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마이애미 오픈
탕!!
“으······. 이거 놔.”
지연은 메디컬 타임이 끝나고 TV에서 다시 임팩트 소리가 들리자 수연의 손을 밀어냈다.
가장 중요한 순간에 한눈을 팔 수 없었기 때문이다.
“누가 이기고 있어?”
잠이 전부 달아났는지 초롱초롱한 눈으로 쇼파에 앉는 수연.
비록 전문적으로 배운 건 아니지만 그녀도 테니스가 취미인 만큼 지혁의 경기에 제법 관심이 있었다.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이 그렇듯 호주 오픈도 재미있게 봤고 말이다.
무엇보다 자신의 동생과 친하다고 하니 없던 호기심도 저절로 생겼다.
“1세트 5-5, 동점이야.”
“5-5? 그러면 듀스구나. 상대 선수의 실력이 대단한가 보네.”
수연은 집중하고 있는 동생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하는 건지 경기 상황을 전해 듣고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어차피 이번 게임이 끝나면 휴식 시간이 있으니 궁금한 건 그때 물어보면 된다.
[피프틴 올.]
[서티 피프틴.]
[포티 서티.]
송가의 실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지혁은 서브의 이점을 가지고도 좀처럼 승부를 내지 못했다.
만약 이 상황에서 실점을 한 번 더 허용하게 되면 상황이 엄청나게 복잡해질 것이다.
“후우······.”
날카로운 눈빛으로 공을 토스하는 지혁.
탕!!
트위스트 서브가 반대편 서비스 코트에 정확하게 내려 꽂혔지만 송가는 자신에게 똑같은 수법은 통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듯 라이징샷으로 받아쳤다.
표범 같이 민첩한 움직임과 정교한 컨트롤에 지혁의 움직임이 점점 바빠졌다.
스트로크 대결에서 조금씩 밀리고 있어서 일어난 일이다.
아마 별다른 변수가 없다면 타구의 횟수가 4~5번 정도 늘어났을 때 승부가 결정될 것이다.
타다다다!
몇 번의 랠리 끝에 기회를 잡아낸 송가가 네트 앞으로 빠르게 달려 온다.
탕!! 허공에서 임팩트되어 빠르게 쏘아지는 포핸드 발리.
스트로크와 각도가 완전히 달라서 도저히 받을 방법이 없어 보인다.
분명 지혁의 실력으로 따라갈 수 없는 공격이었지만 발리는 코트를 벗어나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라켓에 걸쳐졌다.
쿵!!
네트 옆을 통과해서 사이드라인에 떨어지는 백핸드.
높이가 낮아서 걸릴 수도 있었는데 스트로크 방향이 절묘해서 성공할 수 있었다.
만약 네트 폭이 지금보다 더 넓었다면 실패했겠지만 애초에 그것까지 고려한 샷이라 그런 상황이었다면 다른 방법을 사용했을 것이다.
지혁은 전력으로 돌진하던 힘을 멈추기 힘들었는지 관중석의 벽을 손으로 짚고 나서야 가까스로 움직임을 멈출 수 있었다.
[게임 리 6-5.]
와아아아아!
“골든 보이! 스트로크가 들어갔어요! 당신이 송가에게 역전했다구요!”
“지미, 경기가 끝나기 전에 말을 걸면 안 된다고 했지.”
“그래도 골든 보이가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
“진심으로 리가 이기길 바란다면 그런 행동을 하지 마. 그에게 방해가 될 뿐이야. 그리고 지금처럼 예의 없이 행동하면 경기장에서 쫓겨날 수도 있다.”
“알았어요······.”
아버지로 보이는 중년인이 단단히 주의를 주자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 지미.
지혁은 그 모습이 재밌었는지 꼬맹이에게 미소를 지어주고 벤치로 걸어갔다.
마음 같아서는 어린 팬에게 사인을 해주고 싶었지만 경기 중에 그런 행동을 하기는 힘들다.
“우와! 지연아, 방금 이지혁 선수 봤어?”
“······응.”
“진짜 엄청나게 빠르다. 저걸 어떻게 따라간 거지? 호주 오픈보다 풋워크가 더 빨라진 거 같아.”
지혁의 슈퍼 플레이를 목격하고 감탄했는지 지연이 재잘재잘 떠들며 호들갑을 떤다.
테니스를 잘 알지 못하는 초보자라도 방금 장면은 감탄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훌륭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니의 반응에도 지연은 커다란 충격을 받았는지 멍한 표정만 지을 뿐 별다른 행동을 하지 못했다.
이번 포인트로 긴가민가하던 생각이 확실해졌기 때문이다.
“지혁 오빠의 실력이 늘었어······.”
처음에는 착각인 줄 알았는데 방금 포핸드로 분명해졌다.
분명히 지혁의 기량은 경기가 시작할 때보다 월등하게 상승했다.
아무리 천재라고 하지만 이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걸까.
너무 압도적인 재능에 조금의 열등감도 느껴지지 않는다.
경쟁심도 따라잡을 수 있는 수준이어야 생기지 이 정도로 현격하게 차이가 나면 경외심밖에 들지 않는다.
인간이 자신과 종이 다른 다른 맹수에게 완력으로 이길 생각을 하지 않는 것과 같다.
***
4-5로 열세에 처했던 지혁이 6-5로 경기를 역전하게 되자 KBC 중계석의 분위기는 묘해졌다.
아무래도 경기가 박 감독이 처음 예상했던 것과 완전히 다르게 흘러갔기 때문이다.
[이지혁 선수가 엄청난 코트 커버력으로 게임에서 승리합니다. 마치 나달이 연상되는 수비력이었습니다. 두 번 연속 게임을 따내서 이제 게임 스코어가 6-5가 되었네요.]
[······2010년 ATP 하이라이트 장면에 들어가도 될 만한 샷이었습니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대단한 풋워크였어요.]
[이제 1세트가 얼마 남지 않았네요. 만약 다음 게임에서 브레이크가 나오지 않더라도 타이브레이크가 시작되면 순식간에 승부가 날 겁니다.]
이 해설은 휴식 시간 동안 지혁의 득점 장면이 계속 리플레이 되자 감회가 새로운 듯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마이애미 오픈 8강 진출이 정말 가능할지도 모르겠네요. 박 해설님도 이제 생각이 바뀌셨나요?]
[······예. 제가 이지혁 선수의 재능을 너무 과소평가한 것 같습니다. 일주일 만에 실력이 이렇게 늘었을 줄은 몰랐어요. 앞으로 천재의 가능성을 함부로 평가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너무 낙심하지 마세요. 어떤 전문가를 데려와도 지금 상황을 예측하지는 못했을 겁니다. 경기가 이렇게 흘러갈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아뇨. 오히려 저의 생각이 빗나가서 다행입니다. 그만큼 이지혁 선수가 대단하다는 뜻이잖아요.]
기존의 상식을 철저하게 파괴하는 규격 외의 재능을 목격하자 박 해설과 수많은 테니스 전문가들은 혼란스러운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설마 경기 중에 지혁이 성장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아무리 성장기의 선수라지만 이런 비현실적인 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다.
해설자들이 어딘가 들뜬 표정으로 대화를 하고 있을 때.
드디어 휴식 시간이 끝난 건지 다시 경기가 시작되었다.
지혁이 이전에 워낙 좋은 모습을 보여서일까.
관중들은 여기서 1세트가 끝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경기는 그들의 생각과 전혀 다르게 나왔다.
[게임 송가 6-6. 타이브레이크.]
방금 전 활약이 거짓이라는 듯 허무하게 게임을 내준 지혁.
의문이 섞인 시선이 경기장 곧곧에서 쏟아졌지만 일부 예리한 사람들은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지혁이 체력을 아끼기 위해 의도적으로 타이브레이크에 들어갔음을 말이다.
[결국 끝까지 가게 되었네요. 어딘가 싱거운 게임이었는데요. 이지혁 선수가 힘이 빠진 걸까요?]
[그게 아니라 일부로 게임을 양보한 겁니다.]
[네? 그게 무슨 말인가요?]
[전략적인 패배라는 뜻이죠. 서브를 4번 막아내는 것보다 1번만 브레이크하는 게 훨씬 낫잖아요? 비록 경기 시간이 늘어나겠지만 체력 소모를 생각하면 이 방법이 훨씬 효율적입니다.]
[아, 역시 그랬군요.]
이 해설은 전략이라는 말을 듣고 나서야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다.
어쩐지 뭔가 이상하다 했다.
잘하던 선수가 갑자기 열세에 처할 리 없는데 말이다.
“하앗!”
탕!!
[리! 1-0. 서브 송가.]
지혁의 에이스로 시작하는 타이브레이크.
이번에는 서브의 이점을 가지고 있는 상황이라서 굳이 능력의 힘을 빌릴 필요도 없었다.
이제 서비스가 송가의 차례로 넘어갔다.
진지한 표정을 보니 한 번이라도 점수를 내주게 되면 위험하다는 걸 그도 잘 알고 있는 모양이다.
[송가! 1-1.]
더 좋은 기회를 노릴 생각인지 지혁은 첫 포인트를 미련 없이 내주었다.
어차피 브레이크를 한 번만 성공하면 된다.
아직 송가의 서브가 6번이나 더 남아있으니 쓸데없이 무리하지 않는 게 현명하다.
1-2, 3-2, 3-4, 5-4.
그렇게 균형이 아슬아슬하게 유지되고 있을 때.
길었던 승부가 끝나려고 하는지 마침내 완벽한 기회가 만들어졌다.
‘이걸로 끝이야.’
마치 경기가 끝났음을 선고하는 것처럼 지혁은 느릿하게 날아오는 스트로크를 라이징샷으로 쳐냈다.
찰나 덕분에 바운드 속도가 절반 이하로 줄어들어서 가능했지 만약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송가에게 절대 시도하지 않았을 기술이다.
쿵!!
[리! 6-4. 세트 포인트 리.]
한 템포 이상 빠른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송가.
라이징샷에는 두 선수의 힘이 고스란히 담겨져있던 만큼 그는 스트로크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이것도 계속 사용하다 보니까 어느 타이밍에 써야 할지 슬슬 감이 잡히네.’
물론 찰나가 워낙 대단한 기술인 만큼 아무렇게나 써도 엄청난 위력을 발휘할 것이다.
그래도 최고의 효율을 발휘하려면 지금처럼 빌드 업이 갖춰지는 게 좋다.
‘이제 한 포인트만 얻으면 되는 구나.’
원한다면 바로 끝낼 수도 있지만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계획대로 전략을 수행하는 게 나을 것이다.
[세트 리!]
결국 타이브레이크의 승리는 7-5로 지혁의 손 안에 들어왔다.
경악스러운 표정을 짓는 관중들에게는 엄청난 반전이겠지만 사실 그에게 새로운 무기가 생겼을 때부터 정해진 결과였다.
그렇게 1세트가 끝나자 선수들에게 120초의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이런 시선은 오랜만인 걸.’
지혁은 괴물을 보는 듯한 사람들의 눈빛을 담담하게 받으며 벤치로 돌아갔다.
프로 경력이 6년이나 되는 송가도 이런 상황은 처음인지 시선이 고정되서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2세트를 제대로 치르려면 개인 정비를 해야 하는데 그걸 잊을 정도로 충격이 큰 모양이다.
‘이기는 건 어렵지 않겠어. 이제 남은 건 얼마나 체력을 보존할 수 있으냐인데.’
마침 8강 상대가 이번 시대의 절대자인 나달이다.
얼마 전, 직접 경기를 경험해봤던 만큼 지혁은 그가 얼마나 대단한 선수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가능하면 최상의 상태로 대결을 하고 싶은데. 아무래도 그건 힘들겠지.’
송가가 어지간한 선수도 아니고 쉽게 승리를 내어줄 리가 없다.
지금 추세를 생각했을 때 분명 매치를 가져가는 건 자신이겠지만 그 과정에서 막대한 대가를 지불하는 것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랜드슬램을 뛴다는 생각으로 해야겠네.’
마스터즈는 총 3세트 경기지만 송가에게 이기기 위해 사용할 체력을 생각하면 5세트도 부족할 듯하다.
‘효율적으로 플레이하는 걸로 방향을 잡자.’
이런 방법을 좋아하지 않아도 높은 라운드에 진출하려면 선택지가 별로 없어서 어쩔 수 없다.
송가 정도 되는 선수를 이기기 위해서 자존심을 접는 건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웬만하면 정면으로 승부를 보고 싶지만 그건 다음으로 미뤄야겠다.
이번에는 대진이 여유를 부릴만큼 만만하지 않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