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금화고등학교
금화고등학교 2학년 교실.
복도는 지혁을 구경하기 위해 몰려든 학생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
찰칵. 찰칵.
창문에 붙어서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는 학생들.
지혁은 사방에서 뚫릴 것 같은 시선이 쏟아지자 약간이지만 부담을 느꼈다.
작은 움직임조차 관찰당하는 게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학교 바깥이었다면 이런 느낌을 받지 않았을 거다.
지금보다 더 많은 인파에 둘러싸인 적도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밖에 있을 때는 항상 보디가드나 수행 인원들이 주변을 통제하고 있었다.
지금처럼 이 사람들을 혼자 감당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대체 얼마나 더 오는 거야?’
어느새 복도는 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빽빽해졌다.
그 와중에도 시끄러운 발소리가 들리는 걸 보면 아직도 다른 학생들이 오고 있는 것 같았다.
복도의 상황을 파악하려고 고개를 살짝 움직이는 지혁.
그러자 눈이 마주친 여학생들에게서 비명소리가 들린다.
‘······이해가 안 되네.’
작년 한 해 동안 질릴 정도로 얼굴을 봤을 텐데.
게다가 비시즌기인 12월에는 매일매일 등교를 했었다.
그때와 달라진 거라곤 유명세 단 하나 뿐이다.
그런데도 학생들은 과거에 있었던 일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지, 유명 연예인을 만난 것처럼 반응했다.
‘아는 얼굴도 있구나. 그런데 쟤는 무슨 일로 온 거지.’
지혁은 복도 쪽을 살펴보다가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소영을 발견했다.
절친 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름 괜찮은 관계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렇게 잠깐 동안 시선을 두고 있자 어떻게 알았는지 소영이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한다.
“지혁아, 나 기억하지? 우리 같은 반이었잖아. 개학한 김에 인사하러 왔어.”
소영은 조금 자신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혹시 자신을 기억하지 못할까봐 걱정한 것이다.
하지만 지혁이 바보가 아닌 이상 그녀를 까먹을 리 없었다.
학교에서 같이 보낸 시간이 얼마인데.
“이소영이잖아. 당연히 기억하고 있지.”
지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질문에 답했다.
그러자 소영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교실 안으로 들어왔다.
별거 아닌 말이었지만, 그 한 마디에 발을 묶고 있던 거리감이 모두 사라졌던 것이다.
“호주 오픈 축하해. 경기장에서 직접 응원하고 싶었는데 외국이라서 어쩔 수 없이 TV로 봤어.”
“고등학생 혼자 호주에 오기는 힘들지. 응원해준 것만으로도 고마워.”
“그런데 되게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겨울 방학 동안 만난 적이 없으니까 거의 3개월 만인가?”
“벌써 시간이 그렇게 지났구나. 이제 다른 반이네······.”
소영은 반이 다르다는 것에 아쉬운 표정을 했다.
이제 이전처럼 지혁과 친하게 지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전학가는 것도 아닌데 왜 그래? 몇 반인데?”
“5반···.”
“그럼 두 교실 거리네. 심심하면 쉬는 시간에 찾아와.”
“······그래도 돼?”
“어려운 일도 아닌 걸. 나도 학교에 아는 사람이 적어서 심심했어.”
“알았어! 그럼 시간 날 때마다 올게!”
‘너무 자주 올 필요는 없는데······.’
표정이 나빠 보여서 달래주려고 한 말인데,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아무래도 낚인 것 같았다.
그렇게 두 사람의 대화가 계속 이어지자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학생들이 한 명씩 슬금슬금 다가왔다.
지혁이 생각보다 소탈해 보이자 드디어 말을 걸 용기가 생겼나보다.
“저기······.”
가장 먼저 다가온 사람은 얼굴을 모르는 남학생이었다.
명찰을 보면 같은 학년이다.
“혹시 사인 좀 해줄 수 있어?”
“얼마든지. 여기 책상에 올려놔.”
조심스럽게 사인지를 내미는 모습에 지혁은 흔쾌히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 모습에 주변의 학생들은 부러운 표정을 지었다.
우르르르.
“나도 부탁할게!”
“지혁아, 진짜 팬이야!”“언니가 받아 오라고 해서···.”
첫 부탁을 들어주자 사인지들이 책상 위로 차곡차곡 쌓였다.
‘아직 해준다고 안 했는데.’
거절하지 않으려고 했으니 상관없나?
어차피 한 번은 거처가야 하는 일이다.
오늘 바짝 해두면 다음부터 사인을 요구하는 사람이 많이 줄어들겠지.
스윽스윽.
그렇게 지혁은 계획하지 않았던 사인회를 열게 되었다.
교실 안은 사인을 받으려는 학생들로 인해 긴 줄이 만들어졌다.
“고마워! 잘 간직할게.”
“언니가 정말 좋아할 거야.”
원하는 것을 얻게 되자 학생들은 미적거리지 않고 교실을 떠났다.
다음 차례를 배려한 행동이었다.
그렇게 마흔 명쯤 지났을 때. 복도에서 굵은 목소리가 들렸다.
“이 녀석들아. 여기 모여있지 말고 전부 교실로 돌아가. 지금이 몇 시인 줄 알아?”
“아~ 선생님 사인만 받고요.”
“제발요~”
“조금만 봐주세요.”
“어허, 혼나기 싫으면 빨리 들어가. 쉬는 시간에 받으면 되잖아.”
조례시간이 돼서 담임들이 각자 맡은 반으로 들어가고 있는 모양이다.
교실 밖에서는 한동안 애원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선생님의 성격도 보통이 아니었기에 결국 학생들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의기소침한 모습으로 우르르 사라지는 학생들.
인구 밀도가 줄어들자 교실은 순식간에 쾌적한 환경으로 변했다.
‘슬슬 손이 저려왔는데 다행이네.’
물론 쉬는 시간이 되면 방금 전과 똑같은 상황이 벌어지겠지만, 그래도 지금 당장 쉴 수 있는 게 만족스럽다.
나중일은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되겠지.
중요한 일도 아닌 만큼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사인을 받지 않아도 학생들에게 큰 문제가 생기진 않을 테니 말이다.
드르륵.
그때 앞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교실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니 저 남자가 2학년 담임인 것 같았다.
그는 교탁에 선 채로 학생들을 한 번 훑어봤다.
그러다 지혁을 발견하고 아주 잠깐 멈칫했다.
TV에서나 보던 스포츠 스타를 직접 마주하게 되니 신기한 모양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담임은 정신을 차리고 자기소개를 했다.
지혁이 아무리 유명하다고 해도 학교에서는 그저 학생이었기 때문이다.
“올해 너희들의 담임을 맡게 된 김진우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 오늘 시간표는······.”
그렇게 지루한 아침 조례가 시작되었다.
***
지혁은 수업을 모두 마치자 테니스부가 있는 야외 코트로 이동했다.
이곳도 대회 출전과 훈련으로 인해 찾아가는 게 상당히 오랜만이다.
끼이익-
그렇게 펜스를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익숙한 얼굴들이 보인다.
테니스부의 박철웅 감독과 최기석 코치, 그리고 테니스부 학생들이다.
“늦었네?”
“죄송합니다. 교실에서 붙잡혀서요.”
“붙잡혀? 아, 뭔 말인지 알겠다.”
박 감독은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혁을 구경하기 위해 학생들이 엄청나게 몰려들었다는 소식을 이미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현재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스포츠 스타가 학교에 나타났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다섯, 여섯, 일곱. 이제 전부 도착했네. 그럼 서로 인사해라. 너희들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이 녀석이 그 유명한 이지혁이다.”
야외 코트에 테니스부 사람들이 전부 도착하자 박감독은 새로운 부원들에게 지혁을 소개했다.
그러자 세 명의 남학생들이 존경스러운 눈빛을 보내며 허리를 숙였다.
아무래도 이번에 입학한 신입생들인 모양이다.
“이번에 금화고에 입학한 박찬민입니다! 뵙게 돼서 정말 영광입니다! 이지혁 선배님은 제 우상이에요!”
“제 이름은 류영호라고 합니다! 반드시 선배님 같은 선수가 되고 싶습니다!”
“저는 주성태입니다! 앞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한 명씩 자기소개를 하는 신입생들.
지혁은 인사를 받으며 그들의 얼굴을 확인했다.
‘······두 명이 바뀌었어.”
원래 류영호, 주성태는 다른 고등학교로 갔어야 했는데.
아무래도 자신으로 인해 미래가 꼬인 것 같았다.
‘이런 일이 생길 수도 있구나.’
퓨처스 최연소 우승, 챌린저 최연소 우승, 주니어 그랜드슬램 2회 우승 등.
지혁은 불과 1년 만에 기존에 있던 수많은 기록들을 전부 갈아치웠다.
그리고 그 영향으로 금화고에 지원하는 유망주들의 숫자가 전년보다 월등히 늘었다고 들었다.
그를 롤 모델로 삼은 중학생 선수들이 금화고를 0순위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고작 고등학교를 잘 간다고 그랜드슬램 4강에 진출할 수는 없다.
그런 업적은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나지 않으면 절대 불가능했으니 말이다.
그래도 탑랭커와 같이 훈련하면 배울 점이 상당히 많은 만큼, 확실히 다른 곳 보다는 더 나을 것이다.
‘그런데 중등부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녀석들만 데려왔네.’
비록 3명 중 2명이 기존의 금화고 멤버가 아니었지만 수많은 유망주들 중 선별된 선수들이라 그런지 알짜배기만 골라왔다.
‘역시 박 감독님이 선수 보는 눈이 좋아.’
지혁이 기억하기로 이 세 명의 신입생들은 모두 프로 데뷔에 성공한다.
프로에서 먹힐 정도로 재능과 포텐셜이 모두 검증된 선수라는 뜻이다.
“인사는 그만하면 됐고. 이제 테스트를 해야겠지? 이번에는 지혁이가 상대해 줘라.”
“네? 제가요? 원래 테스트는 신입생들끼리 했잖아요?”
“법도 아닌데 좀 바꾸면 어때. 그래도 너를 보고 금화고에 입학한 얘들인데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 간단하게 한 세트씩만 해줘.”
“음······.”
박 감독을 지원하려는 듯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신입생들.
누가 보면 엄청난 부탁이라도 하는 줄 알겠다.
지혁은 그런 시선이 재밌는지 웃으면서 테스트를 수락했다.
“하하하. 알겠어요.”
새로 입학한 꼬맹이들의 실력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실력 차이가 너무 나서 테스트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도 경기라고 생각하면 괜찮을 거다.
“아자!”
박 감독의 요청이 수락되자 신입생들은 크게 환호성을 질렀다.
자신들의 우상과 경기를 할 수 있다는 것에 크게 흥분한 것이다.
그들은 따로 시키지 않았는데도 코트 주변을 정리하며 바로 경기를 할 수 있게 세팅했다.
“그럼 몸부터 풀게요. 시간이 좀 걸리는데 괜찮죠?”
“네가 편한 대로 해.”
지혁은 감독의 허락이 떨어지자 꼼꼼하게 전신을 스트레칭했다.
상대가 아마추어인 걸 고려하면 이런 준비 운동은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주 뒤에 열리는 인디언 웰스 오픈을 생각하면 경미한 부상이라도 조심해야 한다.
만약 발목이라도 삐끗한다면 엄청난 참사가 일어날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휴······. 이제 됐다. 너희들은 준비됐어?”
“네!”
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신입생들.
지혁이 생각하기에 조금 부족한 것 같았지만, 저 정도만 해도 큰 문제는 없을 거다.
“누가 먼저 할 거야?”
“처음은 저에요.”
가장 먼저 테스트를 하는 건 주성태였다.
그는 경기를 시작하기 전부터 흥분이 되는지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그럼 시작하자. 서브는 네가 먼저 해.”
코트 위로 올라가는 두 사람.
경기가 시작하려는 기미가 보이자 주변에 있던 부원들은 훈련을 하나 둘씩 멈췄다.
겨울 방학 사이에 지혁의 실력이 얼마나 상승했는지 구경하려고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