정이 얼마나 빡빡했는지 어느 정도 짐작이 될 것이다.
훈련하는 게 일상처럼 익숙해진 지혁도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았으니 말이다.
“벌써 개학날이네.”
지혁은 매니지먼트에서 준비해준 차량을 타고 금화고로 등교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제 혼자 돌아다닐 수 없을 정도로 유명해졌기에 옆에 매니저가 붙은 것이다.
이게 얼마 만에 가는 학교인지 모르겠다.
1학년 초반에는 나름 성실하게 다녔던 걸로 기억한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출석하는 날보다 결석 일수가 훨씬 더 많아졌다.
아마 프로 대회에 본격적으로 출전하고 나서부터 그랬을 것이다.
“이제 학교를 다니는 게 의미가 있나.”
대학 입학이나 차후에 지도자 생활을 하려면 고등학교에 계속 다니는 게 유리하다.
고등부에 속해 있으면 국내 대회에서 다양한 경력을 쌓을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혁은 이미 프로 선수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테니스를 제외한 다른 선택지가 더 이상 필요 없는 것이다.
“프로 생활을 편하게 하려면 자퇴를 하는 게 정답인데.”
그래도 ‘고등학교는 졸업해야지‘라는 생각 때문에 망설여진다.
게다가 아버지와 주변인들도 자퇴를 말리는 입장이었다.
만약 금화고등학교에 테니스 전형이라는 제도가 없었다면 선택이 편했을 것이다.
애초에 출석일수 부족으로 졸업을 하지 못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지혁의 학교는 선수 생활을 하면서 졸업을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었다.
“음······. 일단 다니자.”
그렇게 지혁은 한참 동안 고민하다가 당분간 학교를 다니기로 결정 했다.
분명 번거롭긴 하겠지만 학교생활이 프로 활동에 크게 지장을 주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ATP대회에 참가한다고 해도 출석이 인정되는 만큼 학교에 머무르는 시간도 상당히 적을 것이다.
“이지혁 선수, 도착했어요.”
“아, 벌써요?”
지혁은 매니저의 말에 창밖을 확인했다.
그러자 익숙한 풍경이 보인다. 금화고등학교의 교문 앞이다.
“후······. 그럼 가볼게요.”
“네. 하교 시간에도 이 자리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달칵.
차 문이 열리자 지혁은 밖으로 나갔다.
“사람들이 엄청 많네······.”
등교 시간이라 그런지 눈에 보이는 학생들의 숫자만 해도 수십 명은 가볍게 넘어 보인다.
부디 아무 일도 없어야 할 텐데.
“야, 저 사람 이지혁 아니야?”
“응? 걔 학교 자주 안 나오던데? 잘못 본 거 아니야?”
“아니 저기 봐봐. 저 얼굴을 내가 착각하겠냐?”
“어디? ······헉! 진짜 이지혁이다!”
“이지혁이 왔다고?”
“아직도 우리 학교에 다니고 있었어?”
지혁의 바람과는 다르게 교문 앞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호주 오픈이 끝나고 한 달이 넘게 지났지만, 아직도 그의 인기가 사그라들지 않았던 것이다.
하긴 한동안 미디어를 점령하다 시피 했으니 이런 일은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빨리 들어가야겠네.’
지혁은 점점 인파가 몰려들자 교실로 빠르게 이동했다.
“지혁아, 잠깐만!”
“우리 사인 좀 해줘!”
“나는 사진!”
뒤에서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괜히 입구에서 붙잡힌다면 어떤 상황이 만들어질지 뻔했기 때문이다.
이미 작년에 있던 주니어 그랜드슬램으로 비슷한 경험을 해봤기에 이런 상황은 익숙하다.
일주일 정도만 버티면 지금의 열기도 가라앉을 것이다.
드르륵.
지혁은 복도를 지나쳐 새로 배정 받은 교실로 들어갔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학생들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
순식간에 소리가 사라진 교실.
지혁은 부담스러운 시선을 견디며 비어있는 의자에 앉았다.
사람들 눈에 뛰지 않는 가장 구석 자리였다.
그렇게 몇 십초 쯤 지났을까.
웅성웅성.
“···이지혁이잖아?”
“우리랑 같은 반인가 봐. 미쳤어.”
“말 걸어 봐도 될까?”
“조금 무서워 보이는데···.”
“사인해달라고 해 봐.”
같은 반 학생들이 서로를 쳐다보며 망설이고 있을 때.
교실 밖에서 지혁을 따라온 학생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마 교문 앞에서부터 따라 온 모양이다.
“여기 있다!”
두두두두두.
복도를 울리는 거대한 발소리.
학생들이 얼마나 몰려든 것인지 교실 밖은 인파로 가득 채워지기 시작했다.
몰려드는 속도를 보니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복도가 꽉 차서 통행도 불가능해 질 것 같았다.
저래서는 도망갈 곳도 없다.
‘당분간 피곤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