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마이애미 오픈
[게임 세트. 매치 리. 7-6(7-5), 6-4]
“허억···허억···.”
지혁은 포핸드 다운 더 라인으로 마지막 매치 포인트를 따내고 더 이상 버티기 힘들었는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선수들의 모습만 보면 대체 누가 경기에서 이겼는지 짐작이 가지 않을 정도다.
그만큼 지혁의 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투두둑.
거친 숨을 몰아쉬며 휴식을 취하고 있자 1세트에서 그랬던 것처럼 코피가 쏟아졌다.
나름대로 체력을 관리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걸로는 모자랐던 모양이다.
테니스복이 제법 많은 출혈량에 피투성이로 변하자 볼 키즈들이 안전부절한 표정을 짓는다.
‘체어 엠파이어와 송가에게 인사를 하러 가야하는데······.’
코트 바닥을 손으로 짚고 일어나려고 했지만 긴장이 풀려서 도통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렇게 아주 잠깐 끙끙거리고 있자 누군가 옆에서 부축하며 몸을 일으켜 세워줬다.
‘송가잖아?’
지혁의 시선을 느꼈는지 미소를 보내는 송가.
마이애미 오픈에서 패배했지만 크게 상심한 얼굴이 아니다.
아마 이번 기회가 아니라도 마스터즈 8강 정도는 언제든지 진출할 수 있어서 그럴 것이다.
“훌륭했어. 골든 보이.”
부축을 받은 상태로 벤치에 걸어가고 있을 때.
어설픈 영어로 지나가듯이 칭찬이 들렸다.
“1세트 후반부터 전혀 다른 느낌이던데 실력을 숨기고 있던 거야?”
“······아뇨. 저는 처음부터 전력을 다했어요. 당신에게 여유를 부릴 정도로 제 실력이 뛰어나지는 않아요.”
“그래?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맞겠지.”
송가는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다지 믿는 표정은 아니다.
아무래도 지혁이 전략적인 이유로 빈 말을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다음 상대가 라파엘 나달이니 송가에게 정보가 새어나가는 것을 경계하는 것도 당연하다.
아마 두 사람의 입장이 바뀌었더라도 똑같은 대답이 나왔을 것이다.
“오늘 보여준 실력이 우연이 아니라면 나달을 이길 수 있을 거야. 그럼 기대하고 있을 게.”
어깨를 몇 번 두드려주고 경기장을 나가는 송가.
그렇게 경기장에 지혁이 혼자 남게 되자 대기하고 있던 리포터가 코트 안으로 들어 온다.
승자 인터뷰를 하려는 모양이다.
“완벽한 경기였어요. 골든 보이, 경기에서 이긴 소감이······.”
***
이례적으로 벤치에서 진행된 지혁의 인터뷰.
원래 코트 중앙에 서서 하는 게 보통이지만 주최 측에서 특별히 배려를 해줬다.
지혁이 가만히 서 있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지쳤다는 걸 잘 알았기 때문이다.
솔직히 피로 붉게 물들어 있는 하얀색 상의를 보면 상대가 누구라도 앉아서 인터뷰를 하는 걸 지적하지 않을 것이다.
“보름아, 내일도 이지혁 선수의 경기가 있는 거야?”
“응. 여기 시간표가 있는데······. 아! 저녁 9시에 있네.”
“밤에도 한다고? 공이 안 보이지 않아?”
“스타디움 안에 조명이 있어서 괜찮아. 오히려 기온이 내려가서 선수들은 더 좋아할 걸.”
보름은 야간 경기를 경험한 적이 있어서 그 매력을 잘 알고 있었다.
코트 중앙에 조명들이 집중된 상태로 경기가 진행되는 모습은 기억에서 뚜렷하게 남을 정도로 대단한 장관이었다.
괜히 네임드 선수들의 매치가 저녁에 몰려있는 게 아니다.
그만큼 볼 거리가 많아서였다.
“티켓은 구할 수 있어?”
“내일 경기도 보려고? 그러면 여행 스케줄을 취소해야 하잖아.”
뭔가 능글맞은 보름의 지적에 서서히 얼굴이 붉게 변하는 지은.
그녀는 이때까지 했던 행동과 자존심을 생각하면 당장 말을 주워 담고 싶었지만 지혁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려서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방금 전 경기로 인해 테니스에 매력에 완전히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이게 더 재밌을 것 같아서······.”
“킥. 알았어.”
자존심을 굽히는 친구의 모습에 보름은 더 이상 자극하지 않고 한 발 물러났다.
너무 심하게 놀리면 괜히 역효과가 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 경기는 상대가 나달이라서 티켓이 전부 매진되었을 거야. 너무 기대하지 마.”
다른 선수들의 8강전이라면 좌석이 넉넉하게 남아 있겠지만 지혁과 나달의 경기는 미국에서도 빅매치로 분류되는 만큼 티켓을 구하지 못할 확률이 높다.
그렇게 스마트폰으로 좌석을 확인하길 몇 분.
갑자기 보름의 손가락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비록 가격이 몇 배나 비쌌지만 자리가 남아있었던 것이다.
“꺄악! 성공했어!”
“정말로!?”
직접 확인시켜주기 위해 지은에게 휴대폰을 건내주는 보름.
그것과 동시에 매진되었다는 메시지가 홈페이지 화면 위로 나타났다.
“어! 방금 매진되었다고 알림이 떴어!”
“벌써? 거긴 14,000석이 넘는 경기장인데?”
“휴······. 조금만 늦었어도 놓쳤겠다.”
“빅매치라고 하더니 진짜 빠르긴 하구나. 그 많은 티켓이 순식간에 다 팔리다니.”
지은과 보름은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제 내일도 이지혁 선수의 경기를 볼 수 있는 거 맞지?”
“응. 600달러나 지불해서 오늘보다 좌석도 더 가까워.”
“600달러······.”
티켓 하나가 300달러라니.
고작 한 경기를 보는 것 치고 너무 과한 금액이다.
하지만 오늘 봤었던 수많은 명장면들을 생각하면 충분히 지불할 가치가 있다.
“보름아, 이지혁 선수가 4강에 진출하면 티켓 가격이 더 올라가겠지?”
“음······. 아마 그럴 거야. 하지만 그런 상황은 걱정할 필요가 없을 걸.”
“왜?”
“8강 상대가 나달이거든.”
“그 사람이 누구길래 그래? 유명한 선수야?”
“엄청. 세계에서 테니스를 두 번째로 잘하는 사람이야.”
테니스의 황제, 페더러가 버티고 있어서 아직 정상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지만.
만약 2010년이 원래 역사대로 흘러간다면 나달은 4번의 그랜드슬램 중에 3번을 우승하게 될 것이다.
그런 점을 고려했을 때 비공식적으로 테니스 선수들의 순위를 매기면 NO.1은 페더러가 아니라 나달이다.
“그러면 못 이기겠네······.”
보름이 이해하기 쉽게 호날두, 메시, 르브론, 타이거 우즈 등 유명한 스포츠 선수를 예로 들자 승산이 없다고 생각한 건지 지은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솔직히 테니스는 개인 종목이라서 팀 스포츠처럼 반전이 잘 일어나지 않는 만큼 그녀의 불길한 예상은 십중팔구 맞을 것이다.
“승패와 상관없이 두 사람의 경기는 리벤지 매치라 재밌는 부분이 많아. 분명히 오늘보다 더 볼 만할 걸?”
“그래도 기왕이면 이기면 좋을 텐데······.”
“어······. 승률이 0%는 아니니까 무조건 패배하지는 않을 거야.”
이러다가 기껏 예매한 티켓이 날아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꼈는지 보름은 테니스 기사를 찾아서 지은에게 보여줬다.
“이것 봐. 전문가들도 승률이 20%라고 하지? 게다가 나달은 얼마 전에 무릎 부상을 당해서 기량이 떨어졌다는 얘기가 많아. 이지혁 선수가 4강까지 진출했던 호주 오픈에서도 8강에서 탈락했거든.”
“역전 할수도 있다는 소리야?”
“맞아. 야구나 축구도 약팀이 강팀을 이기는 경우가 많잖아.”
사실대로 말하자면 종목이 달라서 예시가 완전히 틀렸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경기를 관람하지 못할 상황이라서 어쩔 수 없다.
어차피 지금 이런 모습을 보인다고 해도 막상 나달과 지혁의 대결을 보게 되면 승패 따위는 금새 잊을 것이다.
수준 높은 탑랭커들의 경기는 그 자체로 대단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
[ATP랭킹 10위의 송가를 2-0으로 완전히 격파! 다음 상대는 라파엘 나달!]
[마이애미 오픈 8강 진출을 확정지은 골든 보이, 그는 과연 복수를 성공할 수 있을까?]
[피를 흘리며 부상투혼하는 이지혁, 경기를 마치고 바로 병원에서 검진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이주일 만에 이루어진 리벤지 매치가 이전과 달리진 이유.]
[테니스 천재의 무서울 정도로 빠른 성장 속도.]
[이지혁, “충분히 이길 자신이 있다. 이번에는 결과가 다를 것이다.”]
[라파엘 나달, “이렇게 빨리 매치가 성사될 줄은 몰랐다. 골든 보이와 경기하는 건 나에게도 즐거운 일이다.”]
[흙신, 8강 전의 승자를 물어보는 질문에 ‘골든 보이는 아직 성장할 여지가 많은 선수’라고 일축.]
[아시아인 최초로 그랜드슬램에서 우승한 마이클 창, ESPN 특별 해설로 출연 확정.]
ㅡ 설마 송가한테 이길 줄이야 ㅠㅠㅠ 지혁이가 이때까지 했던 경기 중에 가장 최고였다···.
ㅡ 마지막에 주저앉는 모습 보니까 눈물 나오더라. 얼마나 힘들었으면 일어나지도 못하는 거냐.
ㅡ 내 생각에 이지혁 몸에 문제 있는 거 같음. 겨우 2시간 경기하고 탈진하는 모습 보이는 건 처음이잖아? 혹시 병이라도 있는 거 아니냐?
ㅡ ㄴㄴㄴ 매니지먼트에서 건강검진 결과 발표했다. 걱정할 필요 없이 엄청 쌩쌩함.
ㅡ 나달하고 리벤지 매치라 이번에도 2-0으로 지겠지···?
ㅡ 오늘 경기 봤으면 그런 소리 안 할텐데. 송가 이 대 떡으로 바르는 거 못 봄? 그리고 이번에는 자신있다고 하잖아.
ㅡ 인디언 웰스 오픈에서도 똑같은 말했었는데 붕어냐? 어차피 3~4년 안에 빅3는 절대 못 이긴다 쓸데없는 기대 ㄴㄴ
ㅡ 배당보면 뻔하지 ㅅㅂ 이지혁 6.32 나달 1.18 돈 버릴 자신 있으면 애국 배팅해보던가 만약에 이지혁이 이기면 632% 수익률 찍을 수 있다.
ㅡ 100만원 넣으면 632만원 ㅎㄷㄷ 사이트가 너무 손해보는 거 아닌가요?
ㅡ 그렇게 생각하면 제발 걸어보라고 ㅋㅋㅋㅋ
ㅡ 사람들 입으로만 이길거라고 하지 막상 돈 들어가면 전부 나달한테 건다. 물론 역배당충들 제외. 걔들은 13짜리에도 들어가더라···. 다른 의미로 괴물들임.
ㅡ 그것보다 마이클 창 누군지 아는 사람? 난 처음 들어 보는데.
ㅡ 대만계 미국인인데 17살에 롤랑 가로스 우승한 레전드 선수임. 앤드리 애거시, 짐 쿠리어, 피트 샘프라스랑 같은 아카데미 출신.
ㅡ 엄청 거물이네 ㄷㄷㄷ
ㅡ 마이클 창이 지혁이 코치 맡아주면 좋을 텐데 지금 코치진 숫자만 많고 너무 허술한 거 같음.
ㅡ 꿈 깨라 너 같으면 하겠냐?
지혁과 나달의 리벤지 매치가 이주 만에 다시 만들어지자 미국과 한국을 포함한 세계 각국에서 큰 관심이 다시 한 번 몰려들었다.
아무래도 16강에서 보여줬던 경기력이 상당히 인상 깊었기 때문이다.
상당히 많은 테니스 팬들은 혹시 하는 생각에 방송을 챙겨볼 마음을 먹고 있었다.
ESPN도 그런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대결을 빅매치로 생각하고 중계를 준비하고 있었다.
마스터즈 결승전에서나 가끔 볼 법한 마이클 창을 섭외한 것이 그 증거였다.
아주 적은 확률이지만 이번 매치에서 만약 이번 경기에서 나달이 패배하게 된다면 지혁의 몸 값은 크게 올라가게 될 것이다.
멀쩡한 컨디션의 빅3를 꺾는 다는 건 인간계 최강의 반열에 들어간다는 뜻이었니 말이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확률이 매우 낮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지혁은 경기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50% 이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