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인디언 웰스 오픈
돌발 상황이 있고 난 후, 지혁은 경기에서 기대 이상의 활약을 했다.
덕분에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던 스코어도 조금이나마 회복됐다.
하지만 그걸로 전체적인 판도를 뒤집을 수는 없었다.
아직 지혁에게 나달이라는 거대한 벽은 넘을 수 없을 정도로 높았던 것이다.
[인! 세트 나달.]
7-5의 스코어로 마무리된 1세트.
체어에서 공이 라인 안으로 들어갔다는 판정이 내려지자 두 선수는 라켓을 늘어트리며 벤치로 걸어갔다.
1시간이 넘는 격렬한 경기의 여파인지 지혁의 상의는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아마 틈틈이 물을 마시지 않았다면 탈수로 쓰러졌을 것이다.
[포핸드 위너로 세트 포인트를 얻어내는 나달. 골든 보이가 마지막 서비스게임을 브레이크 당합니다.]
[음······. 세미파이널의 진출자가 결정된 것 같네요. 이번 패배는 너무 치명적입니다]
[리가 공격 옵션을 대부분 소모하긴 했죠.]
[무엇보다 경기를 반전시킬만한 변수가 없습니다. 이제 순수한 기량 싸움이 될 겁니다.]
[그런데 나달이 무릎 부상을 완전히 회복한 것 같습니다. 1시간 동안 경기를 했는데 움직임이 느려지는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아요.]
[하긴 2개월 전만해도 호주 오픈에서 기권을 할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죠. 골든 보이에게 나쁜 소식이 또 하나 추가 된 것 같습니다.]
담담한 표정으로 부정적인 평을 쏟아내는 두 해설.
아무래도 그들은 지혁의 패배를 기정사실로 여기고 있는 듯 했다.
실제로 막막한 상황을 홀로 견디고 있던 지혁은 눈앞에 닥친 이 난관을 어떻게 돌파해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포인트라도 남아있었으면······.’
그러면 어플이라도 쓸 수 있을 텐데.
하지만 매번 불리할 때마다 상황을 반전 시켜주던 그 만능의 도구도 지금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전날, 16강 경기가 끝나고 시간이 남을 때 쌓아둔 포인트를 전부 사용했기 때문이다.
모두 나달을 상대하기 위한 사전 준비였다.
[플레이어 레디.]
지혁은 90초의 휴식 시간이 끝나자 손바닥으로 뺨을 두드리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러자 몸을 짓누르는 복잡한 생각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자.’
이길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해도 경기를 포기하기에는 너무 이르다.
아직도 1세트가 더 남았으니 말이다.
모든 실력을 바닥까지 끌어내서 부딪치면 비록 경기는 패배하더라도 얻는 게 있을 것이다.
벤치에서 일어나 코트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지혁.
욱신거리는 통증으로 인해 다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발을 몇 번 구르니 그런 고통도 사라진다.
***
쿵!
사이드라인을 때리고 빠져나가는 나달의 포핸드.
마지막을 장식하는 그 아름다운 스트로크에 체어 엠파이어는 마침내 경기를 종료할 수 있었다.
[게임 세트 매치 나달. 7-5, 6-3.]
2-0으로 끝난 경기.
결국 지혁과 관중들이 바라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ESPN 해설자들의 예상처럼 나달의 압도적인 승리로 쿼터 파이널이 종료된 것이다.
와아아아아!
짝짝짝짝짝짝
비록 극적인 반전은 없었지만 경기장은 커다란 박수와 환호 소리로 가득 찼다.
두 선수의 대결이 관중들의 눈을 충분히 만족시켰기 때문이다.
웬만해서 보기 힘든 스트로크 대결을 질릴 정도로 구경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렇게 한동안 환호가 이어지고 있을 때.
지혁과 나달은 네트 앞으로 걸어가 서로를 가볍게 포옹했다.
“역시 당신한테는 아직 안 되네요.”
“골든 보이 너도 대단했어. 지금 실력을 조금만 더 가다듬으면 마스터즈 우승도 가능할 거야.”
“마이애미 오픈은 참가할 건가요?”
“이제 부상도 회복됐으니 그래야지.”
“다음 경기는 준결승전 이상에서 만났으면 좋겠네요. 저는 하위 라운드에서 탈락하기 싫거든요.”
“하하하하. 엄살은.”
나달은 재밌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이 웃었다.
지금 지혁이 약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지만 속마음은 다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웃고 있는 얼굴과 다르게 눈이 투쟁심으로 불타고 있는 걸 보면 바보가 아닌 이상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저를 탈락시켰으니 준결승전도 반드시 이겨주세요.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도 있는데 제가 시간을 너무 많이 뺐었네요.”
코트 한쪽을 눈짓하며 말하는 지혁.
그곳에는 인터뷰를 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리포터가 보였다.
아무래도 두 선수의 대화가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다.
“그래. 다음 대회에서 보자.”
나달은 지혁이 경기장을 벗어나려는 모습을 보이자 어깨를 몇 번 두들기며 격려해줬다.
앞으로 이 어린 선수를 메이저 대회에서 자주 볼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벤치 옆에 놓여진 가방을 들고 출구로 빠져나가는 지혁.
그 모습에 관중들은 박수를 치며 위로해줬다.
***
8강 경기가 끝나고 얼마 후.
[인디언 웰스 오픈 8강에서 탈락한 골든 보이, 그의 패배 요인은 무엇인가?]
[16,000명의 관중들이 테니스 가든에서 기립 박수를 친 이유.]
[골든 보이, “나달과 경기를 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다. 이번 패배는 실력 부족으로 일어난 일. 그랜드슬램에서는 다를 것이다.]
[라파엘 나달, “골든 보이는 다음 세대를 이끌어갈 선수. 롤랑에서 다시 경기 하고 싶다.”]
[짐 쿠리어, “실제로 보니 더 놀라운 재능이다. 16살의 나이가 믿기지 않는다.”]
[앤드리 에거시, “아직 미숙한 부분이 많지만 센스와 창의적인 플레이가 비교할 상대가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 이대로 성장하면 우리는 아시아 출신의 그랜드슬램 우승자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경기 중 골든 보이 공에 얼굴을 맞은 볼 걸, 다행히 큰 부상은 없어.]
[이지혁, 자신의 공에 맞은 볼 걸에게 모자를 씌어주며 위로.]
[골든 보이의 다음 행보는 3월 24일에 열리는 마이애미 오픈.]
지혁이 인디언 웰스 오픈에서 탈락하자 수많은 기사들이 실시간으로 올라왔다.
경기의 내용은 유럽. 미국, 아시아 등, 세계 각국에서 관심을 받고 있었지만 역시 가장 반응이 뜨거운 건 한국의 팬들이었다.
20%가 넘는 중계 시청률도 그렇고 아무래도 자국 선수의 프리미엄이 붙었기 때문이다.
ㅡ 역시 빅3는 차원이 다르네. ㅠㅠㅠ 2-0이라니 참패다.
ㅡ 그랜드슬램이었으면 더 처참했을 걸···. 경기 후반으로 넘어갈수록 실력 차이 점점 심해지더라.
ㅡ 1세트 날린 게 너무 컸음. 그거 이겼으면 어떻게 될지 몰랐는데.
ㅡ 애초에 나달 부상 전부 회복 되서 가망 없었음.
ㅡ 그런데 짐 쿠리어, 앤드리 에거시 발언 보면 지혁좌 외국에서도 인정받는 거 같은데??
ㅡ 당연하지 ㅋㅋㅋ 국뽕이 아니라 이지혁 90년대생 선수들 중에서 언터쳐블임.
ㅡ 빨리 다음 경기 보고 싶다. 개털려도 성장하고 있으니까 가망성이 보임 ㅋㅋㅋ
ㅡ 이대로 1년만 지나면 탑10안에 들겠다. 그럼 어떻게 될지 모름 ㅋ
ㅡ 어제 볼 키즈 공에 맞는 거 봤어? 모자 씌어주는데 너무 스윗 하더라.
ㅡ 그거 보고 나도 테니스공에 맞고 싶어짐···.
ㅡ 돌아이들 인가?? 170km 넘는 스트로크에 제대로 맞으면 코뼈 부러진다 ;;; 빗맞아서 크게 안 다친 거임.
ㅡ 이지혁 모자 받을 수 있으면 맞을만 한데?? 기사 보니까 경기 끝나고 사인까지 해줬다더라.
“생각보다 이슈가 많이 됐구나······.”
볼 걸에 대한 기사와 댓글들을 보며 쓴 웃음을 짓는 지혁.
다행히 욕을 하는 내용은 없었지만 원치 않는 주목을 받게 되니 미안한 마음이 든다.
만약 프로 선수나 연예인이 목표라면 이런 관심이 반가울 것이다.
얼굴이 알려 질수록 후원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나니 말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런 경우가 아니다.
“내일 만나서 괜찮은지 확인해봐야겠네.”
마침 건강검진을 목적으로 병원에 같이 가기로 했다.
미처 발견하지 못한 후유증이 있는지 검사를 해보기 위해서였다.
고작 타박상에 오버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는 게 좋다.
괜히 나중에 미루었던 이자까지 치르기 싫으면 말이다.
어차피 매니지먼트가 일정을 모두 처리해서 자신은 몸만 이동하면 된다.
“이 문제는 이쯤하면 됐고······.”
지혁은 고민이 어느 정도 해결되자 자연스럽게 나달과 했던 경기를 떠올렸다.
비록 일방적으로 패배했지만 2시간의 경기 동안 얻은 교훈이 꽤 많았기 때문이다.
“당장 보안할 부분은 역시 스트로크인가.”
어플을 통해 백핸드를 무려 A등급을 달성했지만 현시대 정점인 빅3를 직접 상대해보니 부족한 점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명백히 상위 호환인 선수가 반대편 코트에서 적으로 있으니 비교가 뚜렷하게 된 것이다.
원래 서브의 등급을 가장 먼저 올리려고 했지만 아무래도 계획을 변경해야할 것 같았다.
[이지혁]
근력: 75▲ 민첩: 75▲ 체력: 75▲ 신장: 187cm▲
서브(A), 포핸드(A+), 백핸드(A), 풋워크(A), 외모(A-), 트릭샷(A-)
[110,537포인트]
[백핸드(A): 9%]
“필요한 포인트는 182만······.”
이때까지 모아둔 포인트를 서브에 투자해서 그런지 백핸드를 A+등급으로 만들려면 어마어마한 포인트가 필요했다.
이건 절대 단기간에 모을 수 있는 양이 아니다.
“롤랑 가로스까지 시간이 되려나.”
2010년의 프랑스 오픈은 5월 23일에 열린다.
그때까지 참가할 수 있는 마스터즈 대회는 총 4개다.
하지만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해봐도 이 기간 안에 180만이 넘는 포인트를 얻는 건 무리였다.
“마스터즈 대회에서 4번 연속으로 준결승에 진출하면 가능할 것도 같은데.”
분명 이론상으로 가능한 일이지만 냉정하게 현실을 따져보면 4연속 준결승 진출은 힘들다.
대진이 아무리 좋게 나와도 8강쯤이면 페더러, 나달, 조코비치, 머레이 중 한 선수를 만나게 되니 말이다.
게다가 빅4가 아니더라도 탑10에는 델 포트로, 페러, 페레르, 쏭가, 베르디흐가 버티고 있다.
비록 이들은 신계가 아닌 인간계 최강으로 분류되지만 지금 지혁의 실력으로는 너무 벅찬 상대들이다.
“······제대로 효과를 보는 건 윔블던이겠구나.”
아마 무난한 성적을 유지하면 롤랑 가로스 도중에 180만 포인트를 모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은 최대한 보수적으로 생각하는 게 낫다.
“백핸드가 보완되면 나달을 얼마나 상대할 수 있을까.”
윔블던이 오픈하려면 아직 3개월이나 남았지만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뚜렷한 실력 상승이 이루어지는 게 상당히 오랜만이었기 때문이다.
몇 개월 전만해도 하루만 지나면 엄청난 변화가 있었는데.
테니스 기술의 전반적인 등급이 올라가면서 예전에 비해 성장이 너무 둔화됐다.
아마 앞으로 이런 상황은 더 심화될 확률이 높다.
등급이 높아질수록 필요한 포인트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으니 말이다.
그래도 그랜드슬램 상위 라운드에 확정적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기량에 도달하면 앞으로 프로 활동을 하면서 완전히 정체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