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닉 볼리티에리 아카데미
세 사람의 경기는 여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워낙 실력 차이가 크게 나다 보니 승패에 크게 집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정민과 니시오카가 지혁에게 시간을 들여 부탁한 건 전부 이유가 있었다.
“정민아! 자세를 더 낮추고 공을 기다려!”
탕!
코트 중앙에 떨어지는 정민의 플랫성 스트로크.
속도가 장점인 샷이라 타구가 제법 빨랐지만 그 부작용으로 네트를 넘어오는 공의 높이와 바운드 위치가 약간 부정확하다.
하지만 이틀 전과 비교하면 확실히 개선된 점이 보인다.
그때는 아웃되는 비율이 지금보다 더 많았으니 말이다.
“상체만 회전하고 있잖아. 다리도 신경 써야지.”
지혁은 마치 이렇게 하면 된다는 듯이 완벽한 포핸드 보여줬다.
사이드라인을 절묘하게 때리는 크로스샷.
그 스트로크에 정민과 니시오카는 눈을 반짝이며 집중했다.
이번 경기를 통해 조금이라도 더 배움을 얻기 위해서였다.
“······며칠 사이에 꼬맹이들의 실력이 눈에 띄게 늘었네.”
“골든 보이에게 코칭을 받는 게 효과가 있는 모양이야.”
“저렇게 맞춤 훈련을 해주니까 당연하지. 쟤들한테 가장 어울리는 자세를 직접 때려 박고 있잖아.”
경기를 구경하고 있던 몇몇 학생들은 자신들 보다 그리 뛰어나지 않은 두 사람이 특별대우를 받는 게 못마땅한지 질투가 섞인 시선을 보냈다.
속이 좁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경쟁자들의 실력이 실시간으로 상승하는 걸 보게 되면 누구라도 이런 반응을 보일 것이다.
쿵! 센터 마크를 가격하고 코트를 빠져나가는 탑스핀 스트로크.
마침내 엔드 체인지 상황이 되자 지혁은 벤치 쪽으로 손짓을 하며 말했다.
“이제 휴식 시간이야. 벤치로 들어와.”
““···허억···허억, 네!””
숨을 몰아쉬며 힘차게 대답하는 정민과 니시오카.
두 사람은 경기를 시작한지 시간이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도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피지컬 차이가 확연하다 보니 체력 소모가 극심했기 때문이다.
160cm초중반의 중학생들이 188cm이 넘는 지혁을 상대하고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둘 다 스트로크가 괜찮아졌는걸?”
“리의 코칭 덕분이죠.”
“맞아요. 형한테 배운 이후로 코치님들도 칭찬을 많이 해주셨어요.”
지혁이 벤치에 앉자마자 칭찬을 했지만 두 사람은 자신들이 한 일이 없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어제도 말했지만 니시오카는 쓸데없이 서브에 집착하지 말고 빠른 풋워크와 백핸드의 장점을 살리는 게 좋을 것 같아. 아마 플레이 스타일을 바꾸게 되면 지금보다 실력이 더 좋아질 거야.”
“음······. 수비적으로 플레이 하면 될까요?”
“맞아. 데이비드가 카운터 펀쳐니까 그를 참고하면 돼. 그걸로 부족하면 내가 불러주는 탑랭커들의 경기를 봐도 괜찮고.”
지혁은 니시오카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참고할만한 프로 선수들을 주르륵 말해줬다.
모두 랭킹 100위 안에 들어가는 수준급의 베이스라이너들이었다.
“그리고 민이는 전반적으로 괜찮은데 백핸드가 많이 부족하더라. 너도 알고 있지?”
“네. 대회에 참가할 때마다 항상 백을 집중적으로 공격당해요.”
“임팩트 타이밍이랑 자세가 불안정해서 그래. 내가 보여줬던 백핸드를 생각하면서 따라해 봐. 그러면 컨트롤이 이전보다 나아질 거야.”
그렇게 한동안 두 사람에게 개선해야 되는 부분을 지도하고 있을 때.
훈련장 한편에서 학생들의 인사 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닉의 수업이 끝난 모양이다.
“벌써 30분이 지났구나.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지혁이 벤치에서 일어나며 말하자 정민과 니시오카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괜한 욕심으로 지혁을 붙잡을 수는 없었기에 두 사람은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지도해 주셔서 감사해요.”
“형, 훈련 열심히 하세요. 내일 이어서 부탁해도 될까요?”
“시간이 남으면 얼마든지 괜찮아. 만약 내가 한가해 보이면 아까처럼 말을 걸어. 바쁜 상황이 아니라면 해줄게.”
리! 거기서 뭐하나! 빨리 이쪽으로 오게!
“아, 닉이 부르네. 이제 진짜 가봐야겠다.”
지혁은 닉의 재촉에 몇 마디 인사를 건네고 달려갔다.
그에게 배울 수 있는 시간은 얼마 없어서 최대한 아껴야 했기 때문이다.
***
아카데미의 저녁 시간.
오후 7시가 넘어가면서 주변은 어둑어둑하게 변했다.
하지만 훈련장은 수많은 조명들로 인해 여전히 낮처럼 밝았다.
학생들이 기숙사로 돌아가지 않고 자율 훈련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혁은 10분 전에 닉이 퇴근을 해서 드디어 하루 일과가 끝났다.
털썩.
마무리 스트레칭을 하고 벤치에 주저앉는 지혁.
하루 종일 훈련을 하다 보니 전신에서 상당한 피로감이 느껴진다
체력을 생각해서 무리한 활동은 하지 않았지만 집중을 오래하다 보니 탈력감이 장난이 아니다.
“리, 오늘은 시간이 괜찮지? 마침 훈련도 끝났잖아?”
“우리 방으로 초대할게 분명히 재밌을 거야.”
혼자 앉아 있는 모습이 쓸쓸해 보였을까 백인 여학생들이 지혁의 근처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최근 몇 번이나 대시를 했던 녀석들이다.
“너를 보고 싶어 하는 얘들이 정말 많거든. 너도 걔들을 보면 좋아할 걸?”
은근슬쩍 몸을 터치하는 게 역시 운동선수라 적극적인 것 같았다.
‘아니 미국이라서 그런 건가?’
지혁은 아주 잠깐 망설이다가 좋은 말로 제안을 거절했다.
건강미가 넘치는 여학생들은 충분히 매력적이었지만 괜히 복잡한 일에 휘말리기 싫었기 때문이다.
아마 원한다면 잠자리를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노골적으로 섹스어필을 하는 얘들도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다음 날 500명이 넘는 학생들에게 소문이 나는 걸 생각하면 별로 내키지 않는다.
‘숙소로 돌아가자.’
계속 훈련장에 머무르다 보면 이런 일이 계속 생길 것이다.
내일도 빡센 하루를 보내려면 잠이나 푹 자는 게 낫다.
매니지먼트 직원에게 데리러 오라고 연락을 하자 곧바로 답장이 돌아온다.
그 이후로 경기 파트너를 부탁받거나 아까 전과 비슷한 일이 몇 번 더 있었지만 그것도 코치들과 IMG 직원이 도착하니 전부 떨어져 나갔다.
다섯 명이나 되는 인원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으니 처음부터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한 것이다.
***
마이애미 오픈 2라운드가 시작하기 3일 전.
드디어 아카데미를 떠나야 되는 날이 되었다.
이제 컨디션 조절을 위해 개최 장소 근처의 호텔로 이동해야한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지혁이 떠난다는 소식이 파다하게 퍼졌다.
가능하면 조용히 떠나고 싶었지만 닉을 처음 만나게 된 날 공개적으로 일정을 말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그 영향인지 오늘 훈련장은 유난히 인구 밀도가 높았다.
원래 자율 훈련 시간에는 전부 흩어져서 경기를 했는데 말이다.
“오늘이 마지막 훈련이구만.”
“네. 그동안 코칭을 맡아주셔서 감사합니다.”“그래. 소득은 좀 있었나?”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방향을 잡을 수 있었어요. 당장 전력에 변화는 없지만 비시즌기에 많은 변화가 있을 거예요.”
“자네는 정말 재능이 뛰어난 선수야. 정상에 도달할 때까지 지금처럼만 하게. 그러면 5년 안에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거야.”
“정상이라······. 꿈같은 말이네요. 다음에 도움이 필요하면 다시 방문해도 되나요?”
“나는 계속 아카데미에 있을 건데 그걸 왜 물어 보나? 막지 않을 테니까 마음대로 하게.”
“그럼 시간이 될 때 다시 들리겠습니다.”
지혁은 닉과 인사를 마치고 훈련장을 떠나려고 했다.
그러자 아카데미에서 얼굴을 익힌 학생들이 배웅을 해준다.
거기에는 당연히 니시오카와 정민도 포함되어 있었다.
“형, 중계 보면서 응원할게요. 이번 마이애미 오픈은 꼭 우승하세요.
“리의 실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거예요.”
“말이라도 고맙다. 빅3가 버티고 있어서 우승은 힘들 거야. 그래도 할 수 있는데 까지 해볼게.”
“저희는 진심으로 하는 말이에요. 결국 인디언 웰스 오픈도 이반 류비치치가 트로피를 차지했잖아요.”
7년 만에 일어난 기적을 비교해서 말하다니.
역시 프로 대회에 경험이 없는 꼬맹이들이라 현실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2004년부터 2017년까지 빅3가 아닌 선수가 인디언 웰스 오픈에서 우승하는 건 단 1번, 이반 류비치치밖에 없다.
이건 그랜드슬램보다 더 높은 난이도다.
지혁은 그런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정민의 응원을 미소로 받아들였다.
악의를 가지고 말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해리슨? 너도 나한테 할 말이 있어?”
데이비드 해리슨은 첫 경기 이후로 지혁을 철저하게 피해 다녔었다.
워낙 일방적인 패배를 당해서 한동안 충격에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 여기에 나타난 것을 보니 트라우마를 어느 정도 털어낸 모양이다.
“후······. 지난 번 경기는 내가 완벽하게 졌어. 다음에 기회가 되면 다시 붙어보자. 그때는 다른 모습을 보여줄게.”
“내년 그랜드슬램을 기대하고 있을게.”
“······그래.”
데이비드는 그랜드슬램이라는 말을 듣고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재능과 실력을 생각하면 내년부터 메이저 대회 본선에서 자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대진이 맞지 않을 확률이 매우 높지만 같은 대회에 참가한 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상위 라운드에 올라가면 결국에는 부딪치게 되니 말이다.
지혁은 그밖에도 마이크, 월리엄스 등의 인사를 받고 나서 아카데미를 떠났다.
***
[마이애미 오픈, 골든 보이 출전 확정! 과연 이번 성적은?]
[전문가들이 예측한 골든 보이의 최종 진출 라운드는 16강.]
[이번에는 나달에게 복수를 할 수 있을까?]
[17번 시드를 받은 이지혁, 2라운드 첫 번째 대전 상대는?]
[짐 쿠리어, “닉에게 전해들은 바로는 샘프라스가 겹쳐 보인다고 하더라. 우리는 조만간 새로운 황제를 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앤드리 에거시, “이번 마이애미 오픈에서 재밌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이클 창, “골든 보이가 아시아 선수로서 내가 새운 기록을 깨주면 좋겠다.”]
[닉 볼리티에리의 특훈을 받고 첫 출전을 나서는 골든 보이.]
“······닉이 샘프라스를 언급 했다고?”
지혁은 짐 쿠리어의 기사를 읽고 눈을 크게 떴다.
생각지도 못한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피트 샘프라스는 1990년대를 지배한 테니스의 초대 황제다.
통산 성적 그래드슬램 우승 14회, 준우승 4회.
기록을 보면 짐작하겠지만 그는 페더러가 등장하기 전까지 유래가 없었던 절대자였다.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없는데.”
아카데미를 떠날 때 재능에 대한 칭찬을 듣기는 했지만 닉이 자신을 한 시대를 지배할 선수라고 생각할 줄은 전혀 몰랐다.
랭킹 1위를 수도 없이 만들어낸 그의 안목은 이미 테니스 팬들에게 유명했다.
“······한동안 많은 주목을 받겠네.”
미국에서 이름만 대면 알만한 유명인 4명이 이렇게 극찬을 했으니 아마 이번 마이애미 오픈도 ESPN에서 거의 메인으로 중계될 것이다.
물론 형편없는 성적이 나오면 훨씬 큰 비판을 받게 되겠지만 지금 실력을 생각하면 그런 일이 일어날 확률은 매우 낮다.
“성적만 좋으면 포인트를 훨씬 많이 얻을 수 있겠어.”
원래 윔블던이 개최될 쯤에야 목표량을 달성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번 기회만 잘 살리면 롤랑이 열리기 전에 200만 포인트를 모으는 것도 가능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