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마이애미 오픈
체어 엠파이어의 콜이 스피커를 통해 들리자 자신의 플레이가 성공했음을 알아챈 지혁.
그의 위치는 어느새 코트 반대편까지 도달해 있었다.
마지막에 슬라이딩을 한 영향으로 풋워크를 멈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약 이 상태에서 나달의 크로스샷이 떨어졌다면 무력하게 점수를 내줬을 것이다.
하지만 리턴이 완벽하게 들어간 만큼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퉁퉁.
지혁은 자신의 샷이 마음에 들었는지 라켓 면을 손바닥으로 몇 차례 두드렸다.
아직 남아있는 감각을 최대한 잊지 않으려고 한 행동이었다.
한동안 정적이 흐르던 관중석도 드디어 정신을 차린 건지 조금씩 환호성이 들렸다.
“······.’
공이 바운드된 자리를 뚫어져라 보면서 이해가 되지 않는 표정을 짓는 나달.
아무래도 방금 전 리턴 에이스가 어떻게 성공한 건지 복기를 하고 있는 모양이다.
[환상적인 플레이였습니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을 정도네요. 골든 보이의 다리가 이렇게 빨랐었나요? 마이클, 당신이 롤랑 가로스에서 우승했던 시절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아요!]
[20년도 넘은 이야기를 하시는군요. 리처럼 뛰어난 유망주와 비교해주면 저야 얼마든지 환영입니다. 저는 풋워크보다 백핸드가 훨씬 더 인상적이었어요.]
[나달의 서브를 쫓아가느라 리의 자세가 위태위태하기는 했죠.]
[네. 어지간한 선수였다면 넘어지고도 남았을 겁니다. 정말 놀라운 균형감각이었습니다.]
해설자들이 지혁에 대해 한동안 극찬을 하자 때를 맞춰 중계 화면에서 리플레이가 슬로우모션으로 송출됐다.
눈치 빠른 PD가 부연설명을 할 수 있게 도와준 것이다.
[바로 저 모습입니다. 다시 봐도 감탄이 나오는 백핸드에요.]
[제 착각이 아니라면 컨트롤이 더 좋아진 것 같은데요?]
[맞습니다. 어제 있었던 일 때문에 우려 섞인 평이 많았는데 그건 쓸데없는 걱정이었나 보네요. 오늘 골든 보이의 컨디션은 최고입니다. 이런 분위기라면 오늘 엄청난 이변이 생길 수도 있겠어요.]
의미 심장한 멘트를 하는 마이클 창.
그 말에 브래드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렇다면······?]
쾅!!
곧바로 부가적인 질문을 던지려고 했지만 코트에서 들리는 임팩트 소리가 브래드를 방해했다.
나달의 서브로 다시 경기가 시작한 것이다.
지금은 떠들 타이밍이 아니라는 듯 검지를 입 앞에 갖다대는 PD.
그 제스쳐에 중계석에 앉아있던 해설자들은 잡음을 넣지 않기 위해 입을 다물었다.
[폴트!]
서비스라인에서 한 뼘 차이로 벗어난 나달의 퍼스트 서브.
리턴 에이스가 얼마나 영향을 줬는지 알 수 없지만 그답지 않은 실책이 나온 걸 보면 효과가 없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세컨 서브는 탑스핀이겠지.’
물론 플랫이나 슬라이스를 사용할 수도 있다.
그래도 더블 폴트를 생각하면 그럴 가능성은 상당히 낮다.
탕!!
나달은 위험을 감수할 생각이 없는지 굳이 모험을 하지 않았다.
스핀 방향 덕분에 밑으로 하강하는 특성을 가진 탑스핀 서브를 사용한 것이다.
이러면 폴트가 나올 확률은 급격히 낮아진다.
예상대로 바운드 된 공의 위치는 넉넉하게 서비스 코트 안으로 들어갔다.
[SERVE SPEED 96MPH]
하지만 160km도 안 되는 느린 서브 속도로 지혁에게 에이스를 얻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게 두 선수의 게임은 자연스럽게 스트로크 대결로 이어졌다.
나달의 장점은 비상식적인 코트 커버력과 어마어마한 체력인 만큼 위닝샷이 나올 기미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헤비 스핀이 걸린 리버스 포핸드가 지혁의 백핸드를 서서히 조여들고 있어서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승부는 나달에게 넘어갈 것이다.
‘빌어먹을 왼손잡이.’
탑스핀 스트로크를 라이징샷으로 처리하면서 짜증스러운 표정을 짓는 지혁.
서로 라켓을 잡는 손이 다른 탓에 자꾸 취약한 백핸드 쪽이 공략 당한다.
안 그래도 리버스 포핸드는 굉장히 까다로운 편에 속하는 기술인데 코스까지 이러니 벌써 부터 머리가 지끈거린다.
‘스트로크가 길어질수록 나한테 불리해져. 웬만하면 속전속결로 끝내자.’
이전에도 패배를 당하면서 뼈저리게 느꼈지만 역시 나달의 기량을 따라잡기에는 한참이나 멀었다.
퉁!
테니스공을 마치 쪼개듯이 라켓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치는 지혁.
드르륵하고 긁히는 감각이 손에서 느껴짐과 동시에 백스핀이 걸린 슬라이스가 코트 외각으로 느릿하게 날아갔다.
시간을 버는 용도로 어프로치샷을 사용한 것이다.
타다다다.
나달은 네트 앞으로 달려오는 지혁의 발소리를 듣고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로브를 쳤다.
요행을 바라는 안일한 행동에 점수를 쉽게 얻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거의 3m에 달하는 높이로 네트를 넘어가는 탑스핀 로브.
지금이라도 베이스라인으로 돌아간다면 타구를 따라잡을 수 있겠지만 그때까지 상대가 가만히 있을 리 없다.
아마 힘들게 스트로크에 성공하더라도 나달이 유리한 자리를 선점하고 발리나 스매시로 위닝샷을 넣을 확률이 매우 높다.
탓!
그런 상황을 잘 알고 있었기에 지혁도 베이스라인으로 돌아가는 대신 무릎을 구부리며 서전트 점프를 했다.
통! 쭉 뻗은 라켓 상단에 로브가 간신히 임팩트가 되었는지 타구가 하늘하늘하게 네트를 넘어간다.
‘이걸로는 부족해.’
관중들의 눈이 크게 떠질 만큼 훌륭한 대처를 하고도 긴장감을 늦추지 않는 지혁.
그 예상대로 그의 두 발이 바닥에 닿자마자 곧바로 스트로크가 돌아왔다.
어느새 네트 근처에 도착한 나달이 스매시를 때린 것이다.
레이저처럼 쏘아져서 순식간에 네트를 넘어온 타구.
지혁이 아직 자세를 완전히 회복하지 못해서 평소 같았으면 이 공격에 무조건 실점을 당했을 거다.
하지만 경기장에서는 바운드 소리가 아니라 탕!하는 임팩트 소리만 들렸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새로 얻은 기술인 찰나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헛!”
회심의 공격이 지혁의 라켓에 걷어지는 모습에 당황한 목소리를 내며 다리를 움직이는 나달.
설마 스매시가 다시 돌아올 줄 몰랐는지 움직임이 약간 늦다.
퉁!
나달은 이대로는 거리가 부족할 거라 생각하고 넘어질 각오를 하며 몸을 날렸다.
그 허슬 플레이 덕분에 스트로크가 다시 이어졌다
끝나지 않는 팽팽한 대결에 긴장감이 극에 달했는지 앓는 듯한 신음을 흘리는 관중들.
숨 쉬는 것조차 잊은 모습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경기에 몰입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지독하구나. 이제 이쯤에서 끝내자.’
탕!!
지혁은 네트 너머로 나달이 무너진 자세를 빠르게 회복하려고 하자 더 이상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비어있는 공간으로 패싱샷을 때렸다.
이번 공격은 상대가 빅3라도 물리적으로 절대 받을 수 없는 각도다.
[러브 서티.]
무려 17구 만에 끝난 두 번째 포인트.
이전과 차원이 달라진 지혁의 실력에 나달의 표정은 싸늘하게 식었다.
날카로운 분위기를 보면 제대로 경기에 임하려는 모양이다.
솔직히 이런 퍼포먼스를 보여줬는데 위기감을 느끼지 않는 건 말이 안 된다.
‘진면목을 늦게 보여주는 것도 생각해봤지만······.’
어제 코치들과 의논 끝에 경기 초반부터 기세를 잡아가는 걸로 결정을 내렸다.
어차피 송가를 상대하면서 보여준 게 있어서 기만이 통할 거라는 확신도 없다.
‘후······. 무서운 걸.’
지혁은 반대편 코트에서 나달이 노려보는 눈빛에 입꼬리를 올리며 도발했다.
이런 얕은 수가 통할 리 없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만만한 선수로 인식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말이다.
한동안 살벌한 기류가 흐르자 볼 키즈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래도 선수들과 거리가 가까운 만큼 신경전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
쿵!!
다운 더 라인 코스를 공략하는 지혁의 포핸드 잭나이프.
높은 타점과 빠른 임팩트 타이밍 덕분인지 스트로크는 모서리 쪽의 베이스라인을 때리고 코트를 유유히 벗어났다.
[게임 리 2-0.]
짝짝짝짝짝짝.
서비스게임이 러브 게임으로 브레이크되자 사방에서 기립 박수가 쏟아졌다.
리턴 에이스, 발리, 한 손 백핸드, 포핸드 잭나이프 등 지혁이 따낸 네 개의 포인트가 전부 하이라이트에 들어갈 정도로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정상급 테니스 선수의 테크닉을 제대로 보여주는군요. 재능이 무서울 정도입니다. 저런 기술들은 언제 배운 걸까요.]
[최근까지 발리를 약점으로 지적받았는데 그것도 완벽하게 보완했네요. 이렇게 빨리 성장하다니 어떤 방법으로 훈련을 하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그나저나 마이클, 당신이 이번 경기에서 골든 보이가 승리할 수도 있다고 말했던 건 허풍이 아니었군요. 만약 경기가 지금처럼 흘러간다면 충분히 이변이 일어날 수 있겠어요.]
감탄한 표정으로 마이클 창을 쳐다보는 브래드.
역시 정점을 찍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선수의 눈썰미는 다른 모양이다.
전문가들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을 경기 전에 정확하게 예측하다니 말이다.
[아마 기량이 일정하게 유지되면 거뜬하게 4강에 진출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긴 하네요······.]
마이클 창은 확실하지 않다는 듯이 말을 길게 늘어트렸다.
[걸리는 점이라. 혹시 체력을 말하는 건가요?]
[네. 16강 전을 시청한 분들은 골든 보이가 2시간 만에 탈진하는 모습을 보셨을 겁니다. 그런 상황이 다시 닥친다면 경기가 힘들어질 거예요.]
[리는 그랜드슬램 경기도 거뜬하게 해냈으니 괜찮지 않을까요? 하루 동안 충분히 휴식을 취하기도 했잖아요.]
[정상적인 상태라면 걱정할 필요도 없겠죠. 탑랭커가 고작 2~3세트 만에 퍼질 리가 없으니 말이에요.]
[······골든 보이의 몸에 데미지가 쌓여있다는 뜻이군요. 확실히 16살이라는 어린 나이를 생각하면 과격한 경기가 많긴 했죠.]
[물론 제 착각일 수도 있습니다. 어제 보여줬던 모습도 그저 긴장이 풀려서 그랬을지도 모르구요. 그저 가능성일 뿐입니다.]
확실한 정보는 아니었지만 마이클 창이 해놓은 말이 있어서인지 서비스게임을 진행하고 있던 지혁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우려 섞인 시선을 받고 있었다.
“하앗!”
쾅!!
[SERVE SPEED 137MPH]
하지만 220km의 고속 서브를 아무렇지도 않게 때리는 모습을 연달아 보여주자 사람들의 눈빛은 점점 달라졌다.
탑랭커들 중에서도 상위권에 들어가는 파워와 탄탄한 몸을 보면 절대 연약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지혁의 근육질 몸을 보면 5~6시간 경기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 선수가 고작 3세트 만에 퍼진다니 말도 안되는 일이다.
쿵!!
[게임 리 3-0.]
서비스게임의 마지막 포인트를 140마일의 서브로 마무리한 지혁.
그 강력한 모습에 사람들은 마이클 창의 예측을 믿지 않기로 했다.
‘이제 3번만 막아내면 되는구나.’
1세트에서 더 이상 나달에게 브레이크를 따낼 생각은 없다.
이렇게만 해도 충분히 이길 수 있으니 말이다.
방어를 중점적으로 하다가 절체절명의 순간이 됐을 때 아껴둔 힘을 한 번에 폭발시키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