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역대급 테니스 천재가 되었다-81화 (81/241)

81화. 롤랑 가로스

‘롤랑에서 바브린카의 쿼터가 어디였더라?’

지혁은 훈련을 하기 위해 코치들에게 장비를 건네받으며 곰곰이 생각해봤다.

만약 롤랑에서 그와 대결하게 된다면 몇 강이 될지 미리 알아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4개의 쿼터 중 지혁이 속한 곳은 2쿼터이니 그곳만 아니면 큰 문제 없이 세 사람이 훈련을 진행할 수 있다.

“코치님, 바브린카가 몇 번 시드를 받았는지 알고 있어요?”

“잠깐만······. ATP랭킹이 24위니까 20번이네.”

스마트폰으로 선수들의 출전 명단을 확인하고 곧바로 답을 주는 코치.

지혁은 시드 번호를 듣자마자 바브린카가 어느 쿼터에 속해있는지 정확하게 알아낼 수 있었다.

테니스 초보들은 단순히 단편적인 정보만으로 유추하긴 힘들겠지만 대회 출전이 잦은 지혁에게 이 정도는 크게 어렵지 않을 일이었다.

아무래도 선수들의 대진표가 무작위로 정해지는 게 아니라 매번 똑같은 규칙대로 짜였기 때문이다.

10년이나 프로 생활을 하다 보면 이런 건 원하지 않아도 저절로 외워진다.

‘20번 시드면 1번 쿼터 하단이겠구나. 그러면 이번 대회에서 만날 가능성이 거의 없네. 따로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다.’

대진이 제법 떨어져 있어서 최소한 4강까지 진출해야 만날 수 있을 듯하다.

게다가 바브린카가 속한 쿼터는 페더러가 최상단을 차지하고 있어서 상위 라운드에 진출하는 게 거의 불가능했다.

아무리 그가 대단한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ATP랭킹 1위의 황제를 꺾기는 아직 한참이나 멀었다.

‘원래 역사대로 추측해보면 최소한 3년은 더 지나야 반전을 기대해볼 만한 작은 가능성이라도 생길 거야.”

그때 쯤이면 페더러의 피지컬이 제법 하락하게 되고 반대로 바브린카는 기량이 절정에 달하니 충분히 대역전극이 일어날 수도 있다.

물론 지금은 2010년이라 그런 가정이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말이다.

‘페더러는 우리가 롤랑에서 붙을 일이 없다는 걸 대진표를 통해 미리 알고 있었구나.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

비등한 실력의 경쟁자끼리 훈련을 붙여 놓는 게 조금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이러면 어느 정도 상황이 납득이 되었다.

아마 자신이 있는 한 바브린카가 절대 4강에 진출하지 못한다고 생각한 것이겠지.

바브린카의 자존심을 생각해서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머리가 조금이라도 있는 선수라면 시간이 조금 지나면 페더러의 뜻을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오만한 행동이라도 페더러가 하니 당연한 것 같네······.’

엄청난 변수가 생기지 않는 이상 현실로 이뤄질 것 같아서 별로 반감도 생기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커리어를 생각하면 이 정도는 당연하다는 생각 뿐이다.

저벅저벅.

준비를 끝내고 클레이 코트 안으로 들어가는 선수들.

지혁은 주황빛을 띄는 흙바닥을 밟자마자 느껴지는 감각에 짧게 감탄을 토해냈다.

‘와, 이건 앙투카잖아. 돈을 정말로 많이 투자했나 보네.’

원래 사용하던 훈련장과 코트의 재질이 확실하게 달라서인지 이곳의 시설은 메이저 대회의 메인 코트에서 서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아마 페더러는 의도적으로 자신의 개인 코트를 롤랑의 환경과 동일하게 맞춘 모양이다.

앙투카는 구운 벽돌을 분쇄해서 만든 흙이라 비용이 상당히 많이 들었을 텐데 과연 세계 최고의 선수에게 어울리는 시설이다.

‘얼마나 돈이 들어갔을까. 나도 이런 장소를 준비해두면 투어를 다니는 동안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일 년에 개최되는 메이저 대회들 중 클레이 코트를 채택한 곳이 대략 1/3인데다가 모두 유럽에서 개최되니 실용성도 충분하다.

매번 원정을 올 때마다 연습 코트를 바꿔가며 이동할 필요도 없을 테니 말이다.

‘그래도 지금 조건으로는 힘들겠지······.’

세세하게 따져볼수록 장점이 계속 나왔지만 지혁은 현실적인 문제로 자신의 욕망을 억눌렀다.

파리에서 개인 훈련장을 만들려면 초기 투자 비용이 아무리 적어도 수십억 원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일 년 동안 거두는 수입의 절반이 넘는 지출인데 그런 과소비를 충동적으로 결정할 수는 없었다.

마침 올해 클레이 대회가 롤랑을 끝으로 종료되니 11월 말 쯤에 다시 고려해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랜드슬램에서 한 번만 우승하면 수백억을 당길 수 있는데······.’

아시아 국적의 테니스 선수들 중 최초라는 프리미엄을 생각하면 몸값이 몇 배는 가볍게 뛰뛸 확률이 높다.

과거 니시코리 케이가 ATP랭킹 4위를 찍고 그해 3천만 달러를 넘게 벌어들였으니 터무니 없는 생각도 아니다.

‘문제는 그게 쉽지 않다는 것이지만······.’

앞으로 10년이라는 기간 동안 빅3를 제외하고 그랜드슬램 우승 트로피를 들 수 있는 건 바브린카, 머레이, 칠리치 뿐이다.

1년에 4번, 총 40번이 넘는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무려 34번을 페나조가 우승했으니 얼마나 테니스계의 실력 편차가 심한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사실상 세 선수가 출전한다고 하면 그 경기는 80%의 확률로 그들이 상금을 가져간다는 뜻이었으니 말이다.

***

“리, 오늘은 이미 연습 경기를 한 번 했으니까 격한 훈련은 되도록 자제하자.”

“힘을 빼고 스트로크만 점검하자는 소리인가요?”

페더러의 충고를 듣고 지혁이 질문을 하자 갑자기 불편한 목소리로 누군가 끼어 들었다.

“대회 전에 무리를 하면서 컨디션을 깎아먹는 건 아마추어나 하는 행동이야. 의욕만 앞서는 루키들이 많이 저지르는 실수지.”

의아한 얼굴로 상대를 확인하니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브린카였다.

분위기가 날카로워 보이는 게 아무래도 그는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다.

아마 불청객으로 인해 방해를 받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렇겠지.

“음······. 스탠이 표현이 조금 강하긴 하지만 내가 전하려던 의도와 거의 비슷해.”

“네. 무슨 말인지 알고 있어요. 어차피 저도 적당하게 하려고 했어요.”

“다행이네. 그럼 시작하자.”

훈련은 선수들의 숫자가 맞지 않아서 지혁과 바브린카가 먼저하기로 했다.

3명이 전부 올라갈 수도 있었지만 스트로크 역량이 떨어지는 코치들도 아니고 그런 건 별로 효용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얼마나 실력을 늘었는지 볼까. 나달을 이기고 마이애미 오픈에서 우승한 게 정말 순수한 실력인지 궁금한 걸.”

“하하. 제 랭킹이 그냥 올라간 게 아니라는 걸 직접 확인해보면 알게 될 거예요. 그동안 꽤 열심히 했거든요.”

“자신만만한 걸? 실망시키지나 말라고. 골든 보이. 페더러와 경기를 하고 왔다고 뒤늦게 변명해도 소용없을 거야.”

“그런 일은 절대 없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예요.”

코트 위에서 흐르는 미묘한 신경전에 이상한 기류를 감지한 것인지 페더러가 혀를 차며 한마디 한다.

미리 주의를 단단히 줬음에도 진심으로 붙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서로 도움을 주기 위해 데려왔는데 이러면 의도와 완전히 퇴색된다.

이 기세대로 흘러간다면 기량이 상승하기는커녕 전부 컨디션만 나빠질 테니 말이다.

“두 사람 모두 경기를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잊지 마. 오늘은 랠리를 할 거니까 진지하게 붙으려면 나중에 하도록 해. 너희들이 뭐라고 하든 내일이면 얼마든지 자리를 마련해줄 거야.”

“······알았어요.”

“뭐, 아직 시간이 충분히 남아있으니 그래도 되겠죠.”

결국 은근슬쩍 실력을 겨뤄볼 생각이었던 두 사람의 계획은 무산이 되었다.

페더러가 저렇게까지 말했는데 무시하기는 힘들어서였다.

탕! 탕! 탕!

가볍게 시작한 지혁과 바브린카의 랠리.

같은 한 손 백핸드를 사용하는 선수들 답게 스트로크를 주고받는 광경은 마치 페더러와 했을 때와 거의 비슷했다.

평범한 탑랭커들이 대결했을 때와 샷의 각도가 완전히 달랐다는 뜻이다.

물론 상대방이 쓸데없는 풋워크를 하지 않게 정면으로만 날아가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코치들의 눈을 휘둥그레 만들기는 충분했다.

“바브린카는 여전히 엄청난 백핸드를 가지고 있구나. 다른 것은 몰라도 저것 하나만은 빅3와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을 거야.”

“그의 백핸드는 파워와 컨트롤이 뛰어나기로 유명하잖아. 그를 상대했던 선수들이 역사상 최강의 백핸드라는 평가를 내렸을 정도인데 당연하지.”

“저 선수는 멘탈이랑 기복만 제대로 유지하면 랭킹이 최소한 10위는 더 올라갈 수 있을 텐데 어째서 아직도 20위대에 머무르고 있는 거지. 지혁이랑 거의 비등하게 붙을 수 있는 실력으로 아직도 24위라니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아.”

“네가 말한 대로 저런 모습을 매일 보여주지 못하니까 그렇지. 어떨 때는 50위, 60위 밖에 되지 않는 탑랭커들에게도 지는 경우도 많잖아.”

코치들의 말대로 바브린카는 경기를 보는 사람이 어이가 없을 정도로 기복이 엄청나게 심했다.

어떨 때는 70, 80위의 선수들과 비슷한 실력을 보여주다가 컨디션이 좋은 날에는 빅3들이라도 절대 만만하게 보지 못할 만큼 압도적인 경기력을 발휘하기도 했던 것이다.

턱!

네트 상단에 걸려 떨어지는 지혁의 스트로크.

전력을 다하는 것이 아니었음에도 먼저 실책이 나오자 코트 위에 있던 선수들의 표정이 빠르게 희비가 갈렸다.

누구의 실력이 우위를 보이고 있는지 명백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역시 오늘은 바브린카의 그 날인가 모양이네.”

“그러면 이기기 힘들지. 그나마 정규 경기가 아닌 게 다행이네 저런 컨디션의 바브린카를 롤랑에서 만났으면 끔찍했을 거야.”

“그래. 재수 없으면 5시간이 넘는 경기가 다시 재연될 수도 있었겠지. 이번에는 쿼터가 달라서 다행이네.”

코치들은 복불복에 당첨된 게 오늘이라서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랠리를 할 때 이런 상황이 닥친 것이 오히려 액땜이 되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쿵!

이번에는 베이스라인을 한 뼘 차이로 벗어나는 스트로크가 나왔다.

지혁은 페더러를 상대할 때보다 더 심한 압박감에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솔직히 지금 시기의 바브린카가 이런 실력을 가지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몇 년 뒤라면 모르겠지만 현재는 승패를 예측하기 힘들 정도의 맞수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랭킹 10위와 24위는 그만한 차이가 있어서 그렇게 판단한 것이다.

‘······장난이 아니잖아? 호주 오픈에서 만났을 때보다 더 잘하는 것 같아.’

아무리 기복이 들쭉날쭉하다고해도 이게 가능한 일이 맞을까.

직접 몸으로 체험을 하고 있으면서 믿기지 않았다.

‘이 정도면 송가랑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은 실력인데.’

현재 랭킹이 지혁보다 한 단계 높은 9위의 선수와 동급의 경기력을 발휘할 수 있다니.

바브린카가 아무리 대기만성형의 천재라지만 역시 재능은 숨길 수 없는 모양이다.

차후 빅3를 제외하고 머레이와 투톱을 다투는 선수는 역시 남들과 다른 면모가 있었다.

‘내일 연습 경기에서도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 있으면 재밌겠네.’

지혁은 마치 제4의 빅3를 상대하는 압박감에 미소를 지었다.

미래에서 그랜드슬램 3회 우승을 했던 전성기 시절의 바브린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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