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마이애미 오픈
2세트 중반으로 접어든 경기.
해설자들은 지혁이 위닝샷을 넣는 장면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피프틴 서티! 골든 보이가 코너를 노리는 백핸드 발리로 다시 한 번 득점에 성공합니다. 네트를 완벽하게 점령했어요.]
[갑자기 플레이 스타일이 달라져서 페레로가 좀처럼 대응하지 못하는군요. 좋았던 흐름이 완전히 끊겼습니다.]
[페레로의 실책 횟수가 눈에 띄게 늘어난 걸 보면 크리스의 말이 맞는 것 같네요. 골든 보이의 표정이 너무 편안해 보여요. 이대로는 경기가 싱겁게 끝날 겁니다.]
탕!!
[폴트!]
서비스라인을 미세하게 벗어난 페레로의 서브.
페레로는 조급한 마음이 든 탓인지 컨트롤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하앗!”
탕!!
두 번 연속으로 서브를 실패하면 점수를 잃게 되는 만큼 세컨 서브는 포물선을 그리는 탑스핀 스트로크가 날아갔다.
잔뜩 회전이 걸린 공은 바운드와 동시에 높게 튀어 올랐지만 에이스를 만들어 내지는 못했다.
이전보다 속도가 확연하게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괜히 프로 선수들이 플랫 서브를 선호하는 게 아니다.
아무리 스핀이 많은 서브라고 해도 속도가 느리면 위력이 현저하게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게임 리 4-1.]
계획대로 브레이크를 성공한 지혁.
관중들은 승세를 굳히는 그 일격에 더 이상 페레로가 역전할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해설자들의 의견도 그들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이번 포인트는 너무 아쉽네요. 충분히 받을 수 있는 스트로크였는데 말이죠.]
[풋워크가 느려져서 그렇습니다. 그나저나 골든 보이가 백핸드 크로스샷을 계속 고집하는 이유가 있었군요. 좌우 사이드라인을 공략하는 스트로크가 페레로의 체력을 완전히 고갈시켜 놨습니다.]
[저것도 사전에 계획한 전략일까요?]
[당연하죠. 마스터즈 대회에서 즉흥적으로 경기를 할 리가 없잖아요. 분명히 페레로를 철저하게 분석해서 나온 작전일 겁니다.]
이후의 남은 경기는 모두가 예상했듯이 별다른 반전 없이 지혁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다.
아무래도 변수가 만들어지기에는 상황이 너무 기울어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페레로는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지혁의 서비스게임을 한 번도 브레이크 하지 못하고 패배했다.
[게임 세트. 매치 리. 7-6(7-2), 6-3.]
마침내 방송으로 경기 종료 선언이 내려지자 경기장은 커다란 박수 소리로 휩싸였다.
눈을 즐겁게 하는 지혁의 화려한 실력에 관중들이 만족한 모양이다.
[휘유. 골든 보이가 세트 스코어 2-0으로 페레로를 제압하고 16강 진출을 확정 짓습니다.]
[페레로는 절대 만만한 선수가 아닌데 명성대로 대단한 실력이네요······.]
[이번에도 전문가들의 콧대를 제대로 눌러줬습니다. 경기가 팽팽할 거라는 그들의 예상을 아주 쉽게 깨트렸어요. 크리스, 골든 보이가 16강에서 상대할 선수는 누구인가요?]
[잠시만요······. 8번 시드를 받은 조 윌프리드 송가네요.]
[허······. 페레로보다 더 어려운 상대군요.]
브래드는 고개를 저으며 탄식했다.
지혁의 16강 상대가 만만치 않아서다.
[송가는 꾸준히 탑10을 유지하고 있는 선수인 만큼 이번에는 절대 쉽지 않을 겁니다. 그는 이때까지 마스터즈에서 상대했던 탑랭커들과 차원이 다른 선수예요.]
[하여튼 다음 경기는 볼거리가 상당히 많을 것 같습니다. 송가와 골든 보이는 화려한 플레이를 즐겨 사용하는 선수잖아요.]
[확실히 두 선수들이 아트 테니스를 자주 보여주긴 하죠. 아마 선수들은 치열한 대결에 머리가 아프겠지만 팬들은 다음 경기를 정말 좋아하겠습니다.]
해설자들은 인터뷰를 하는 지혁을 보며 흥미진진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 훌륭한 경기력을 보여준 골든 보이가 송가에게 어떤 모습을 보일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
[후안 카를로스 페레로에게 2-0으로 승리한 골든 보이. 16강 상대는 ATP랭킹 10위의 조 윌프리드 송가.]
[과연 골든 보이는 8강에서 나달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인가?]
[이지혁, “준비한대로 경기를 한다면 충분히 8강에 진출할 수 있다“라고 자신감을 표출.]
[자신을 제쳐놓고 다음 경기를 생각하는 골든 보이에게 한마디 하는 송가.]
[송가, “골든 보이? 그는 아직 미숙한 루키이다. 나는 페레로와 같은 실수를 하지 않을 것.”]
[골든 보이의 16강 경기를 관람하러 온다고 소식을 알린 앤드리 에거시와 마이클 창.]
ㅡ 어제 마이애미 오픈에서 이지혁 진짜 미쳤더라. 랭킹 14위를 2-0으로 처바름 ;;
ㅡ 페레로 초반에는 잘했는데, 타이 브레이크에서 흐름 꼬이더니 순식간에 무너지더라.
ㅡ 지혁좌 변칙 플레이 처음 상대해봐서 그런 거 아님?
ㅡ ㅇㅇ 그런 듯.
ㅡ 그런데 8강 진출하면 진짜로 나달이랑 다시 붙냐? 그러면 진짜 대박인데 ㅋㅋㅋㅋ
ㅡ 리벤지 매치 가자!!!
ㅡ 어차피 이틀 뒤에 송가만나면 광탈당할 거임 ㅅㄱ
ㅡ 송가 왜 이렇게 멘트 쌔게 하지? 내가 모르는 사건이라도 있나??
ㅡ 자기랑 경기있는데 인터뷰에서 나달 이야기만 해서 삐진 듯 ㅋㅋㅋ 지혁이가 너무하긴 했어.
ㅡ 인터뷰어들이 살살 긁어서 저러는 거다. 원래 착한 선수임.
ㅡ 응 변명해 봤자 이미 늦었어 이제부터 한국에서 매장이야 ^^
ㅡ 쟤는 한국에 올 일이 없는데··· 어쨌든 응원한다···.
ㅡ 앤드리 에거시랑 마이클 창은 이지혁 왤케 좋아함? 경기 자주 보러 오네.
ㅡ 이제 같은 닉 사단이라서 그럴 걸. 쟤들 전부 닉 볼리티에리 아카데미 출신이잖아.
ㅡ 와, 미국에서도 학연이냐. 저긴 안 그럴줄 알았는데.
ㅡ 혈연, 지연, 학연은 세계 어딜 가도 똑같음. 그래도 실력이 받쳐 줘서 저런 대우받지 어중간하게 200~300위면 신경도 안 쓴다. ㅋㅋ
32강 경기가 끝나고 몇 시간 후, 저녁.
지혁은 한국에게 생각지도 못한 제안을 받게 되었다.
“그러니까 저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찍고 싶어 한다고요?”
“네. 한국의 공중파에서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얼마든지 거절하셔도 됩니다. 회사에서도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은 아니에요.”
매니지먼트 직원은 그저 이런 요청도 있었다고 알려주는 게 목적이었는지 딱히 설득하려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하긴 한국에서 지혁의 유명세는 이미 정점에 달해서 따로 홍보가 필요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다른 나라에 비해 한국은 시장이 작아서 크게 관심을 주지 않는 것 일 수도 있었다.
“음······. 내키지 않으신 것 같으니 제안은 거절하겠습니다.”
조심스레 상황을 살피며 말하는 직원.
그는 다큐멘터리 촬영이 받아들여 질 리가 없을 거라 생각했다.
지혁이 한국에 체류하는 동안 돈이 되는 광고를 거의 찍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대부분의 팬들은 그가 미디어의 노출을 꺼린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로 틀린 말도 아니었고 말이다.
“아뇨. 재밌을 것 같네요. 기획서는 없나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네요.”
“······네? 아, 여기 있습니다.”
긍정적인 지혁의 반응에 매니지먼트 직원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면서 정리해둔 자료를 건네주었다.
지금 상황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다.
지금까지 대회와 훈련에만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줬으니 당연한 일이다.
“따로 일정을 변경할 필요는 없네요. 대회에 방해가 되지는 않겠어요.”
“네. 저희 스케줄에 맞추기로 해서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을 겁니다.”
기획서를 천천히 훑어보며 종이를 넘기는 지혁.
매니지먼트 직원은 침을 꿀꺽 삼키며 대답을 기다렸다.
비록 돈이 되지 않는 촬영이지만 자신의 고객이 미디어에 익숙해지길 바랬기 때문이다.
앞으로 랭킹이 올라갈수록 상상을 초월하는 금액의 제안이 들어올 확률이 높다.
그때를 대비해서 촬영 경험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툭.
몇 분 뒤. 테이블 위에서 종이 뭉치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지혁이 기획서를 전부 읽은 것이다.
“이번 기회에 다큐멘터리를 한 번 찍어보는 것도 괜찮겠네요. 재밌겠어요.”
“······그럼 제안을 받아들이신다는 뜻인가요?”
“네.”
“······.”
지혁의 말에 매니지먼트 직원은 믿기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웅성웅성.
주변은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옆 테이블에서 송가를 상대할 전략을 짜고 있던 코치들이 대화를 훔쳐 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차피 숨길 생각이 없어서 크게 상관 없다.
만약 수십억이 왔다갔다하는 중요한 계약이었다면 이런 장소에서 꺼내지도 않았을 거다.
“방송에 출연하려고? 언론에 노출되는 걸 싫어 했잖아?”
“그냥 궁금해서요. 매번 거절하는 것도 이상하잖아요. 마침 스케줄에 영향이 가지 않는 일이라 부담도 적고요.”
“그래. 잘 생각했어. 한국에서 유명해 질수록 앞으로 프로 생활을 하는 게 편해질 거야.”
코치들은 지혁의 결정을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아무래도 담당한 선수의 이름이 알려지면 자신들의 커리어도 더 좋아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앞으로 처리해야할 군대 문제나 국제 대회 차출을 생각하면 무조건 한국에서 영향력이 커지는 게 좋다.
솔직히 힘이 없으면 이리저리 불려 다니며 시간을 낭비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으니 말이다.
“그런데 촬영은 언제 시작해? 설마 마이애미 오픈부터는 아니겠지?”
“아직 정확하게 정해진 건 없어요. 매니지먼트랑 조율을 해봐야죠.”
“그렇구나······.”
약간 아쉬운 표정을 하는 한국인 코치들.
아무래도 공중파에 출연하는 걸 기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것보다 송가를 상대할 방법은 찾았어요?”
“기존의 전략 그대로야. 워낙 밸런스가 좋은 선수잖아.”
비록 특별한 해결책을 듣지 못했지만 지혁은 실망하지 않았다.
애초에 ATP랭킹 10위의 선수에게 큰 약점이 있을 턱이 없다.
페레로가 그랬듯이 송가도 거의 완벽한 실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지혁아, 네가 싫어하는 타입의 선수인데 괜찮겠어?”
“음. 송가도 빅 서버였죠.”
“일반적인 서버가 아니라 237km의 기록을 가지고 있는 최정상급 서버야. 게다가 스트로크도 무서울 정도로 정교해. 솔직히 이만한 선수가 아직도 랭킹 10위에 머무르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탑10에 들어가는 선수들은 그만큼 레벨이 다르다는 소리겠죠.”
지혁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앞으로 랭킹과 실력이 높아질수록 이런 선수들과 부딪치는 일이 급격히 늘어날 것이다.
그들과 차례차례 붙을 생각을 하니 벌써 등골이 오싹해진다.
과거 인간계 최강들과 붙으면서 처참하게 깨진 기억이 떠올라서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지금 실력으로 그들을 이기긴 힘들다.
‘송가도 만만하지 않지만 그 선수들과 비교하면 한 등급 떨어지는 실력이지.’
그런 점을 고려하면 최악의 상황은 아니다.
아무리 실력이 출중해도 송가가 넘지 못할 산은 아니니 말이다.
‘정면으로 붙으면 아마 승률이 30~40% 정도 나올 거야.’
분명 객관적인 실력을 비교하면 패배할 확률이 더 높은 경기다.
하지만 지혁이 과거에 송가를 몇 번이나 상대해본 경험이 있는 것에 비해 그는 이번이 첫 경기니 완전히 불리한 상황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