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마이애미 오픈
[골든 보이의 깔끔한 백핸드 위너가 베이스라인을 정확하게 공략합니다. 3-0. 이제 3게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경기가 굉장히 빠르게 진행되고 있어요. 잘하면 1시간 안에 끝날 수도 있겠는데요?]
[지금 추세를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러셀이 1세트를 6-0으로 내주고 너무 무력해졌어요.]
해설자들은 놀란 얼굴로 경기에 대한 평가를 쏟아냈다.
아무리 초반 라운드라고 하지만 설마 베이글 세트가 나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마스터즈에 참가한 선수들은 전부 손에 꼽히는 실력자였으니 그들의 생각은 전혀 이상한 게 아니었다.
[······이전 대회에서도 그랬지만 골든 보이는 랭킹이 낮은 선수들에게 유독 강한 모습을 보여주네요.]
[확실히 기량에 비해 압도적인 결과를 많이 만들어내긴 하죠. 수비적인 플레이 스타일 덕분일까요?]
[그것도 어느 정도 영향이 있겠지만 뚜렷한 약점이 없는 게 더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 아, 두 선수가 코트 위로 올라가네요. 휴식 시간이 끝난 모양입니다.]
탕!!
베이스라인에서 서브를 시작한 러셀.
그는 더블 베이글까지 허락할 생각은 없는지 진지한 얼굴로 서비스게임을 임했다.
이대로 애매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간 6-0, 6-0으로 경기가 끝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러브 서틴.]
하지만 갑자기 마음을 바꾼다고 이미 한참이나 기울어진 상황을 바꿀 수 있을 리 없다.
만약 지혁이 체력을 아끼는 목적으로 쉬엄쉬엄 경기를 했다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런 모습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으니 말이다.
[4-0. 러셀이 마지막까지 분전을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최선을 다했으면 이 지경까지 오지는 않았을 텐데요. 과연 골든 보이의 실력은 닉이 극찬할 만하네요. 정말 환상적인 경기력입니다.]
[그의 선수 평가는 정확도가 높기로 유명하죠. 그나저나 크리스는 골든 보이가 다음 세대의 황제가 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지금 같은 포텐셜이 유지된다면 아마 가능하겠죠. 하지만 반짝하고 사라지는 유망주가 워낙 많잖아요? 그러니 2, 3년은 더 지켜봐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페더러를 대체할 거라는 신성들도 순식간에 추락하는 게 이 바닥이잖아요.]
크리스는 일단 판단을 보류하는 듯한 말을 했다.
최근 10년 동안 그랜드슬램 우승이나 결승, 준결승 진출을 해냈던 어린 유망주가 제법 많았지만 꾸준하게 탑5를 유지하고 있는 건 로저 페더러, 라파엘 나달, 노박 조코비치, 앤디 머레이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작년에 US오픈을 우승한 델 포트로가 리틀 페더러라고 칭송을 받던 것과 다르게 최근 커다란 부진을 겪는 걸 보면 잘 알 수 있다.
아무리 그랜드슬램 데뷔 초기에 좋은 성과를 얻어도 데이터가 쌓이면 언제든지 랭킹이 급격하게 하락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골든 보이가 에이스로 서비스게임을 마무리합니다. 5-0. 이제 마지막 게임만 남았습니다.]
[네. 이제 경기가 거의 끝난 것 같네요.]
베이글을 당하지 않으려는 러셀의 노력에도 순식간에 브레이크 된 게임.
마지막을 장식하는 다운 더 라인에 레셀은 라켓을 축 늘어트렸다.
[게임 세트. 매치 리. 6-0, 6-0.]
짝짝짝짝짝.
방송으로 심판의 콜이 떨어지자 코트 위로 기립박수가 쏟아졌다.
관중들이 더블 베이글이라는 진귀한 장면과 지혁의 완벽한 경기력에 진심으로 감탄했기 때문이다.
“명성만큼 대단한 실력이었어. 골든 보이.”
처참하게 패배했음에도 곧바로 경기장을 나가지 않고 악수를 청하는 러셀.
만약 다혈질의 선수였다면 라켓을 때려 부셔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지만 그는 최대한 티를 내지 않고 끝까지 예의를 지켰다.
그 모습에 지혁은 최대한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터벅터벅.
그렇게 러셀이 지친 몸을 이끌며 퇴장하자 잠시 후 리포터가 승리 인터뷰를 하기 위해 달려왔다.
관중들은 과연 마이애미에 떨어진 천재 선수가 무슨 말을 할지 눈을 빛내며 시선을 집중시켰다.
***
마이애미 오픈 2라운드가 끝나고 얼마 후, 한국 상황.
[이지혁, 생애 첫 마이애미 오픈 경기에서 ATP랭킹 68위 마이클 러셀을 더블 베이글로 격파.]
[마이클 러셀, “변명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졌다. 골든 보이는 이미 완성된 선수.”]
[일주일 만에 더욱 강해진 골든 보이, 그 비결은 닉 볼리티에리 아카데미의 훈련?]
[미국 아카데미에서 이루어진 이지혁, 정민의 만남. 한국 테니스를 이끌어나갈 동량은 왜 유학을 가게 되었을까?]
[투어 경기를 하고 있는 이지혁이 미국 레전드 선수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 이유.]
[경기가 끝나고 기립박수를 보내는 마이애미 오픈의 관중들.]
[32강 상대는 랭킹 14위의 후안 카를로스 페레로. 전문가들이 생각한 승률은 50%]
ㅡ 마스터즈 시작부터 더블 베이글 ㅗㅜㅑ 이번에 느낌 엄청 좋다.
ㅡ 이 정도는 당연한 거 아니냐?? 상대 선수 나이 많고 키까지 작아서 경쟁력 거의 없잖아. 저 자리에 다른 한국 선수 있었어도 충분히 이겼을 걸.
ㅡ ???? 무슨 소리하는 거야?? 지금 국내 랭킹 2위가 ATP랭킹 230위인데? 러셀이 국내 대회 참가하면 전부 찢어 놓고도 남는다. 쟤가 마스터즈에서 쭈구리라고 만만해 보이냐? ㅋㅋㅋㅋ
ㅡ ㅇㅈ 저건 지혁이라서 가능한 거지 마스터즈 2라운드에 출전하는 선수들 기본 스펙이 랭킹 70위임. 그것만으로 아시아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실력이다.
ㅡ ㄷㄷㄷㄷ 그런 선수를 6-0으로 발랐다고? 그러면 이지혁은 얼마나 괴물이라는 거냐?
ㅡ 레전드들이 괜히 천재라고 띄우겠냐. ESPN에서 앤드리 애거시가 해설하는 거 봤는데 당장 ATP랭킹 10위 안에 들어가도 큰 문제없을 거라 하더라. 이 정도면 올타임 레전드임 ㅋㅋㅋ
ㅡ 이지혁, 정민 있어서 앞으로 최소 15년 동안은 한국에서 테니스 부흥기 오겠네. 요즘 유망주 계속 쏟아져서 진짜 기대된다. ㅋㅋㅋㅋ
ㅡ 기사에도 나오던데 정민은 누구임? 처음 듣는데 얘도 탑랭커 인가.
ㅡ ㄴㄴㄴ 올해 한국 나이로 15살인데 오렌지볼 우승한 천재 주니어 선수다. 2년 전쯤에 역대급 유망주 나왔다고 테니스계에서 엄청 유명했음. 고인물들만 알고 있을 걸?
ㅡ 업계 사람들은 얘내들 쌍두마차라고 엄청나게 기대 중이다 ㅋㅋ
ㅡ 그랜드슬램 상위 라운드에서 한국 선수들 2명이 동시에 출전하는 그림 나올 수도 있겠네. 생각만 해도······.
국내 팬들은 지혁이 일주일 만에 대단한 활약을 하자 기대가 잔뜩 섞인 마음으로 마이애미 오픈을 시청했다.
물론 호주 오픈과 비교하면 신선함이 많이 떨어져서 시청률이 어느 정도 하락하기는 했지만 지난 몇 개월 동안 고정층이 많이 늘어나서 낙폭이 생각했던 만큼 크지는 않았다.
기복 없는 꾸준한 경기력 덕분에 지혁의 인기가 아직도 상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력과 랭킹이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성장하고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다행히 포인트 수급량이 떨어지지는 않았구나.’
최악의 경우 반토막이 나는 것도 각오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미국에서 증가한 팬들 덕분에 현상 유지는 된 것 같았다.
‘이번에는 4강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지혁은 얼마 후에 있을 32강과 16강에서 만나게 될 상대 선수를 떠올려 봤다.
후안 카를로스 페레로, 조 윌프리드 송가.
모두 이름만 들어도 쟁쟁해서 어느 하나 만만한 선수가 없다.
아마 최상의 컨디션으로 붙더라도 승률은 50%정도 일 것이다.
게다가 운이 좋아서 이들을 꺾고 8강에 진출하더라도 쿼터 파이널에는 ’그‘가 기다리고 있을 확률이 매우 높았다.
‘라파엘 나달······.’
3쿼터의 가장 하단을 노려보는 지혁.
그곳에는 최근 한국 팬들이 이지혁 담당 일진이라는 별명을 붙여준 나달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최근 랭킹의 변동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져서 두 사람의 대진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번 대회의 대진 운은 정말 최악이네.’
험난한 가시밭길을 뚫어도 마지막 쿼터에 기다리고 있는 게 나달이라니.
인디언 웰스 오픈 8강에서 당했던 패배가 기억나는지 벌써부터 몸이 으슬으슬해지는 느낌이다.
‘8강에서 만나면 2주 만에 다시 대결하게 되는 건가?’
설마 이렇게 빨리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아마 나달도 이런 상황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마지막에 헤어질 때 다음 그랜드슬램을 기약했던 걸로 기억하니 말이다.
‘음······. 지금 붙으면 이길 확률이 얼마나 될까.’
그동안 쉬지 않고 포인트를 수급하고 아카데미에서 코칭까지 받은 만큼 분명 이전 보다 실력이 더 상승하긴 했다.
하지만 그게 나달에게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다.
고작 이 정도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기량 차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역시 높게 잡아줘도 20%겠지.’
5번 중 1번.
처참하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빅3의 통산 승률을 생각하면 그리 나쁜 수치가 아니다.
그나마 마이애미 오픈이 하드 코트인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 한다.
나달의 클레이 코트 통산 승률은 97%가 넘었으니 만약 롤랑 가로스에서 대진이 붙었으면 더 끔찍한 상황에 처했을 것이다.
‘뭐, 이것도 나쁘진 않아.’
비록 커리어와 랭킹에는 악영향을 끼치겠지만 빅3를 직접 상대하면서 얻는 경험과 빅매치로 얻는 포인트를 생각하면 손해만 있는 건 아니다.
인디언 웰스 오픈에서도 나달을 상대하면서 상당히 많은 것을 얻었으니 말이다.
지혁은 며칠 뒤에 있을 대결이 벌써부터 기대되었다.
***
2라운드 경기가 끝나고 다음 날.
지혁은 훈련을 하기 위해 차를 타고 연습 코트로 이동하고 있었다.
32강 상대가 강적인 만큼 최대한 감각을 날카롭게 유지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벌써 도착했나?’
차가 멈추는 느낌에 창밖을 살펴보자 예약한 코트의 모습이 보인다.
아무래도 숙소가 가까웠던 만큼 도착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은 모양이다.
덜컥.
문을 열고 코트로 걸어가는 지혁과 코치들.
우르르 몰려다니는 동양인들의 등장에 경기를 구경하러 온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하나같이 운동복에 라켓 가방을 메고 있는 게 그들의 관심을 끌었나 보다.
“······어, 저 남자 골든 보이 아니야?”
“지···진짜네. 어제 TV에서 봤던 얼굴과 똑같아.”
지혁의 정체는 몇 초도 되지 않아서 밝혀졌다.
이곳이 마이애미 오픈이 열리는 장소라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코치들은 골든 보이라는 단어를 듣고 몸을 긴장시켰다.
하지만 걱정과 다르게 사람들은 구경만 할 뿐 가까이 접근하지 않았다.
라켓 가방을 챙겨온 모습을 보고 훈련을 하려는 것을 눈치 챘기 때문이다.
어차피 연습 코트로 따라가면 질리도록 볼 수 있는데 급하게 행동할 필요가 없다.
우르르르.
그렇게 지혁의 뒤를 따라가는 10명 정도의 무리가 생겼다.
그 모습에 지나가던 사람들은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다 상황을 파악하고 연습 코트로 발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