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마이애미 오픈
마이애미 오픈이 시작한지 3일.
마침내 예선전과 1라운드가 끝나면서 지혁의 첫 번째 경기 상대가 정해졌다.
“마이클 러셀? 재밌는 선수랑 경기가 잡혔네.”
지혁은 코치들이 준비한 러셀의 분석 자료를 훑어보며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상대 선수의 프로필이 특이했기 때문이다.
“만 31살에 173cm라······.”
프로 테니스 선수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건들이다.
아마 러셀은 이번 마이애미 오픈 참가자들 중에서 최단신일 것이다.
최근 통계에 따르면 ATP랭킹 100위에 들어가는 탑랭커들의 평균 신장은 187~188cm였으니 말이다.
“그래도 랭킹이 68위니까 뭔가 장점이 있겠지.”
피지컬이 부족해도 러셀은 아직까지 탑랭커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최근 순위 변동을 보면 운으로 만든 랭킹도 아니다.
그런 만큼 분명히 다른 선수와 비교되는 특별한 비결을 가지고 있을 확률이 매우 높다.
사락사락.
분석 자료를 천천히 읽어나가는 지혁.
그리 많은 분량이 아니라서 15분 정도 시간이 흐르자 종이에 적혀있는 내용을 전부 확인할 수 있었다.
“음······.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역시 이런 스타일이었구나.”
장점이 정교한 포핸드, 빠른 풋워크, 강한 체력 그리고 카운터라니.
마치 전성기의 니시오카를 데칼코마니로 찍은 것 같은 선수였다.
“나한테는 잘 된 일이네.”
러셀은 분명 나쁘지 않은 선수이긴 했다.
아마 비슷한 랭킹의 선수와 붙는다면 승리를 장담하지 못하더라도 쉽게 경기를 내주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의 열악한 피지컬을 생각하면 이 정도만 해도 엄청난 거다.
하지만 러셀 같은 선수는 기량이 월등히 뛰어난 상대에게 맥을 못 추는 경향이 있었다.
카운터 펀쳐의 특성 상 득점을 하려면 랠리를 길게 이어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스타일은 공격 옵션이 다양하고 랭킹이 높은 지혁에게 맛 좋은 먹잇감에 불과하다.
“프로 경력과 랭킹에 비해 그랜드슬램 성적이 형편없는 걸 보면 그리 걱정할 필요 없겠네.”
지혁은 2라운드를 통과하는데 큰 문제가 없을 것 같다고 판단되자 러셀을 분석하는 일을 멈추고 같은 쿼터의 탑시드 선수들의 자료를 꺼냈다.
마이애미 오픈의 경기가 하루, 이틀 간격으로 연달아 진행되는 만큼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
하루 뒤, 마이애미 오픈 2라운드.
지혁은 경기가 시작하기 전 랠리를 하면서 러셀을 자세히 살펴봤다.
메이저 대회에서 보기 힘든 단신의 선수가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자료에 나와 있던 것처럼 포핸드가 상당히 괜찮네. 그나저나 정말 작구나······.”
프로필 덕분에 이미 알고 있었지만 실물을 보니 느낌이 확실히 다르다.
아마 최근 대회에서 190cm넘는 거인들을 상대해서 그럴 것이다.
탕! 탕! 탕!
그렇게 10분 정도 탐색을 하고 있을 때.
체어 엠파이어가 지혁을 네트 앞으로 불렀다.
드디어 서브의 순서를 정하려는 모양이다.
팅!
“첫 번째 서비스게임은 러셀입니다. 리는 코트를 선택해 주세요.”
“저는 원래 있던 자리에서 할게요.”
지혁은 동전 던지기에서 져서 서브를 뺏겼지만 그리 걱정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어차피 이번 경기가 그리 위험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코치들도 전략 회의 끝에 똑같은 결론을 내놓았으니 이 정도 여유는 부려도 괜찮을 것이다.
[플레이어 레디. 서브 러셀.]
루틴이 없는지 심판의 콜이 들리자마자 곧바로 공을 토스하는 러셀.
잠시 후, 플랫 서브가 빠르게 서비스 코트로 떨어졌다.
탕! 지혁은 갑작스럽게 서브를 받게 되었지만 뛰어난 반사 신경으로 백핸드를 강하게 쳤다.
패싱샷에 가까운 타구를 보면 아무래도 상대에게 전혀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러브 피프틴.]
사이드라인 깊숙한 곳에 떨어진 스트로크.
결국 첫 포인트는 지혁의 리턴 에이스로 끝났다.
[SERVE SPEED: 117MPH]
‘190km? 역시 평범하네. 이 정도면 서브를 걱정할 필요는 없겠어.’
등을 돌려 전광판에 찍힌 속도를 확인하자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벌써부터 승리가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느린 서브에 에이스를 당할 리가 없다.
같은 시각 ESPN.
[오! 골든 보이가 시작부터 훌륭한 리턴 에이스를 보여줬습니다.]
[나달과 했던 경기가 일주일 전이라 감각이 여전하네요. 움직임을 보면 컨디션도 괜찮아 보입니다.]
[크리스, 오늘 경기는 어떻게 진행될 거라 예상하십니까?]
[두 선수의 실력을 객관적으로 비교하면 골든 보이의 무난한 승리겠죠. 기적을 만들어내지 않는 이상 경기를 뒤집기는 어려울 겁니다.]
[그렇군요. 아, 러셀이 다시 서브를 시작합니다. 남은 게임을 보면서 예상 맞는지 확인해 보죠.]
탕!!
T존을 노리고 떨어진 러셀의 서브.
컨트롤에 신경을 많이 썼는지 코스가 이전보다 까다롭다.
하지만 서브에 특화된 탑랭커와 비교하면 그리 위력적인 것도 아니라서 공은 지혁의 라켓을 벗어나지 못했다.
탕!! 채찍처럼 뻗어나가는 포핸드 리턴.
빈 공간을 공략하는 샷에 러셀은 빠르게 다리를 움직여 스트로크를 받아냈다.
그렇게 초반을 넘기게 되니 경기는 자연스럽게 랠리가 시작되었다.
탕! 탕! 탕!
코트 좌우를 뛰어다니면서 스트로크를 주고받는 두 선수.
하지만 무슨 이유 때문인지 시간이 지날수록 러셀의 샷이 조금씩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10번째 스트로크가 되었을 때.
왼쪽 베이스라인 구석을 노린 포핸드 다운 더 라인이 떨어졌다.
러셀은 오른쪽 코트에서 뛰어가며 라켓을 휘둘렀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임팩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1cm 차이로 라켓이 허공을 갈랐기 때문이다.
[러브 서틴]
“후······.”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젓는 러셀.
해설들은 그 모습에 참고 있던 탄성을 내질렀다.
[아! 러셀이 간발의 차로 스트로크를 놓칩니다. 힘의 차이가 승부를 결정 지었습니다. 골든 보이가 러셀을 피지컬로 찍어 눌렀어요. 정말 엄청난 파워입니다.]
[16살의 루키가 31살의 베테랑을 힘으로 압도하다니······. 정말 기괴한 장면이네요.]
[골든 보이가 아시아 선수치고 체구가 엄청나게 큰 편이죠. 여기 공식 데이터에 의하면 6피트 2인치(188cm)가 넘는다고 합니다.]
[그렇게 크다 구요? 풋워크가 워낙 빨라서 6피트쯤이라 생각했는데 말이죠.]
[하하하하. 이런 실력을 가지고 있으니 리가 팬들에게 골든 보이라고 불리는 거겠죠.]
지혁은 두 번의 포인트를 얻고 나서 게임을 굳히기로 마음먹었는지 템포를 조금 더 올렸다.
코트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적극적으로 공격 옵션을 활용한 것이다.
모두 경기를 빨리 끝내기 위해서였다.
[게임 리 1-0. 엔드 체인지.]
마침내 브레이크로 끝난 첫 번째 게임.
두 선수는 코트를 바꾸기 위해 반대편 코트로 움직였다.
고작 5분밖에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사이 경기장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려져 있었다.
지혁이 기세등등한 느낌이라면 러셀은 보기만 해도 숨이 막힐 것 같은 침침한 기류가 흘렀으니 말이다.
[플레이어 레디. 서브 리.]
지혁은 체어에서 신호가 오자 고개를 끄덕이며 공을 토스했다.
왕관자세를 취하며 라켓을 들어 올리자 당장이라도 쏘아질 것처럼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진다.
그렇게 공이 적정 높이에 도달했을 때.
응축되어 있던 힘이 풀려나오면서 라켓이 엄청난 속도로 휘둘러졌다.
“하앗!”
쾅!!
[피프틴 러브.]
[SERVE SPEED: 138MPH]
“······.”
220km가 넘는 서브로 에이스를 얻은 지혁.
그 살벌한 위력에 관중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역동적인 동작과 폭발하는 듯한 굉음에 몸이 서늘하게 변했기 때문이다.
‘정신을 차리기 전에 에이스로 끝내 버리자.’
그 후로 지혁은 여세를 몰아 순식간에 게임을 얻어냈다.
[게임 리 2-0.]
[139마일의 서브가 골든 보이의 서비스게임을 마무리합니다. 마치 번개가 내려치는 것 같네요. 경기 시작부터 저런 서브가 떨어지면 아무도 못 받죠.]
[그나저나 러셀의 입장이 더 곤란해졌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길 방법이 전혀 없는데요.]
[돌파구가 생길 때까지 끈질기게 버티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을 보면 승산이 높을 것 같지는 않네요.]
러셀의 승리를 회의적으로 보기 시작한 해설들.
그들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1세트는 엄청난 속도로 진행되었다.
지혁이 마치 원수라도 만난 것처럼 약간의 자비를 보이지 않은 것이다.
***
[세트 리.]
6-0으로 끝난 1세트.
빅3와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 경기력에 관중들은 얼굴이 붉어진 채로 멍한 표정을 지었다.
TV와 기사를 통해 골든 보이의 실력이 대단하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경기를 실제로 보고나니 충격이 엄청났기 때문이다.
“언론에서 너무 띄워서 거품이라 생각했는데 이런 경기를 볼 수 있을 줄이야······. 쿠리어의 인터뷰가 사실이었나 봐.”
“닉이 샘프라스를 떠올렸다고 한 그 기사?”
“맞아. 16살에 저런 실력을 가지고 있다면 황제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겠어?”
“10년 전의 빅3를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겠지······.”
관중석은 지혁에 대한 얘기로 웅성거림이 멈추지 않았다.
분명 경기 초반 만해도 미국 선수인 러셀의 이름이 적잖게 들렸는데 지금은 그런 소리가 들리지도 않는다.
아무래도 1세트가 관중들에게 큰 영향을 준 모양이다.
‘생각보다 일이 잘 풀렸어.’
설마 세트 스코어가 6-0이 될 줄은 몰랐다.
어지간한 실력 차이가 아니면 이런 스코어가 절대 나오지 않으니 말이다.
이런 결과가 나온 건 전부 이길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한 러셀이 컨디션 조절을 위해 몸을 사린 덕분이다.
‘기분이 오묘한 걸.’
지혁은 그랜드슬램에도 출전할 수 있는 탑랭커의 행동에 감회가 남달랐다.
규모가 작은 퓨처스와 챌린저도 아닌데 마스터즈 대회에서 1세트 전에 항복을 받다니.
이건 정말 정상급 선수만 받을 수 있는 대접이다.
[레디.]
그렇게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휴식 시간이 끝났는지 옆에서 체어 엠파이어의 목소리가 들렸다.
벤치에서 일어나 코트 위로 이동하자 반대편에서 러셀이 보였다.
초반의 긴장은 전부 해소된 건지 경기 초반보다 훨씬 여유로운 얼굴이다.
하긴 승부에 전혀 관심이 없으니 저런 반응이 당연하다.
[퍼스트 서브 러셀.]
탕!!
[SERVE SPEED: 116MPH]
‘그래도 서브 속도는 그대로 유지하는 구나.’
전광판을 의식한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라도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정도로 결과가 달라지는 일은 없다.
쿵!
[러브 피트틴.]
스트로크 대결을 마무리 짓는 포핸드 다운 더 라인.
속도와 각도가 분명히 위력적이었지만 러셀의 빠른 풋워크를 생각하면 못 받을 샷은 아니다.
하지만 러셀은 1세트에서도 그랬듯이 여력을 남기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씨 좋게 점수를 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