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마이애미 오픈
마이애미 오픈 16강 당일.
지혁과 송가의 대결은 테니스 팬들에게 제법 주목받는 매치 업이라 그런지 관중석이 거의 가득 찬 상태로 진행되었다.
일반적으로 마스터즈 대회는 그랜드슬램보다 인지도가 떨어져서 네임드 선수가 출전하거나 준결승, 결승이 아니라면 빈자리가 드문드문 보이는 게 정상이다.
아무래도 비슷한 시간 대에 다른 선수들의 경기가 애매하게 겹치다 보니 수천 석의 좌석을 전부 채우기는 힘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혁은 막 1년이 지난 짧은 데뷔 기간에도 불구하고 특출난 스타성 덕분에 유명한 선수와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은 티켓 파워를 가지고 있었다.
짝짝짝짝짝.
그때 경기장에서 박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지은아! 저기 이지혁이야!”
“에휴······. 그렇게 좋아?”
지은은 자신의 친구, 보름을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흘겨봤다.
기껏 비싼 비용을 지불하고 플로리다주에 여행을 왔는데 아까운 시간을 쪼개서 테니스 경기를 본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게 전부 보름이 테니스 광팬이라 벌어진 일이었다.
“뭐가 재밌다는 건지······.”
주변 사람들이 전부 흥분된 표정으로 코트를 보고 있었지만 지은은 스포츠에 전혀 관심이 없어서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 우리 앞을 지나갔어! 실물은 처음 봤는데 사진보다 훨씬 잘생겼다.”
“뭐, 잘생기긴 했네. 그것보다 정보름, 내일부터는 여행 일정을 제대로 다닐 거지?”
“응! 오늘 같이 와줘서 정말 고마워. 이 은혜는 내가 꼭 갚을게.”
“칫, 약속이나 잘 지켜. 갑자기 딴 길로 새지 말고.”
보름의 환한 미소에 차마 화를 내지 못하고 넘어가는 지은.
그렇게 두 여자가 티격태격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지혁에 이어서 송가가 경기장으로 입장했다.
“저 파란색 옷을 입은 사람이랑 경기하는 거 맞지?”
“맞아. 송가라고 엄청 유명한 테니스 선수야.”
“되게 무섭게 생겼다······. 저런 사람한테 이길 수 있으려나. 세계 랭킹 10위라고 했었지?”
“응? 랭킹은 어떻게 알고 있었어? 내가 말해주지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
보름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갑자기 씨익 웃으며 자신의 친구를 쳐다봤다.
전혀 관심 없던 척하던 지은이 몰래 정보를 찾아본 걸 눈치 챈 것이다.
“······왜 그런 얼굴로 보는 거야. 그냥 인기 검색어에 있길래 기사 헤드라인만 읽은 것뿐이야. 네가 생각하는 게 아니라고.”
“음~ 그렇구나. 그런데 지은아, 너는 이지혁 선수가 경기에서 이겼으면 좋겠어?”
“······당연하지. 기왕이면 한국 선수가 이기는 게 좋잖아.”
“테니스를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다행이야. 그것 말고 따로 알아본 건 있어? 내가 자세하게 설명해 줄게······.”
탕!
짓굿은 표정으로 지은을 추궁하려던 보름의 시도는 코트에서 들리는 임팩트 소리에 저지되었다.
지은은 코트로 고개로 돌아간 친구의 시선에 기회를 놓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이대로 상황이 흘러가면 한 시간이 넘도록 정보를 서칭한 게 들킬 것 같았기 때문이다.
‘테니스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돈이 아까워서 찾아본 거라고.’
티켓 값이 원화로 10만 원이 훌쩍 넘는데 아무것도 모른 채로 갈 수는 없지 않은가.
“도착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시작한 거야?”
“아니, 몸 풀기로 랠리를 하는 것 같아. 그래도 이제 10분만 기다리면 돼.”
“공이 엄청 빠르네······. 저걸 어떻게 받는 거지.”
100km를 훌쩍 넘는 타구에 놀란 표정을 짓는 지은.
지혁과 송가가 전력을 다하지 않았지만 테니스 대회를 처음 보는 그녀의 입장에서 힘을 빼고 치는 스트로크도 무섭게 보였다.
아무리 가볍게 치는 샷이라도 평범한 성인 남성의 전력보다 강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본 경기가 시작하면 지금보다 더 빨라질 거야. 저기 전광판에 숫자 보이지? 저게 속도야.”
“86MPH?”
“미국은 마일을 사용해서 1.6을 곱해주면 돼. 86이면 139km네.”
“······암산이 엄청 빠르네.”
“경기를 보다 보면 저절로 익숙해져. 자주 나오는 속도라서 외워지거든.”
[플레이어 레디. 서브 리.]
“아, 이제 진짜 시작하려나 보다.”
체어 엠파이어의 목소리가 방송으로 들리자 소란스럽던 경기장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지은은 갑작스러운 상황이 익숙하지 않은지 침을 꿀꺽 삼키며 코트 쪽으로 시선을 집중했다.
통. 통. 통. 통.
경기장을 울리는 가벼운 바운드 소리.
테니스공은 바닥을 몇 번 튕겨지더니 곧 하늘 높이 던져졌다.
쾅!!
[피프틴 러브]
[132MPH.]
짝짝짝짝짝짝.
“······.”
지혁이 시작부터 강력한 서브로 에이스를 얻어내자 고개를 끄덕이며 박수를 치는 관중들.
지은은 주변에서 들리는 환호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저···저런 걸 사람이 칠 수 있는 거야? 132마일이면······200km가 훨씬 넘잖아?”
비록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녀가 알기로 야구 공의 구속이 대략 150km 정도 된다고 들었다.
그런데 그것보다 60km가 빠른 공이라니.
눈으로도 쫓기 힘든 공을 사람이 쫓아갈 수 있을 리가 없다.
“실제로 보니까 엄청나지? 저것도 경기 초반이라 아직 몸이 덜 풀린 거야.”
“······그러면 저기서 더 빨라진 다는 소리야?“”응. 220km까지 무난하게 올라갈 걸.”
“저러면 공을 주고받는 게 가능해? 내가 생각하기에 서브만 하다가 끝날 것 같은데.”
만약 그렇게 흘러간다면 경기가 엄청나게 재미 없을 것이다.
아무리 놀라운 장면이라도 1시간 동안 저것만 보다가 숙소로 돌아가야 할테니 말이다.
“랭킹이 낮은 선수들은 실제로 그런 경우가 많아. 하지만 지금 경기하는 이지혁 선수와 송가는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실력자라서 충분히 받아낼 수 있어.”
지혁의 서브 준비 자세로 다시 시작되는 경기.
무릎을 굽힌 왕관 자세에서 응축된 힘이 역동적으로 풀려나오자 곧 어마어마한 힘이 라켓으로 전달되었다.
쾅!!
[133MPH.]
느낌이 좋았던 덕분인지 서브의 속도는 1km나 더 상승했다.
하지만 송가는 두 번 연속으로 에이스를 당할 만큼 만만한 선수가 아니다.
퉁!
공이 바운드 되기도 전에 코스를 예상한 것인지 편안하게 리턴을 성공하는 송가.
느릿한 공이었다면 네트 앞으로 달려가 발리로 마무리 했겠지만 ATP랭킹 10위의 선수가 그렇게 쉬울 리 없다.
지혁은 자칫하면 리턴 에이스를 당할 위기에 코트 반대편으로 서둘러 뛰어갔다.
탕!
각도가 제대로 나오지 않아 불안정한 자세로 임팩트된 포핸드 스트로크.
그 짧은 순간에도 반격을 생각한 것인지 스트로크는 발리를 맞지 않을 만한 빈 공간으로 날아갔다.
코트 중앙의 센터 마크에 도착하자 이번에는 반대편 사이드라인에 송가의 백핸드 크로스샷이 레이저처럼 쏘아졌다.
‘거리가 안 될 것 같은데.’
지혁은 공이 바운드가 되기 직전임에도 아슬아슬하게 반걸음이 모자라다는 것을 알아챘다.
이대로 스윙을 한다면 간발의 차로 라켓이 허공을 가를 것이다.
‘······어쩔 수 없지.’
지금 상황을 돌파하려면 테이크백이 간결한 한손 백핸드를 사용해야 한다.
이렇게 빨리 공격 옵션을 꺼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송가의 실력을 생각하면 완급 조절은 사치다.
전략도 팽팽한 상황에서 해야지 1세트를 다 뺏기고 나면 아무런 소용이 없으니 말이다.
“하앗!”
탕!
칼날 같은 각도로 되돌아가는 지혁의 백핸드.
송가는 리턴에서 얻은 이득 덕분에 그리 어렵지 않게 스트로크를 받아냈다.
시작부터 손해를 봤기 때문일까 랠리는 시종일관 송가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크윽······.”
집요하게 백핸드를 노리는 공격에 고통스러운 신음이 저절로 나왔다.
위치를 고정한 상태에서 스트로크를 받으면 어렵지 않겠지만 이러다가 언제 반대편 코트로 공이 날아올지 모른다.
만약 임팩트 이후에 코트 중앙으로 돌아가는 행동을 멈추면 송가는 무조건 빈틈을 노릴 것이다.
그렇게 조금씩 손해를 보고 있을 때.
갑자기 네트 앞으로 드롭샷이 떨어졌다.
지혁은 포핸드와 똑같은 테이크백 자세에 속아서 약간 늦게 출발했다.
‘여기서 드롭샷을 사용할 줄이야.’
드르르륵. 퉁!
바닥을 긁으며 공을 퍼내는 라켓.
관중들은 지혁의 엄청난 풋워크 속도에 입을 떡 벌렸다.
하지만 그런다고 상황을 바꿀 수는 없었다.
쾅!!
잠시 후, 지혁과 3m 떨어진 곳에 송가의 스매시가 떨어졌다.
절호의 기회를 잡았음에도 저런 코스를 노리다니.
아무래도 송가는 약간의 방심도 허용하지 않을 모양이다.
[피프틴 올.]
와아아아아!
무려 17구 만에 랠리가 끝나자 관중들은 경기장이 흔들릴 정도로 환호성을 질렀다.
숨 쉬는 것조차 잊어먹을 정도로 뛰어난 대결에 전율이 몸을 휘감았기 때문이다.
“······.”
지은과 보름은 주변에서 쏟아지는 기립 박수에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다.
그녀들도 다른 관중들처럼 엄청난 경기에 전율을 느꼈는지 볼이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너무 멋있어······.”
황홀한 표정으로 지혁에게 시선을 보내는 보름.
그녀는 오늘 경기가 대단할 거라 생각했지만 설마 이 정도 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게 테니스야?”
“응. 오늘 경기장에 오길 잘했지?”
“······지금 심정으로는 그래. 저런 모습을 1시간 내내 볼 수 있다면 돈이 아깝지 않을 거 같아.”
지은의 눈빛은 처음 시큰둥했던 것과 다르게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스포츠 경기가 세계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테니스 선수들의 대결이었으니.
솔직히 재미가 없을 리 없었다.
관중들의 함성과 박수는 지혁이 테니스공을 손에 쥐자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다음 포인트를 기대하는 마음에 체어 엠파이어의 요청이 없이도 자연스럽게 조용해 진 것이다.
수천 쌍의 뜨거운 눈빛은 토스가 시작되자 전부 허공으로 움직였다.
탕!!
경기장을 울리는 커다란 임팩트 소리.
지혁은 단단히 마음을 먹었는지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 트위스트 서브를 1세트 1게임부터 꺼내 들었다.
상대가 만만치 않음을 인정하고 열세를 인정한 것이다.
스핀이 걸린 서브는 궤적부터 완전히 달라진다.
송가는 정상적인 플랫 서브가 아님을 알아채고 스윙 자세를 바꾸려고 했지만 대처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쿵!!
코트에 바운드 된 공은 테이크 백을 하느라 열려 있는 송가의 가슴으로 빠르게 튀어 올랐다.
퍽!
코트 위에서 들리는 타격음에 아주 잠깐 조용해진 관중석.
하지만 그것도 잠시 경기장은 시끄러운 목소리로 가득차게 되었다.
‘저걸 안 피한다고?’
허리를 뒤로 꺾었으면 맞지 않았을 텐데.
무리하게 공을 라켓에 맞추려다 보니 저런 불상사가 일어났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지만 고통이 없을 리 없다.
분명히 약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저러는 것이다.
‘쉽지 않겠네······.’
몸을 아끼지 않는 것을 보니 방심은 기대하지 말아야 겠다.
지혁은 열기가 담긴 송가의 시선을 받으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