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마이애미 오픈
[이지혁, 나달을 꺾고 마이애미 오프 4강 쾌거.]
[어린 신예에게 덜미를 잡힌 클레이의 신.]
[한국인 최초로 마스터즈 우승이 나올 확률은 80%.]
[2주 만에 성사된 리벤지 매치는 어떻게 역사적인 한 판이 되었는가.]
[외신들과 마이클 창이 극찬한 슈퍼 플레이.]
[라파엘 나달 “골든 보이의 경기력 인상적, 마치 페더러 같았다.”]
[로저 페더러 “델 포트로에 이어서 주목할 만한 유망주가 나타난 게 즐겁다.”]
[ESPN 해설 중, 마이클 창 “리는 세계 최고가 될 잠재력 충분하다.”라고 극찬.]
지혁의 승리를 예상했던 사람들이 워낙 적은 탓일까.
8강에서 나달이 2-0으로 패배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그에 관한 기사들이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엄청난 속도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마 이 정도 반응이면 호주 오픈 상위 라운드에 진출했을 때와 비슷할 것이다.
그때도 지금처럼 대형 포털사이트의 실시간 검색어와 미디어를 거의 점령하다 시피 했으니 말이다.
ㅡ 이지혁 마스터즈 2연속 준결승 진출 ㄷㄷㄷㄷ 진짜 클래스 미쳤네. 메이저 대회에 참가할 때마다 매번 네 손가락 안에 듬 ;;
ㅡ 이번 경기로 어느 반열까지 올라온 거냐? 이제 탑10에 들어갔으려나?
ㅡ 이틀 사이에 송가랑 나달도 전부 이겼으니까 잘하면 될 것 같은데 마이클 창도 ATP랭킹 5위까지 빠르게 올라갈 거라 했잖아.
ㅡ 이러다가 올해나 내년 안에 그랜드슬램 결승전도 볼 수 있겠다 ㅋㅋㅋ
ㅡ ㄹㅇ 대진이랑 타이밍만 제대로 잡으면 가능할 수도 있음.
ㅡ 너희들 너무 설레발치는 거 아니냐? 나달 컨디션이 최악이었거나 무릎 부상이 재발한 것일 수도 있잖아. 이번에 네임드 선수들 전부 탈락했던데 그랜드슬램에 비해서 중요하지 않아서 적당히 한 거겠지.
ㅡ 테린이니? 우승 상금이 100만 달러가 넘는데 너 같으면 대충하겠냐. 그리고 생방송 보면 그딴 소리 절대 못 한다.
ㅡ ㅇㅈ 어제 경기는 진짜 역대급이었음. 이제 통곡의 벽도 통과했으니까 이대로 우승까지 가자!!!
ㅡ 나달 떨어지고 나서 우승 난이도 체감상 엄청 떨어진 것 같네 ㅋㅋㅋ 또 최연소 기록 갈아 치우겠다 ㅋㅋ
ㅡ 아 개열받는다 ㅡㅡ 일확천금 노리는 놈들 정의구현했어야 하는데 이지혁 눈치도 없지.
ㅡ 당신이 화나신 건 정배를 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 제 배당 보면서 속 좀 가라앉히시죠 ㅎㅎ
ㅡ 와 ㅅㅂ +266만 원? 미쳤다 ;; 나도 지혁좌 믿어볼 걸 ㅠ
ㅡ 배당이 6.32면 이길 확률 20% 이하라는 건데 어떻게 50걸었누··· 심장이 강철인가···
ㅡ 돈 벌었으니까 다음 픽좀 말해줘 이번에도 이지혁 승?
ㅡ 3.14인데 로딕한테 걸어야죠. 100 들어갑니다 ㅎㅎ
ㅡ ㄷㄷㄷ 극한의 역배충.
***
8강 경기를 치르고 3일 후.
가장 큰 장애물을 통과해서일까.
지혁은 나달과 대결했던 하드 록 스타디움에서 거의 상체 크기만한 트로피를 머리 위로 들어올릴 수 있었다.
준결승의 앤디 로딕과 결승의 토마스 베르디흐를 모두 격파하고 마침내 한국인 최초로 마스터즈에서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코트 위에서 시상식이 이루어지는 동안 뜨거운 환호와 박수 소리가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앞으로 최소 10년 이상 테니스계를 이끌어나갈 천재 유망주의 첫 메이저 우승을 진심으로 반겼기 때문이다.
만약 지혁이 몇 년 안에 ATP랭킹 1위를 찍고 정점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면 오늘은 역사적인 순간이 될 것이다.
그렇게 세러머니로 트로피를 높이 든 채로 경기장을 돌아다니길 몇 분, 주최 측의 진행 요원이 우승자 인터뷰를 해야 한다고 슬쩍 알려왔다.
아무래도 지금 상황이 전 세계에서 생중계가 되고 있는 만큼 천천히 여운을 즐기는 건 힘든 모양이다.
“마이애미 오픈의 우승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골든 보이.”
“감사합니다.”
“이번 대회는 당신에게 의미가 상당히 클 텐데요. 지금 기분이 어떤가요?”
“너무 좋죠. 어렵게 얻은 결과라서 더 달콤하네요.”
리포터의 질문에 크게 미소를 지으며 답하는 지혁.
보통 인터뷰 답변은 약간 가식적인 멘트가 들어가는 게 보통이지만 이번 대답은 정말 진심이었다.
마스터즈 대회에서 우승을 하는 건 그에게도 생전 처음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어려웠다라······. 결승전은 별로 치열하지 않았는데요. 힘들었던 순간은 언제를 말하는 건가요?”
“음······. 역시 나달과 했던 경기겠죠.”
“아, 이틀 전에 있었던 대결이군요. 그런데 그 매치는 골든 보이가 2-0으로 이겼잖아요. 위기라고 하기에는 조금 부족한 거 아닌가요?”
“단순하게 스코어로 보면 그렇긴 하죠. 하지만 겉으로 보는 것과 다르게 그날은 정말 아슬아슬했어요. 경기가 2세트에서 끝나서 다행이지 아마 3세트까지 갔다면 여러 가지 문제 때문에 제가 패배했을 거예요.”
지혁은 의도적으로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는 말을 했다.
이번 발언은 경쟁자들에게 힌트가 되겠지만 어차피 마스터즈 대회에서 보여준 게 워낙 많아서 눈치가 빠른 사람들은 그의 체력 이슈를 전부 알고 있었다.
아마 다음 대회에서 만날 선수들은 높은 확률로 장시간 경기를 전략으로 들고 올 것이다.
그게 의도적으로 파놓은 함정인 줄도 모르고 말이다.
‘새로 얻은 기술만 사용하지 않으면 체력은 예전과 똑같으니까 한동안 재미를 볼 수 있겠어.’
예측과 전략이 철저하게 무너질 때 상대 선수들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었다.
찰나의 사용 횟수에 따라 상황이 바뀔 거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할 테니 분명 그때가 되면 체력에 대한 얘기는 쏙 들어가겠지.
“저와 시청자들이 모르는 속사정이 있었군요. 약점이 될 수도 있는 말이었는데 솔직하게 답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뇨. 이미 꽤 많은 선수들이 알고 있는 얘기라서 괜찮습니다.”
“아,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그럼 다음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리는 로저, 라파, 노박 세 명의 그랜드슬램 우승자 중에서 아직 라파만 직접 상대해봤습니다. 지금 같은 활약을 그대로 유지한다면 빠른 시일 내에 다른 빅3와 매치가 결정될 텐데요. 두 선수에게 승리할 자신이 있나요?”
지혁은 리포터에게서 빅3가 언급되자 자신의 위상이 크게 올라갔음을 실감했다.
대회 시드에 따라 쿼터가 나뉘는 걸 생각하면 저 질문은 그가 앞으로도 높은 대회 성적을 얻을 거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에 마스터즈 대회 우승으로 ATP포인트 1000점을 얻어서 랭킹이 여덟 계단이나 상승해 13위가 됐으니 앞으로 최소한 메이저 대회 8강 이상으로 올라가야 1, 2위인 그들과 경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네. 이길 자신이 있습니다. 객관적으로 비교했을 때 제 실력은 페더러, 조코비치보다 떨어지겠지만 승부는 단순하게 전력만으로 정해지는 게 아니니까요.”
“하하. 결국 마이애미 오픈에서 우승 트로피를 차지한 건 골든 보이였으니 확실히 설득력이 있는 말이네요.”
리포터는 자신감이 가득한 지혁의 모습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겸손이 담긴 말보다 이렇게 당당한 게 그의 취향이 아닌 모양이다.
“아쉽게도 이제 질문이 얼마 남지 않았네요. 최근 들어서 서브 앤 발리 전략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던데 이유가 뭔가요? 전문가들은 너무 성급한 변화라고 부정적인 의견이 많습니다.”
“솔직히 발리는 즉흥적인 결정이었습니다. 그때는 그 방법이 가장 좋을 것 같았거든요. 실제로 결과도 괜찮았고요. 그리고 최고가 되기 위해서는 모든 기술을 유연하게 받아들일 줄 알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페더러처럼요.”
“그럼 마지막 질문입니다. 리의 다음 계획은 무엇인가요?”
스포츠 스타의 향후 행보는 테니스 팬들에게 가장 관심 있는 일이라 관중석의 시선이 이전보다 더욱 집중되었다.
그런 분위기를 느끼고 지혁이 잠깐 뜸을 들이자 14,000석의 하드 록 스타디움은 숨소리만 들릴 정도로 고요해졌다.
“그랜드슬램 우승입니다.”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여는 지혁.
비록 짧은 답변이었지만 발언의 파장은 작지 않았다.
최근의 폼을 생각하면 정말로 현실로 이루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와아아아아!
그랜드슬램 우승 선언에 터져 나오는 관중들의 함성.
PD는 이렇게 끝나는 게 그림이 더 좋을 거라고 생각한 건지 결국 인터뷰는 마무리 멘트 없이 종료되었다.
***
마이애미 오픈이 끝나고 거의 두 달이 지난 시점.
4~5월, 두 달 동안 마스터즈는 총 3번이 더 개최되었다.
몬테 카를로 오픈, 로마 오픈, 마드리드 오픈.
50위 안의 최상위 랭커들이 대부분 참가해서 그랜드슬램과 비교해도 모두 경쟁력이 부족하지 않은 쟁쟁한 대회들이었다.
지혁은 최선을 다하면서 대회에 참가했지만 마이애미 오픈처럼 좋은 성적을 얻지는 못했다.
경쟁자로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던 유망주에게 패배를 당하고 절치부심한 건지 나달이 모든 마스터즈를 휩쓸어 버리며 전승 행진을 이어나갔기 때문이다.
무서운 건 이런 엄청난 성적을 얻었음에도 페더러가 아직도 3.000포인트라는 커다란 격차로 1위 자리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다는 거다.
현재 랭킹 10위인 지혁의 ATP포인트가 3,000점 초반이니 이게 얼마나 어마어마한 차이인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테니스를 막 입문한 사람들이 의문을 가질 만큼 아이러니한 상황이지만 이런 일이 생긴 원인은 우승 포인트가 무려 2,000점이나 되는 그랜드슬램의 탓이다.
“우승 3번에 준우승 2번이라니······. 작년 한 해는 페더러가 완전히 지배했구나.”
과연 테니스 황제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압도적인 성적이다.
“마스터즈 4강 한 번에 8강 두 번이면 내 마스터즈 성적도 절대 부족한 건 아닌데······.”
정작 랭킹은 3위 밖에 올리지 못했다.
여기서 9위로 올라가려면 600포인트, 8위는 1.400포인트니 앞으로 갈 길이 한참이나 멀었다.
역시 최상위 선수들 간의 격차는 하위 랭커들과 차원이 다른 모양이다.
“지금 실력으로는 7~8위 정도가 한계겠지.”
최근 흘러가는 추세와 대회 성적을 고려했 때 올해 12월까지 델 포트로를 따라잡는 건 아무래도 무리일 듯하다.
랭킹이 산정되는 기준인 ATP포인트는 1년 내에 얻어야 의미가 있었으니 말이다.
“마이애미 오픈처럼 무리하면 가능할 것도 같지만······.”
필요 이상으로 몸을 혹사하면서 랭킹을 올리기는 싫었다.
솔직히 아주 잠깐 5위를 찍고 시즌 아웃 당하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지혁은 조만간 불행한 운명을 맞게 될 델 포트로처럼 한, 두 해만 반짝하고 부상으로 사라지고 싶지 않았다.
이런 복잡한 사정이 있었기에 그의 마스터즈 성적은 8강 근처에서 그쳤던 것이다.
비운의 챔피언이 되어서 테니스 팬들에게 찬양받길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거 부상으로 얼마나 고된 시간을 보냈는데 바보처럼 똑같은 과오를 저지를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