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역대급 테니스 천재가 되었다-80화 (80/241)

80화. 롤랑 가로스

통. 통. 통.

네트 앞에서 낮게 바운드되는 페더러의 드롭샷.

지혁은 백스핀이 걸린 공이 바닥에 두 번 이상 바운드되자 빠르게 움직이던 다리를 우뚝 멈췄다.

이미 늦었다는 걸 알아서였다.

[게임 세트, 세트 페더러 6-3.]

잠시 후, 체어 방향에서 들려오는 경기 종료 선언.

지혁이 먼저 서비스게임을 한 것 치고 상당히 처참한 결과였다.

6-3이라는 스코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브레이크를 무려 두 번이나 당했다는 뜻이었으니 말이다.

이건 변명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완패다.

짝짝짝짝짝.

돈을 주고도 구경하기 힘든 대결을 본 것에 만족한 것인지 훈련장은 팬들의 박수 소리로 가득 찼다.

비록 응원하는 선수들은 각각 달랐지만 모두가 불만을 가지지 않을 만큼 경기 내용이 훌륭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롤랑 가로스를 보기 위해 비싼 비용과 시간을 들여서 프랑스까지 여행 온 사람들이 공짜로 이런 진귀한 경험을 했는데 불평을 할 리가 없었다.

“골든 보이가 졌네······. 역시 페더러를 상대하기는 너무 이른 건가.”

“한참이나 이르지. 몇 년, 아니, 어쩌면 그가 은퇴하기 전까지 넘지 못할 수도 있어. 너도 두 사람의 실력 차이를 직접 봤잖아? 절대 쉽게 좁혀질 격차가 아니야.”

“그래도 지금 성장세를 고려하면 아무리 늦어도 5년 안에 따라잡을 수 있지 않을까?”

“5년? 그때쯤이면 골든 보이의 나이가 적어도 21살이거나 22살일 건데 그보다 12살이나 많은 페더러가 랭킹이 추락하는 치욕을 당하면서 그때까지 현역으로 남아있겠어?”

정점을 찍은 선수들이 보통 일찍 은퇴하는 걸 생각했을 때 나름 설득력이 있는 추측이다.

전대의 황제인 샘프라스도 31살에 프로 생활을 마쳤으니 말이다.

물론 팬의 예상과 다르게 빅3들은 모두 30대 중후반이 되는 2020년까지 1~3위를 유지하며 현역으로 왕성하게 활동한다.

하지만 그건 일반적인 상식에서 엄청나게 벗어나는 일이다.

페더러처럼 한국 나이 마흔 살으로 세계 랭킹 3위를 무리 없이 유지한다는 것을 도대체 누가 상상이나 하겠는가.

이건 테니스 역사상 최강의 선수라고 평가받는 페나조들이라서 가능한 것이다.

“골든 보이가 몇 년만 더 빨리 태어났으면 좋았을 텐데······. 빅3와 세대가 다른 게 아쉽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오히려 그에게 엄청난 행운이지. 지금이 전성기인 80년대생 선수들은 페더러, 나달, 조코비치들로 인해 그랜드슬램에서 대부분 우승하지 못하고 쓸쓸하게 사라질 테니까. 반대로 리는 비슷한 나이대에 경쟁자가 전혀 없어서 10년 뒤의 테니스계를 간단하게 평정할 수 있을 거야. 아마 심각한 부상을 당하지 않으면 높은 확률로 다음 대의 황제는 그가 되겠지.“”······네가 골든 보이를 그렇게 높게 평가할 줄은 몰랐는 걸. 아까 전 만해도 혹평을 했잖아.”

“페더러와 비교하면 부족하다고 한 거지 나는 그를 필요 이상으로 과소평가한 적이 없어. 단지 시기가 이를 뿐이라고 말했던 것 뿐이야.”

“그런가······.”

지혁을 응원하던 팬은 친구의 말을 듣고 완전히 설득당했다.

아무래도 테니스에 대한 지식이 비교적 부족한데다가 논리적으로 거슬리는 부분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선수가 다음 대의 황제가 될 거라고 말하는데 반박하는 것도 이상하다.

“그러면 이번 롤랑 가로스도 골든 보이가 결승전까지 올라가기 힘들겠구나. 나달과 쿼터가 달라서 꽤 기대하고 있었는데.”

“아마 US 오픈 같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렇겠지. 그랜드슬램에서 우승하려면 아직 한참······.”

그렇게 팬들이 경기의 결과를 가지고 선수들의 실력과 이번 대회의 성적을 내키는 대로 평가하고 있을 때.

지혁과 페더러는 승패에 연연하지 않는 표정으로 편안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서로 모든 전력을 발휘하지 않았다는 걸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어서였다.

실전도 아닌 연습에서 일희일비하기에는 두 사람의 프로 경력이 너무 길었다.

아무리 황제라도 일 년에 4~6번은 패배하니 이런 자잘한 일은 그들 같은 베테랑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내가 들었던 것보다 훨씬 대단하던데, 훌륭한 실력이었어.”

“나달과 경기할 때도 느꼈지만 역시 빅3의 벽은 높네요. 오늘 연습 경기는 제가 완벽하게 졌어요.”

“하하하. 아직 숨겨 놓은 무기가 있으면서 엄살은.”

패배를 순순히 인정하는 지혁의 말에 별로 동감하지 않는지 피식 웃는 페더러.

그 반응에 지혁은 찔리는 것이 있는지 차마 반박을 하지 못하고 자그맣게 미소를 지었다.

굳이 대답하지 않고 웃음으로 넘어가려고 한 것이다.

“이제 연습도 끝났으니 다음 스케줄을 가봐야 하네. 리, 너도 같이 갈래?”

“바쁘신 거 아니었어요?”

“훈련 시간을 빼면 여유가 없긴 하지.”

“······그렇다면?”

“맞아. 롤랑이 오픈하기 전까지 같이 훈련하자. 바브린카도 오기로 약속했으니까 내가 그 녀석을 소개시켜 줄게. 이미 호주 오픈에서 한 번 만난 적이 있었지?”

“······네. 저에겐 정말 잊을 수 없는 경기였죠.”

끔찍한 기억이라는 듯 고개를 젓는 지혁.

승부가 워낙 아슬아슬하기도 했지만 플레이 타임이 무려 324분이나 되었던 장시간의 경기라 아직도 최근 일처럼 뚜렷한 느낌이다.

다리가 풀릴 정도로 탈진한 탓에 볼 키즈에게 부축을 받은 상태로 바브린카와 체어 엠파이어에게 인사를 했었는데 그 날의 경험을 어떻게 잊어먹겠는가.

‘2-2 상황에서 어플의 한계가 해제되면서 간신히 이겼었지.’

심지어 호주 오픈에서 5세트는 타이브레이크까지 없어 게임 스코어가 10-8까지 갔던 걸로 기억한다.

인간계 수문장이라고 불리는 바브린카와 실직적으로 6세트를 치열하게 대결한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래? 어떤 선택을 하든 너를 존중할게. 혼자 훈련하는 게 편하다면 얼마든지 거절해도 괜찮아.”

“아뇨! 당연히 수락해야죠. 페더러와 바브린카가 연습 상대가 되어 주는데 누가 이런 제안을 거절하겠어요. 무조건 따라갈게요.”

지혁은 코치들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급하게 페더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잃을 게 없고 이득만 잔뜩 있는 좋은 기회였기 때문이다.

어차피 혼자 연습을 하는 것보다 제대로 된 상대가 있는 게 훨씬 나을 테니 코치들도 무조건 찬성하는 입장일 것이다.

남는 시간까지 1위와 24위 선수들을 대체할 방법이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럼 훈련장을 옮기자. 여기도 나쁘진 않지만 가까운 곳에 더 좋은 곳이 있어.”

“네.”

잠시 후, 짐을 챙겨 코트를 빠져나가는 두 선수.

어느새 상당한 숫자가 되어있던 팬들은 아쉬운 눈빛을 보냈다.

며칠 동안 지혁의 훈련을 마음껏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전부 무산이 되어서였다.

***

페더러가 장담했던 대로 이동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훈련장과 고작 15분 거리에 클레이 코트로 보이는 장소가 있었던 것이다.

파리는 땅 값도 엄청나게 비싼 걸로 아는데 용케도 이런 장소를 개인 코트로 유지하고 있다.

뭐, 포브스에 따르면 지난 10년 간 페더러의 수입이 6억 4000만 달러가 넘는다고 하니 이 정도 지출은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겠지.

아직 연수입이 수십억 규모인 지혁에겐 엄두도 못 낼 일이지만 말이다.

“페더러!”

그렇게 지혁과 일행들이 실내 코트의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몇 달 전에 들어봤던 바브린카의 목소리가 페더러를 반겼다.

아무래도 같은 스위스 국적의 테니스 선수인 만큼 두 사람은 상당한 친분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페더러는 4살이나 어린 바브린카를 유망주 시절부터 적극적으로 지도해줬던 걸로 알려졌으니 이상한 일도 아니다.

가장 어려웠던 시절 모든 선수들의 목표와 우상인 테니스의 황제가 비시즌기를 같이 보내면서 도와줬는데 어지간히 배은망덕하지 않은 이상 사이가 나쁠 리가 없다.

“어! 너는? 리잖아? 여기는 어떻게 온 거야? 따로 들은 게 없는데.”

“페더러가 롤랑이 시작하기 전까지 훈련을 같이 하자고 해서요. 그나저나 오랜만이네요. 바브린카. 호주 오픈이 끝나고 처음 보는 거니까 4개월 만이죠?”

“뭐?”

예상치 못한 지혁의 말을 듣고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버린 바브린카.

아무래도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에 놀란 모양이다.

하긴 친분도 없는 경쟁자를 개인 코트까지 데리고 왔으니 이해가 되지 않을 만도 하다.

이번에 페더러의 제안은 어지간히 친한 선수가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냉정하게 생각했을 때 자신을 이길 가능성이 있는 선수와 누가 같이 훈련을 하겠는가.

차라리 30위권 밖의 선수였다면 그도 신경을 쓰지 않겠지만 지혁의 랭킹은 무려 10위였으니 그런 경우에 포함되는 것도 아니었다.

경기 당일 컨디션이 나쁘거나 재수가 없으면 충분히 일격을 맞을 수도 있는 실력이라는 뜻이다.

“페더러, 정말 괜찮겠어요? 리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한 유망주가 아니에요. 만만하게 보다간 큰일이 날 수도 있다고요.”

지혁은 예상치 못한 바브린카의 고평가에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정도 되는 선수가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할 줄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스탠, 미리 말해주지 않고 결정해서 미안해. 그래도 내가 생각한 게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당신이 그렇게까지 말하면 어쩔 수 없지만······.”

“어차피 연습 경기도 한 번 하고 오는 길이야. 그리고 네가 생각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내 실력을 잘 알고 있잖아?”

“휴······. 알았어요.”

바브린카는 몇 마디 되지 않는 설득을 듣고 길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납득을 한 건 아니지만 그도 페더러의 호의로 훈련을 같이 하고 있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본인이 결정한 일인데 도움을 받는 상황에서 무작정 반대할 수도 없다.

애초에 그런 억지가 받아들여 질리도 없고 말이다.

“그럼 두 사람 모두 인사해. 오랜만에 보는 거지?”

“네. 마스터즈에 참가했어도 호주 오픈 이후로 경기를 한 적은 없었으니까요. 어쨌든 리, 며칠 동안 잘 부탁해.”

“갑자기 들이닥쳐서 미안해요. 롤랑이 시작할 때까지 서로에게 도움이 되도록 노력할게요.”

어딘가 어색한 표정으로 악수를 하는 지혁과 바브린카.

두 사람은 무려 8살이나 차이가 났지만 상반된 태도가 원인인지 나이가 거의 비슷한 것 같았다.

‘전에는 이렇지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자신의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분명 카리스마가 엄청났었다.

아마 스승이나 다름 없는 페더러가 옆에 있어서 이런 행동을 하는 거겠지.

그렇게 중재를 받은 두 사람은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로 코트 안으로 들어갔다.

서로를 경계해야 하는 상황이라 순수한 마음으로 도움을 주고 받기는 힘들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두 사람은 롤랑에서 마주치게 된다면 승패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비등비등한 실력인데 어떻게 의식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서로 경쟁심을 느끼고 있는 선수들이 아무 생각 없이 바로 훈련에 집중하는 게 비정상적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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