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마이애미 오픈
페레로는 자신의 높은 랭킹을 증명하듯 엄청난 저력을 선보였다.
지혁을 시종일관 몰아붙이며 서비스게임을 지켜낸 것이다.
[다운 더 라인! 페레로의 포핸드가 게임을 마무리합니다.]
[아무래도 오늘 경기는 길어질 것 같습니다. 코트 커버력이 워낙 대단한 선수들이라서 승부가 쉽게 나지 않겠어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렇게 되면 먼저 브레이크를 하는 쪽이 세트를 가져갈 확률이 높은데요. 누가 먼저 경기의 균형을 깨트릴지 기대가 되는 군요.]
해설들의 예고처럼 지혁과 페레로는 서비스게임을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철저하게 지켜나갔다.
브레이크가 없는 상황이 지루할 법도 하지만 관중들의 집중 상태는 최상에 가까웠다.
단순히 빅 서버와 베이스라이너의 대결이었다면 경기가 한 없이 지루했겠지만 두 선수는 수비보다 공격적인 플레이를 선호하는 올라운더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화려한 퍼포먼스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쿵!
뾰족한 포물선을 그리며 오른쪽 베이스라인 끝으로 급격히 낙하하는 지혁의 리버스 포핸드.
페레로는 백핸드로 높이 바운드되는 공을 쳐냈지만 방향이 흔들린 스트로크는 네트 상단에 걸렸다.
[게임 리 4-3.]
휴식 시간이 되자 각자의 벤치로 걸어가는 두 선수.
지혁은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거칠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이제 슬슬 서브도 먹히지 않네.’
세트 초반만 해도 서비스게임 당 에이스가 1개씩은 꾸준히 나왔는데.
하긴 경기를 시작한지 시간이 제법 지났으니 적응하는 것도 당연하다.
애초에 리턴 실력이 부족했으면 ATP랭킹 14위를 유지하지도 못했을 테니 말이다.
‘어디를 공략해야 할까.’
명쾌한 해답이 있었으면 좋겠지만 대부분의 랭킹이 높은 탑랭커들이 그렇듯 페레로는 특별한 약점이 없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지혁은 결국 마땅한 방법을 찾지 못하고 기존의 방식을 유지하기로 했다.
[레디.]
체어에서 휴식 시간이 끝났다는 신호가 오자 코트 위로 올라가는 지혁.
경기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던 만큼 이전 게임과 똑같이 진행되었다.
[와······. 정말 끈질기네요. 결국 듀스 상황이 되었습니다.]
[세트 중반쯤에 브레이크가 나올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두 선수를 너무 과소평가 한 것 같네요. 지금 추세라면 타이브레이크에 들어갈 것 같습니다.]
[그때가 되면 골든 보이의 변칙 플레이를 볼 수 있겠군요.]
[아마 높은 확률로 그렇겠죠. 가장 중요한 순간에 사용하려고 아껴둔 무기잖아요. 승패가 결정되는 타이브레이크 상황에서 무조건 사용할 겁니다.]
“하앗!”
탕!!
코트를 엄청난 속도로 달려가며 크로스샷을 받아치는 페레로.
관중들은 오늘 따라 미친 경기력을 보여주는 페레로에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방금 공격은 충분히 득점이 나올만한 회심의 스트로크였기 때문이다.
살이 떨릴 정도로 날카로운 샷에 지혁은 반대편 코트로 허겁지겁 달려갔지만 이미 도착하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게임 페레로. 타이브레이크.]
마침내 기다렸던 콜이 체어에서 들리자 ESPN의 두 해설자는 흥분한 어조로 멘트를 내뱉었다.
[와우! 환상적인 샷이었습니다! 페레로가 이렇게 대단한 선수였나요? 방금 장면은 하이라이트에 들어갈 정도로 대단했어요.]
[진짜 컨디션이 좋은 선수는 골든 보이가 아니라 페레로였네요. 평소보다 훨씬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요.]
[이제 물러날 곳이 없는 막다른 길입니다. 한 명은 절벽으로 떨어져야 해요.]
워낙 중요한 순간이라 그런지 관중석은 체어 엠파이어의 개입이 몇 번이나 있고 나서야 진정되었다.
그렇게 경기장이 조용하게 변하자 곧 타이브레이크가 시작되었다.
“후······.”
볼키즈에게 테니스공을 전달 받고 숨을 고르는 지혁.
포인트 하나하나가 아주 중요했기 때문에 준비 시간은 어쩔 수 없이 길어졌다.
“흐읍!”
쾅!!
전력을 다해 라켓을 휘두른 효과가 있었을까.
서브는 이전보다 더 빠른 속도로 서비스 코트에 떨어졌다.
하지만 페레로는 이제 고속 서브에 익숙해 진 건지 리턴을 어떻게든 성공시켰다.
‘이걸 받아 내다니.’
비록 에이스는 실패했지만 리턴 코스가 애매한 게 효과가 완전히 없는 건 아닌 모양이다.
타다다다!
네트 앞으로 빠르게 달려가서 포핸드 발리를 사용하는 지혁.
강력한 임팩트와 함께 날아가는 샷에 경기장의 모든 사람들은 첫 포인트가 서브 앤 발리로 싱겁게 끝날 거라고 생각했다.
퉁!
“······?”
[0-1. 서브 페레로.]
우와아아아!
관중들은 생각지도 못한 슈퍼 플레이에 경기장이 뒤흔들릴 정도로 크게 환호했다.
페레로가 엄청난 풋워크로 패싱샷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이대로 기세가 넘어가면 경기가 힘들어지는데······.’
빨리 상황을 반전시킬 만한 방법을 찾지 못하면 타이브레이크에서 승리할 확률은 빠르게 떨어질 것이다.
더 이상 전력을 아낄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한 지혁은 아껴두었던 공격 옵션을 전부 꺼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지혁이 상체를 낮추며 리시브 자세를 취하자 페레로도 시간을 지체하기 싫었는지 주머니에서 테니스공을 꺼냈다.
아무래도 흐름이 좋을 때 승부를 보고 싶은 모양이다.
탕!!
컨디션이 좋으면 서브 실력마저 높아지는지 페레로의 플랫 서브는 정확하게 T존에 떨어졌다.
끼이익-
슬라이딩을 하며 라켓을 뻗는 지혁.
퉁! 스윙을 할 여유가 없었기에 오른팔에서는 욱신거리는 통증이 밀려왔다.
자세가 불안정한 상태에서 서브를 받는 건 부상이 생길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걸 걱정할 상황이 아니다.
리턴과 동시에 센터마크로 달려가자 곧바로 강력한 스트로크가 돌아온다.
“하앗!”
탕!!
역동작을 노린 공격에 지혁은 이를 악물며 백핸드를 쳤다.
다행히 초반의 위기를 넘겨서 가장 위험한 상황은 지나갔다.
이제 스트로크 대결에 들어갔으니 상황을 지켜보며 찬스를 기다리면 될 것이다.
탕! 탕! 탕!
랠리가 지속되면서 아슬아슬한 장면이 상당히 많이 연출되었다.
하지만 두 선수의 집중력이 극에 달해서 위닝샷은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막 스트로크 횟수가 10구를 넘었을 때.
지혁이 기다리고 있던 완벽한 찬스가 마침내 찾아왔다.
그렇게 아름다운 궤적을 그리며 라켓이 휘둘러지자 이전보다 훨씬 날카로운 백핸드 크로스샷이 반대편 코트의 사이드라인으로 빠르게 날아갔다.
쿵!
[인! 1-1.]
“후······.”
체어에서 인이라는 콜이 들리자 안도의 한숨을 쉬는 지혁.
아슬아슬한 위치에 떨어져서 아웃이 될 수도 있었는데 운 좋게 라인 안으로 들어간 모양이다.
지혁은 관중석에서 들려오는 커다란 박수 소리를 들으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서브를 격파당한 페레로의 얼굴이 굳은 게 한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드디어 골든 보이의 한손 백핸드가 나왔습니다! 오랜만에 모습을 보이는 만큼 등장하자마자 제 역할을 톡톡히 하네요. 페레로는 상대하고 있던 선수가 갑자기 바뀐 느낌일 겁니다.]
[저건 언제 봐도 신기하네요. 밸런스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백핸드 자세를 자유자재로 전환하는 능력이라니······. 머리에 무슨 스위치라도 가지고 있는 걸까요.]
[하하하. 천재만 가질 수 있는 특권이죠. 골든 보이가 괜히 최고의 유망주라고 불리는 게 아닙니다.]
[확실히 어린 선수들 중에서 비교할만한 재능이 없긴 하죠. 아, 페레로가 서브를 시작하려고 하네요.]
이후의 타이브레이크에서 지혁은 페레로를 시종일관 압도하는 모습을 보이며 순식간에 스코어를 쌓아갔다.
쿵!
날카로운 궤적을 그리며 사이드라인에 떨어지는 백핸드 스트로크.
데자뷰가 느껴지는 그 광경에 관중들은 승부의 추가 기울었음을 직감했다.
[4-1. 서브 페레로.]
‘이제 3포인트.’
앞으로 1세트의 고지가 얼마 남지 않았다.
지혁은 그가 당했던 것처럼 페레로에게 약간의 여유도 주지 않고 빠르게 몰아쳤다.
한손 백핸드가 익숙해지기 전에 경기를 완전히 굳히려고 한 것이다.
[6-2. 세트 포인트.]
마지막 포인트를 남겨두고 서브를 준비하는 지혁.
이제 1세트가 완전히 기울어서 역전할 가능성이 사라졌지만 페레로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진지한 자세로 경기에 임했다.
하지만 프로의 세계가 항상 그렇듯 의지만으로 결과가 뒤집히는 일은 없었다.
[세트 리.]
“예쓰!!!”
마침내 1세트의 승자가 정해지자 지혁은 끓어오르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포효를 내질렀다.
그 마음을 이해하는지 관중들도 좌석에서 일어나 기립 박수를 치며 뜨거운 환호를 보냈다.
[골든 보이가 타이브레이크를 7-2로 가져갑니다! 페레로를 완벽하게 압도했어요!]
[1세트 후반에 열세에 처했던 모습이 마치 신기루처럼 느껴지는군요. 마법처럼 느껴지는 경기였습니다.]
[크리스, 다음 2세트는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아무래도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으니 페레로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겠죠. 아쉽지만 지금까지 쌓아놓은 경험은 골든 보이가 한손 백핸드를 꺼내든 이후로 전부 무용지물이 됐습니다.]
[처음부터 다시 적응해야 한다는 소리군요.]
[맞습니다. 정말 상대하기 까다로운 테니스입니다. 16살밖에 안 된 선수가 ATP랭킹 21위를 유지하고 있는 이유가 있어요.]
[아직 본격적으로 메이저 대회에 참가하지 않아서 앞으로 랭킹이 더 오를 겁니다. 최근 보여주고 있는 퍼포먼스를 유지만 해도 내년까지 랭킹 10위 안에는 충분히 들 거예요.]
[골든 보이가 탑랭커로 모습을 드러낸 게 고작 3개월인 걸 고려하면 확실히 그럴 확률이 높겠네요.]
***
‘작전이 이렇게 잘 먹힐 줄이야.······.’
지혁은 벤치에 앉아서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타이브레이크에 승리한 이후 2세트가 너무 쉽게 풀렸기 때문이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페레로의 경기력이 타이브레이크에서 패배한 이후 급격하게 하락했다.
‘경기 흐름이 망가진 건가?’
어이없는 실책을 저지르면서 서비스게임을 브레이크 당하다니.
1세트에서 보여준 엄청난 실력을 생각하면 정말 어이가 없는 일이다.
10분 전만 해도 마치 머레이를 상대하는 느낌이었는데.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모르겠다.
[플레이어 레디. 서브 리.]
잠시 후, 다시 시작된 경기.
지혁은 자신이 느낀 게 착각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는 듯 우세한 모습을 보이며 서비스게임을 지켜나갔다.
체력이 떨어져서 서브 속도가 약간 감소했지만 고작 몇km차이라서 큰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다.
오히려 페레로의 몸이 1세트보다 무거워진 만큼 체감 속도는 더 빨라졌을 것이다.
‘어쨌든 이 기회에 최대한 스코어를 벌려 놓자.’
언제 페레로의 경기력이 돌아올지 모른다.
제대로 된 대결을 하기 위해 그때를 기다리며 시간을 끌 수도 있지만 프로 대회에서 그런 사치를 부릴 생각은 없다.
[게임 리 3-1.]
‘브레이크를 한 번만 더 성공하면 이제 역전당하는 일은 없을 거야.’
지혁은 마지막 쐐기를 박기 위해 리시브 자리에서 페레로의 서브를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