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닉 볼리티에리 아카데미
코트를 체인지하고 얼마 후.
데이비드는 드디어 준비가 끝났는지 서브 자세를 취했다.
첫 게임을 허무하게 패배하고도 멘탈이 멀쩡한 모습에 학생들은 대단하다는 듯이 그를 쳐다봤다.
만약 지혁을 상대하는 게 자신들이었다면 큰 실력 차이에 압도되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흐읍!”
쾅!!
서비스 코트 구석을 공략하는 데이비드의 서브.
지혁은 까다로운 코스로 떨어진 공을 아슬아슬하게 걷어냈다.
‘속도가 대단한데?’
500명이 넘는 아카데미 재학생 중에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게 납득이 간다.
비록 전성기 시절과 비교하면 부족하지만 이 정도 실력이면 주니어 선수들 중에서 적수를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데이비드의 주특기가 서브와 카운터였지?’
대회에서 몇 번 상대해본 경험이 있어서 기억이 뚜렷하게 난다.
ATP랭킹이 20위 안에 들 때 데이비드는 고속 서브와 빠른 포핸드, 패싱샷, 탑스핀 로브를 주력 무기로 하는 수비형 베이스라이너였다.
통산 승률은 대략 30%로 지혁의 열세.
‘플레이 스타일은 비슷한데 피지컬이 딸려서 패배하는 경우가 많았지.’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진데다 그를 어떤 방법으로 공략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쿵!
코트 대각선을 가로지르는 지혁의 백핸드.
날카로운 각도에 실점을 해도 이상한 상황이 아니었지만 데이비드는 가까스로 라켓에 공을 맞출 수 있었다.
‘지금!’
네트 앞으로 달려가서 공을 깎아내듯이 라켓을 휘두르자 백스핀이 걸린 공이 아슬아슬하게 네트를 넘어갔다.
통. 통. 통.
낮은 높이로 여러 번 바운드되는 공.
“러브 서티. 이번 공격은 어쩔 수 없었다. 리의 플랜이 완벽했어.”
닉의 평가에 고개를 끄덕이는 학생들.
그들도 눈이 있는 만큼 방금 전 상황이 정교한 빌드 업으로 만들어졌다는 걸 알고 있었다.
“데이브의 플레이 스타일이 벌써 분석당한 것 같아. 약점을 정확하게 노렸어.”
“고작 몇 분 만에? 그것보다 호주 오픈에서 경기를 봤다는 게 더 설득력 있지 않을까?”
“아, 그럴 수도 있겠네.”
쿵! 다시 한 번 코트에서 들리는 묵직한 바운드 소리.
지혁이 전력을 다하고 있어서인지 스트로크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두 선수의 기량 차이가 상당했기 때문이다.
“러브 포티. 포인트를 신경 쓰지 말고 우선 버티는 것에 집중해.”
데이브는 닉의 지시에 당분간 위닝샷을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이대로 경기가 진행되면 1게임도 따내지 못한다.
탕!!
열세를 인정하고 수비적인 자세를 취하자 금방 그 효과가 나타났다.
이전보다 랠리 시간이 더 늘어난 것이다.
그렇게 1세트 4게임에 들어갔을 때.
지혁은 마침내 첫 포인트를 허용했다.
네트 앞으로 달려가고 있을 때 패싱샷을 당한 것이다.
짝짝짝짝짝.
데이브가 고생 끝에 포인트를 얻게 되자 박수를 치는 학생들.
“탑랭커의 벽은 엄청나게 높구나. 상대가 안 돼.”
“설마 이렇게 차이가 날 줄이야······.”
“아카데미에서 실력이 가장 뛰어난 데이브도 이런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학생들은 지혁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있는지 표정이 그리 좋지 않았다.
아카데미의 재학생들 중에서 꼭대기를 차지하고 있었던 만큼 이런 감정이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때까지 타고난 재능으로 또래 선수들을 짓밟기만 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여기서 패싱샷이 들어올 줄이야. 너무 방심했어.’
경기가 너무 쉽게 흘러가서 긴장이 풀렸나 보다.
데이비드는 절대 무시할 만한 선수가 아닌데 말이다.
만약 과거에 지금처럼 행동했다면 뼈저린 대가를 지불했을 것이다.
‘좀 더 집중해야겠네.’
물론 대충 플레이한다고 해도 경기는 이미 뒤집을 수 없을 정도로 승부의 추가 기울었다.
아마 지금 추세라면 6-1이나 6-0으로 마무리될 확률이 높다.
하지만 닉에게 전력을 다하라는 말을 들은 이상 불완전한 승리는 용납할 수 없다.
***
“아웃! 러브 포티. 세트 포인트 리.”
백핸드 위치로 떨어지는 탑스핀 스트로크에 실책을 저지르는 데이비드.
이미 몇 번이나 당한 수법이지만 높이 튀어 오르는 공은 아직도 받아내기 힘들다.
‘이길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건 말도 안 되는 괴물이잖아.’
데이비드는 하이스쿨 1학년부터 프로에 데뷔해서 공식 대회 경험이 무려 2년이 넘었다.
하지만 이만한 실력자를 상대하는 건 처음이었다.
항상 퓨처스와 챌린저 대회에만 참가했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참가했던 호주 오픈도 본선 1라운드에서 탈락했으니 랭킹 50위 안에 들어가는 제대로 된 탑랭커와 경기하는 건 이번이 고작 두 번째다.
‘서브도 통하지 않고. 대체 어디가 약점인 거야?’
닉의 지시대로 최대한 경기를 길게 끌고 가면서 상대를 파악했다.
보통 이쯤 되면 빈틈이 몇 개는 발견되기 마련인데······.
골든 보이는 마치 무결점의 조코비치를 보는 것처럼 모든 부분이 완벽했다.
뚜렷한 약점이 단 하나도 없는 것이다.
‘역시 머레이와 나달을 제외하고 모든 선수들에게 전승을 한 이유가 있구나. 압도적인 실력으로 찍어 누르지 않는 이상 이 녀석을 이길 방법이 없어.’
데이비드가 서브를 하지 않고 한동안 멈춰 서있자 그 복잡한 마음을 눈치 챈 것인지 닉이 말을 걸어왔다.
“데이브, 1세트가 끝나면 도와줄 테니까 일단 게임을 시작해.”
‘닉은 골든 보이를 공략할 방법을 알고 있을까?’
아무리 그가 전설적인 코치지만 믿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딱히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어차피 지금 상황이 지속되면 두 번의 베이글 세트로 경기가 끝날 것이다.
쿵!
사이드라인을 가격하는 지혁의 백핸드 크로스 샷.
“세트 리. 데이브, 이쪽으로 와서 앉아라.”
지혁의 백핸드 위너로 1세트가 종료되자 닉은 곧바로 데이비드를 호출했다.
그러자 학생들은 벤치 근처로 약간 다가와서 닉이 무슨 말을 하는지 훔쳐 들었다.
골든 보이를 어떻게 공략해야 할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 게 있나? 골든 보이는 약점이 전혀 없는 거 같은데.”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게 서비스게임이니까 서브 코스를 충고해주는 게 아닐까?”
“리의 리턴 성공률을 생각하면 좋은 방법은 아닌 것 같아. 데이브는 가장 중요한 스트로크부터 해결해야 해.”
“몇 분 만에 실력이 늘어날 리는 없잖아. 분명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기발한 방법이 있을 거야.”
주변 사람들의 관심이 모두 한 곳으로 몰렸지만 지혁은 담담하게 자신의 상태에 집중했다.
어차피 전략도 실력이 받쳐주어야 먹히지 지금처럼 기량이 압도적으로 차이나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났을 때.
드디어 코칭이 끝난 건지 데이비드는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코트 위로 올라갔다.
아무래도 닉의 방법이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다.
“플레이어 레디, 서브 리.”
쾅!!
지혁의 서브로 시작한 2세트.
데이비드는 이제 강서브에 어느 정도 적응한 건지 리턴을 성공해냈다.
비록 안정적인 자세가 아니었지만 1세트 초반과 비교하면 훨씬 좋아진 모습이다.
탕!! 탕!! 탕!!
코트 위에서는 시끄러운 임팩트 소리가 한동안 이어졌다.
두 선수 모두 첫 포인트를 내줄 생각이 없는지 진지한 얼굴로 경기에 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례적으로 스트로크의 숫자가 10구를 넘어가자 갑자기 백핸드 슬라이스를 사용하는 데이비드.
그다지 위력적이지 않은 샷에 지혁은 이상하다는 듯이 공을 받아쳤다.
퉁!
그렇게 슬라이스를 걷어내자 이번에는 발리 드롭샷이 날아온다.
네트를 아슬아슬하게 넘어서 떨어지는 공.
백스핀이 많이 걸려서 바운드 높이가 상당히 낮았지만 지혁은 라켓을 섬세하게 조절해 다시 공을 네트 너머로 넘겼다.
‘걸렸어!’
탕!!
옆구리를 빠른 속도로 지나치는 데이비스의 스트로크.
그 의외의 결과에 학생들은 격렬하게 반응했다.
경기가 닉이 말한 대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와! 데이브의 작전이 성공했어. 이게 몇 번째 포인트지?”
“네 번째. 이러면 2세트는 우세를 점할 수 있으려나.”
“아니. 이건 길게 쓸 수 있는 방법이 아니야. 그래도 1, 2게임 정도 따내는 건 가능할지도 모르겠네.”
“골든 보이는 완벽한 선수인 줄 알았는데 이런 구멍이 있을 줄이야······. 그런데 닉은 이걸 어떻게 알아낸 거야? 이때까지 전혀 티가 나지 않았잖아?”
“수십 년 동안 랭킹 1위를 수도 없이 키워내면서 자연스럽게 선수를 보는 안목이 늘어났겠지. 닉의 별명이 코치들의 코치잖아.”
전략이 완벽하게 통했다고 생각하는 학생들과 다르게 데이비드는 아직도 확신이 가지 않았다
고작 한 번의 득점으로 낙관적으로 생각하기에 지혁에게 당한 게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진짜 통하는지 확인하려면 최소한 세, 네 번은 검증해봐야 해.’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리턴을 성공해내야 한다.
에이스를 당하면 전략을 애초에 시도조차 하지 못하니 말이다.
자세를 낮추고 서브를 기다리는 데이비드.
지혁은 그에 응답하듯 곧바로 라켓을 휘둘렀다.
타다다다! 끼이익-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들리는 슬라이딩 소리.
T존에 떨어진 서브는 라켓에 아슬아슬하게 걸쳤다.
공을 힐끗 보고 베이스라인에서 가만히 기다리는 지혁.
하늘하늘하게 날아오는 공은 발리를 치기 딱 좋은 속도였지만 높이가 너무 높아서 라켓이 닿지 않을 것 같았다.
꿀꺽.
베이스라인으로 공이 떨어지기까지 몇 초.
그 짧은 시간 동안 학생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조용하고 움직임이 없는 코트에서 알 수 없는 긴장감이 흘렀기 때문이다.
얼마 후, 통! 하고 들리는 바운드 소리와 함께 본격적인 스트로크 대결이 시작되었다.
3구, 5구, 8구.
데이비드는 적절한 타이밍이 오자 다시 한 번 드롭샷을 사용했다.
그러자 지혁은 공을 받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네트 앞으로 달려갔다.
퉁!
이번에는 패싱샷을 생각했는지 코트의 구석으로 날아가는 포핸드 발리.
하지만 그 공은 몸을 던진 데이비드의 라켓을 피할 수 없었다.
“데이브가 두 번 연속으로 득점했어! 그것도 골든 보이의 서비스게임에서!”
“이러다 진짜 브레이크를 성공하는 거 아니야? 이제 두 포인트만 따내면 돼.”
“그런데 너무 위험해 보여. 방금 전도 넘어질 뻔했잖아.”
“너무 심하다 싶으면 닉이 알아서 멈춰줄 거야. 부상은 그가 전문이잖아.”
“이래서 길게 쓸 전략이 아니라고 했구나······.”
연속으로 실점하는 상황에 고개를 끄덕이는 지혁.
오늘 경기에서 처음 겪는 위기에 그의 표정은 약간 상기되었다.
“이런 식으로 나왔다 이거지?”
꽈아악-
라켓 손잡이를 강하게 쥐며 입 꼬리를 살짝 올리자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학생들이 흠칫한다.
잔잔하던 지혁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전에도 봐주는 기색은 없었지만 어딘가 여유를 두고 있었다.
실제 경기처럼 어떻게든 점수를 내려는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았던 것이다.
변칙 플레이를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게 그 증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