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마이애미 오픈
마이애미 오픈의 하드 록 스타디움.
지혁은 선수용 입구를 막 통과하고 있었다.
와아아아아!
‘관중석이 거의 안 보이네.’
늦은 저녁 시간이라서 하늘이 어두운 데다가 조명들이 전부 코트를 향하고 있어서 2열 이상의 좌석들은 그림자로 완전히 가려져 있다.
만약 사방에서 들리는 응원 소리가 없었다면 1~2천 석 규모의 소규모 경기장이라고 착각했을 것이다.
‘티켓이 전부 매진되었다고 했으니 저 그늘 속에는 관중들이 가득하겠지.’
이 정도 규모의 스타디움에서 야간 경기를 하는 건 처음이라 감회가 새롭다.
낯선 환경이라 익숙하지 않지만 이것도 나름대로 괜찮을 것 같다.
경기장 중심의 테니스 코트는 오히려 낮보다 더 밝았으니 말이다.
그리고 괜히 쓸데없는 곳에 시선이 분산되지 않아서 집중하기에는 이런 환경이 더 유리하다.
VAMOS RAFA! VAMOS RAFA!
지혁이 신기한 눈으로 경기장을 둘러 보고 있을 때.
마치 데자뷰처럼 라파엘 나달의 응원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얼마 전에 있었던 인디언 웰스 오픈이 연상되는 장면이다.
“오랜만이지 골든 보이?”
“라파, 이주 만이네요.”
“어제 송가와 했던 경기를 봤어. 실력이 많이 늘었더라. 뭔가 특별한 방법이라도 찾은 거야? 닉 볼리티에리 아카데미에서 코칭을 받았다고 듣긴 했지만 그게 그만한 효과가 있을 리는 없는데.”
“말하자면 정말 길어요.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거든요. 당신과 다시 경기하는 날을 정말 기다리고 있었어요. 이번에는 쉽지 않을 거예요.”
나달은 아직 성인도 되지 않은 어린 나이의 유망주가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이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객관적으로 비교했을 때 두 사람의 기량은 아직 큰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요즘 지혁이 랭킹 10위의 송가를 꺾는 등 대단한 활약을 하고 있지만 솔직히 그에게는 가소롭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지혁과 똑같은 과정을 전부 거쳐서 탑랭커들의 정점에 도달한 게 나달이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어제 보여줬던 실력을 그대로 재연할 수 있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 오늘도 재밌는 경기를 해보자.”
여유로운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이며 가방에서 라켓을 꺼내는 나달.
그 모습에 지혁도 자신의 벤치로 돌아갔다.
슬슬 몸 풀기 랠리를 해야 할 시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
지혁과 나달이 코트에 도착하고 얼마 후.
지루한 기다림 끝에 마침내 경기가 시작하려는 기미가 보였다.
[마이애미 오픈 8강, 골든 보이와 나달의 경기로 찾아뵙습니다. 저는 해설을 맡은 브래드 길버트입니다. 오늘은 예고했던 대로 17살의 나이로 롤랑 가로스에서 최연소 우승을 차지한 마이클 창을 특별 해설로 모셨습니다. 반갑습니다. 마이클.]
[해설로 보는 건 오랜만이네요. 브래드, 흥미로운 경기에 저를 섭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번에 앤드리가 이 자리를 차지했던 게 마음에 들지 않았거든요.]
[하하하. 당신을 먼저 섭외했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두 해설자는 서비스게임의 순서가 정해지는 시간 동안 유쾌한 멘트로 방송의 공백을 자연스럽게 채웠다.
[그런데 마이클, 오늘 경기는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하나요? 저희가 기대하고 있는 반전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골든 보이의 승리라······. 시작부터 어려운 질문을 던지시는군요. 일단 저의 대답은 ‘예스‘입니다.]
[음. 제가 듣고 싶었던 말이긴 하지만 조금 의외네요. 요즘 리의 폼이 대단해도 빅3에게 견줄 정도는 아니잖아요. 혹시 시청자분들이 납득할만한 근거가 있나요?]
[물론입니다. 아마 마이애미 16강 전을 본 탑랭커들이라면 제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충분히 이해하고 있을 겁니다.]
마이클 창의 확신이 가득 찬 목소리에 궁금한 표정을 짓는 브래드.
만약 상대가 어중간한 테니스 전문가였다면 귀를 기울이지 않았겠지만 상대는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레전드 선수다.
일반인들이 발견하지 못할 미세한 부분도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는 뜻이다.
[나달에게 골든 보이가 이길 수도 있다니, 믿기 힘든 말을 하시네요. 빨리 자세한 내용을 알려주시죠.]
[하하하. 일찍 밝히면 재미없으니 직접 경기를 보면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즉답을 피하는 얄미운 행동에 브래드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ESPN의 시청률을 생각하면 이게 맞는 행동이라 마냥 추궁하기도 어려웠다.
카메라 옆에서 PD가 웃음을 짓고 있는 걸 보니 그도 마이클 창의 멘트에 만족하고 있는 모양이다.
[······마이클은 여전하군요. 만약 여기가 야외 중계석이었다면 야유를 들었을 겁니다. 이렇게 궁금하게 해놓고 발을 빼다니요.]
[하하하. 어차피 1세트 중반이 되면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순식간에 눈치챌 거예요. 너무 재촉하지 마세요.]
브래드가 불만이 섞인 말투로 마이클 창에게 투덜거리고 있을 때,
선수들의 준비가 드디어 끝났는지 중계 화면에서 체어 엠파이어의 목소리가 들렸다.
[플레이어 레디. 서브 리.]
운이 좋았던 건지 경기는 지혁의 서브로 시작하게 되었다.
평균적으로 서비스게임을 브레이크 당할 확률은 20~30%에 불과하니까 먼저 기세를 가져가기에 딱 좋다.
쾅!!
코트 중앙을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며 T존에 떨어지는 플랫 서브.
에이스를 얻어도 충분한 샷이 라인 위를 정확하게 때렸지만 나달은 라켓을 길게 뻗으며 서브를 걷어내었다.
아무래도 대회 초반이 아닌 만큼 실전 감각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모양이다.
‘쯧. 에이스는 기대하지 말아야겠네.’
풋워크가 다른 탑랭커에 비해 특별히 빠른 것도 아닌데 잘도 고속 서브를 리턴을 해낸다.
저 근육질의 몸으로 저렇게 민첩하게 움직이다니.
하여간 빅3들은 괴물같은 존재들이다.
베이스라인 깊숙이 떨어지는 공을 리버스 포핸드로 쳐내는 지혁.
최근 마스터즈 대회에서 다른 공격 옵션들이 주목받고 있지만 탑스핀 스트로크는 그가 현재 사용할 수 있는 기술 중에 가장 위력적인 무기였다.
괜히 포핸드가 유일하게 A+등급을 받은 게 아니다.
엄청난 회전을 먹은 덕분인지 스트로크는 채찍처럼 휘어져서 나달의 백핸드 위치로 떨어졌다.
퉁!
헤비 스핀이 효과가 있었는지 나달의 라켓에서는 어딘가 빗맞은 소리가 났다.
테이크백이 약간 이상하다 싶었는데 스윙이 꼬인 모양이다.
“하앗!”
탕!!
기회를 잡고 네트 앞으로 달려가 발리를 사용하는 지혁.
그 공격에 나달은 제자리에 멈춰 섰다.
사이드라인에 제대로 들어간 샷을 무리해서 따라갈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지금 달려가도 풋워크가 특출나게 빠른 선수가 아니라면 늦었다.
[피프틴 러브.]
‘느낌이 좋은데.’
이대로 서비스게임을 지켜낸다면 남은 게임을 계획대로 풀어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최대한 체력을 아껴보자.’
경기 후반이 되면 어쩔 수 없이 찰나를 사용하는 상황이 많아질 것이다.
그러면 어제처럼 탈진 상태가 될 확률이 높다.
나달의 기량은 송가보다 훨씬 높으니 말이다.
그때를 대비하려면 지금부터 효율적으로 플레이하는 게 맞다.
쾅!!
임팩트 소리와 함께 다시 시작한 경기.
지혁은 절대 브레이크를 당하면 안 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모든 공격 옵션을 다 동원해서 서비스게임에 임했다.
제법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서브의 이점 덕분인지 시작부터 참사가 일어나지는 않았다.
“후우······.”
[게임 리. 앤드 체인지.]
마지막 스트로크가 라인 안으로 들어가자 지혁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등에서 차가운 식은땀이 흐르는 건 체력보다 팽팽한 긴장감이 원인이었다.
[와우! 훌륭한 한 손 백핸드였습니다! 사이드라인을 완벽하게 공략했어요! 첫 번째 게임이 여기서 종료됩니다. 골든 보이가 처음부터 전력을 다하는 것 같네요.]
[상대가 나달인데 완급 조절을 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죠. 좋은 판단입니다.]
[그런데 스코어가 약간 아슬아슬했죠?]
[포티 서티까지 갔으니 위험하긴 했습니다. 듀스가 되면 골치가 아팠을 테니 말이에요. 그래도 위험한 상황을 잘 피했습니다.]
[골든 보이가 나달의 서비스게임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가 되네요.]
코트를 교체하고 엉덩이, 좌우 어깨, 코와 귀를 정해진 순서대로 만지는 나달.
테니스와 전혀 관련없는 이상한 행동이지만 저건 서브를 하기 전에 하는 그만의 특별한 루틴이다.
‘여전하구나.’
보통 대부분의 스포츠 선수들은 자신만의 루틴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건 지혁도 예외가 아니라서 테니스공을 정해진 횟수만큼 바운드하거나 공기압을 확인하는 등 쓸모없는 행동을 할 때가 많았다.
물론 나달처럼 경기가 지연될 정도로 심각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이제 시작하려나 보네.’
드디어 길었던 루틴이 끝난건지 오른손을 뻗어 토스 자세를 취하는 나달.
그 모습에 지혁은 상체를 숙이며 리턴을 준비했다.
멈칫.
그때 습관적으로 코트 반대편을 확인하던 나달의 표정이 굳었다.
지혁의 위치가 베이스라인에서 한 걸음 이상 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 공격적인 포지션을 알아차린 관중들과 해설자들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것 참······. 시작부터 싸움을 걸다니 정말 화끈하네요. 골든 보이가 이렇게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는데요. 나달의 서브가 빠른 편이 아니라고 해도 200km에 육박합니다. 지금 위치는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요?]
[어지간한 풋워크와 반사 신경이 아니라면 에이스를 당할 포지션이긴 하네요.]
[제가 생각하기에 리스크가 너무 큰 도박입니다. 그냥 평소 스타일대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골든 보이도 철저하게 전략을 만들어 왔을테니 이유 없이 저러는 건 아닐 겁니다. 하지만 제 생각도 브래드의 의견과 그리 다르진 않네요. 너무 과감한 플레이입니다.]
잠깐 동작을 멈춰서 자리를 이동할 시간이 생겼음에도 지혁이 도통 움직이지 않자 나달은 라켓을 강하게 쥐며 테니스공을 토스했다.
실력을 과신하는 지혁에게 쓴 맛을 보여주기로 한 것이다.
“흐읍!”
쾅!!
[SERVE SPEED 123MPH]
140마일이 넘는 지혁의 서브와 비교하면 20km 이상 느리지만 이 정도만 해도 발로 쫓아가기는 힘든 속도다.
만약 일반인이 리시브 위치에서 이 서브를 받는다면 흐릿한 잔상만 볼 수 있을 것이다.
쿵!!
단단히 마음을 먹은 건지 코스 마저 상당히 날카롭다.
아무래도 폴트가 되는 것을 각오하고 T존을 노린 모양이다.
운이 없게도 바운드 위치가 서비스라인을 절묘하게 걸쳤지만 말이다.
이 정도 서브라면 정상적인 위치에 있더라도 얼마든지 에이스를 따낼 만하다.
끼이이익- 탕!!
[어···어!]
하지만 사람들의 예상과 다르게 지혁은 무시무시한 움직임을 보이며 리턴 에이스를 만들어내었다.
[러브 피프틴.]
스피커로 체어 엠파이어의 목소리가 들리자 드디어 정신을 차린 건지 경기장에서 경악한 분위기가 조금씩 번져갔다.
[오 마이 갓······. 방금 제가 뭘 본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