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역대급 테니스 천재가 되었다-82화 (82/241)

82화. 롤랑 가로스

시간이 지나 주변이 제법 어두워지자 지혁과 선수들은 마침내 랠리를 마무리지으며 하나, 둘씩 코트 밖으로 걸어나왔다.

야간을 대비해서 조명 시설이 잘 준비되어 있어서 만약 원한다면 얼마든지 훈련을 지속할 수 있었지만 괜히 첫날부터 무리할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시간도 넉넉하게 남아있으니 차근차근 감각을 다듬어가며 남은 기간을 보내면 된다.

“여기요.”

그렇게 선수들이 벤치에서 라켓과 밴드 등의 장비들을 벗고 있을 때.

아까 전까지만 해도 없었던 얇은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며 수건이 하나씩 건네졌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상대를 확인하는 지혁.

‘누구지? 페더러와 바브린카는 여자 코치가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들 뿐만 아니라 다른 탑랭커들도 굳이 실력이 월등히 뛰어난 남자 코치를 대신해 경쟁력이 떨어지는 여성 코치들을 선호하지 않았다.

오죽하면 여자 탑랭커들도 같은 성별의 코치가 아니라 남자 선출들을 훈련 파트너로 데리고 다니겠는가.

이런 업계 상황은 생물학적으로 기량 차이가 너무 나서 어쩔 수 없이 생긴 일이었다.

공식 경기에서 남자 100~200위와 여자 1~10위가 붙는다고 가정하면 99%의 확률로 누가 이길지 뻔한데 상대적으로 실력이 떨어지는 코치를 고용하는 선수가 없는 게 당연하다.

“고마워. 미르카.”

‘아! 페더러의 아내였구나. 어쩐지 눈에 익은 얼굴이었어.’

이름을 듣고 나서야 갑자기 훈련장에 불쑥 나타난 여자의 정체를 알게 된 지혁.

직접 실물을 보는 건 오랜만이라 눈치채는 게 늦었다.

그랜드슬램 결승전을 볼 때마다 항상 그녀의 얼굴이 방송 화면에서 접혔었는데 말이다.

‘소문대로 투어를 같이 다니나 보네. 롤랑 가로스까지 동행하다니 쉽지 않을 텐데, 역시 대단한 사람들이야.’

미디어를 통해 알려진 바에 따르면 페더러의 아내, 미르카는 스위스 주니어 대회의 우승자이자 여자 ATP랭킹 76위까지 찍었던 프로 테니스 선수였다.

그 경험을 살려 남편의 투어 매니저와 스폰서 계약, 인터뷰 관리까지 전담해서 맡고 있다고 들었는데 정말로 365일을 붙어 다니는 모양이다.

‘저런 헌신적인 행동이 뒷받침되었기에 지금의 황제가 만들어진 거겠지.’

지혁은 꼼꼼하게 자신의 남편을 챙기는 미르카의 모습에 내심 감탄했다.

다른 스포츠 스타들과 다르게 어째서 페더러가 20년이 넘는 결혼 기간 동안 단 한 번도 외도를 하지 않고 항상 애처가로 불렸는지 알만하다.

“로저, 골든 보이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데려온 거예요? 계획에 없던 일이잖아요.”

“좋은 훈련 상대가 될 것 같아서.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리의 실력이 훨씬 뛰어나더라고.”

“4강에서 경기를 할 수도 있는데 정말 괜찮겠어요? 당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위험할 수 있어요.”

“클레이에서 우승하려면 이 정도 모험은 해야지. 어차피 결승에서 나달과 붙게 되는 건 이미 결정된 거나 마찬가지잖아.”

“······최근 클레이 코트에서 열렸던 세 번의 마스터즈 대회를 나달이 전부 휩쓸었으니 저번처럼 요행을 바라는 건 어렵겠죠. 저도 롤랑에서 그가 탈락하는 건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아요. 작년에 나달이 무릎 부상으로 16강에서 탈락하지 않았다면 당신이 우승하기는 힘들었을 테니 말이에요.”

“그래. 그 일이 아니었더라면 나달은 높은 확률로 5연패라는 대기록을 달성했을 거야.”

미르카는 전직 탑랭커답게 짧은 대화만으로도 페더러가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은 의도를 금방 이해했다.

무려 9년 동안 투어를 같이 다녔기에 남편의 플레이 스타일과 전문가들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페더러의 약점을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화제의 당사였던 만큼 두 사람이 말하는 걸 옆에서 듣고 있었던 지혁도 숨겨진 의미를 간파할 수 있었다.

‘나달을 이기기 위해서 탑스핀 스트로크를 사전에 경험해보고 싶었던 건가.’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역시 개인 코트에 초대한 건 100% 순수한 의도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긴 이런 배경이 없었더라면 애초에 일면식도 없는 선수의 제안만으로 연습 경기가 어떻게 성사되었겠는가.

클레이 코트를 한정으로 했을 때 지혁의 효용이 극대화되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서로에게 득이 된다고 하니까 마음이 편하네. 오히려 이런 관계가 더 좋지.’

너무 한 쪽에게 쏠린 균형은 언젠가 파탄이 날 수도 있다.

그럴 바엔 이렇게 이득을 주고받는 게 훨씬 낫다.

적어도 상대방의 호의에만 기댈 필요가 없을 테니 말이다.

‘나를 안중에도 두지 않는 걸 보면 약간 쓸씁하긴 하네.’

만약 페더러가 지혁을 맞수로 생각했다면 이런 방법을 사용하진 않았을 것이다.

며칠 동안 전력을 노출하고도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해서 이런 선택을 했겠지.

‘이런 푸대접은 꽤 오랜만이네 상위급 대회로 처음 올라갔을 때를 제외하면 무시를 받은 적이 거의 없었는데. 뭐, 이것도 생각해보면 경기에서 승리할 가능성을 조금이나마 더 높여주게 될 테니 결과적으로 좋은 일인가.’

비록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지혁은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에겐 지금 감정을 경기 당일 충분히 갚아줄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같은 생각으로 대결에 임한다면 페더러는 공식 경기에서 무조건 낭패를 당하게 될 것이다.

이 개월 전 나달이 마이애미 오픈 8강에서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훈련이 끝나고 지혁과 코치들은 페더러의 제안으로 저녁까지 제대로 대접받고 오후 8시쯤에 숙소로 돌아갔다

굳이 늦은 시간까지 붙잡아 놓지 않은 건 서로의 신체 리듬과 일정이 깨질 것을 염려해서였다.

낮처럼 육체적인 훈련을 하지 않더라도 전략을 연구한다던가 코치들과 상대 선수를 분석하는 시간을 생각하면 여유가 그리 많은 것도 아니었다.

***

다음 날 오전, 페더러의 개인 훈련장.

지혁과 바브린카는 어제 약속했던 시간보다 일찍 도착해서 몸을 풀고 있었다.

어제와 다르게 왠지 모를 긴장감이 흐르는 분위기에 코트 주변의 코치들은 목소리를 낮춘 채 소곤거렸다.

잠시 후 시작할 연습 경기가 그들의 호기심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자신이 전담하는 선수들의 자존심이 걸려있는 대결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제 대회도 얼마 남지 않아서 지혁이가 너무 진지하게 하면 안 되는데······. 이제 와서 우리가 주의를 줘도 소용없겠지?”

“아무래도 자존심이 걸려있는 문제니까. 내가 생각하기엔 둘 다 조금도 양보하지 않을 것 같아.”

“기왕 이렇게 된 거 결과라도 좋아야 하는데 괜히 기분을 망친 채로 대회를 시작하게 되면 최악이잖아. 그래도 객관적으로 실력을 비교했을 때 유리한 게 지혁이라서 다행이야.”

“문제는 바브린카가 어제 보여줬던 실력을 그대로 발휘할 수 있느냐겠지.”

“설마 이틀 연속으로 그런 일이 일어나겠겠어. 특별한 날이 그렇게 쉽게 찾아온다면 아직도 그가 24위에 머무르진 않았겠지. 대부분의 상황에서 랭킹은 거짓말을 하지 않잖아.”

동료의 추측을 듣고 말도 안 된다며 고개를 젓는 지혁의 코치.

하지만 그런 행동과 다르게 그의 표정은 미세하게 굳어있었다.

경기에 임하는 선수들의 분위기가 공식 경기와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진지해서 뭔가 사건이 터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지혁과 바브린카는 오늘 훈련을 연습 경기로 시작할 생각인지 네트 앞으로 다가와 서비스게임의 순서를 정하기 시작했다.

1세트 경기라서 선공권이 꽤나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먼저 스코어를 가져가는 사람이 기세를 가져가는 경우가 많아서 유리할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팅!

동전을 허공으로 던지는 체어 엠파이어 역할을 맡은 코치.

코트에 떨어진 동전은 바닥을 몇 번이나 튕기더니 결국 뒷면이 나왔다.

“컴온!”

훈련장을 울리는 바브린카의 짧은 환호성.

그것만 봐도 누가 선공을 가져가게 되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플레이어 레디. 서브 바브린카.]

지혁은 베이스라인으로 터벅터벅 걸어가 상체를 낮추며 단단히 마음의 준비를 했다.

곧 닥칠 상황이 절대 만만하지 않을 거라고 느낌이 들어서였다.

물론 어제 상대했던 페더러에게 못 미치겠지만 그것만으로도 위기감은 충분하다.

‘그나마 어제 페더러의 고속 서브를 미리 경험해 본 게 행운이네.’

200km가 넘는 타구에 적응이 전혀 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경기가 시작했다면 제법 어려운 상황이 되었을 것이다.

바브린카는 182cm라는 테니스 선수치고 작은 체구에도 최고 속도 220km까지 서브를 칠 수 있으니 말이다.

쾅!!

눈 깜짝할 사이에 T존을 강타하는 공.

바운드 후 속도가 느려지는 클레이 코트의 특성 덕분인지 지혁은 시작부터 에이스가 나오는 걸 간신히 막을 수 있었다.

허무하게 점수를 잃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제법 괜찮은 출발이다.

초반에는 탐색전을 하려는 생각이 서로 맞았는지 첫 포인트는 좀처럼 위닝샷이 나오지 않고 스트로크의 숫자가 빠르게 올라갔다.

10구. 15구. 20구.

정상적인 랠리에서 나오지 않은 횟수에 근접하게 되자 이제 충분하다는 듯이 다운 더 라인이 지혁의 사이드라인으로 떨어졌다.

바브린카가 먼저 공격적인 포지션을 잡은 것이다.

촤아악-

갑작스럽게 상승한 스트로크의 위력에 흙먼지를 날리며 코트 위를 슬라이딩하는 지혁.

제대로 된 샷을 할 여력이 없어서 아슬아슬하게 라켓에 맞춘 로브는 커다란 초승달을 그리며 네트 위를 넘어갔다.

비록 이걸로 위닝샷을 넣는 게 불가능하더라도 최대한 시간을 끈다면 다음 상황을 모면할 수 있다.

지혁은 요즘 들어 플레이 스타일이 올라운더로 굳어졌지만 과거에 수비형 베이스라이너로 활동하며 대부분의 프로 시절을 보냈기에 이런 전략이 크게 어색하진 않았다.

지금처럼 끈질기게 버티다 보면 결국 언젠가 기회가 생길 것이다.

운이 좋다면 바브린카가 먼저 실책을 할 수도 있고 말이다.

턱!

[러브 피프틴.]

“휘유. 둘 다 장난이 아닌데?”

“조금 허무하게 끝났네. 저기서 네트를 저지를 줄이야. 바브린카의 실력과 맞지 않는 플레이였어.”

“뭔 짓을 해도 위닝샷이 들어가지 않으니까 조바심이 들었겠지. 그러다 보니 동작이 자연스럽게 커지고 라켓 컨트롤이 흔들렸을 거야.”

“바브린카는 저 멘탈을 단단하게 만들기만 하면 금방 랭킹을 올릴 수 있을 텐데 매번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네. 하긴 저러니 저 정도 실력을 가지고도 아직 20위 부근에서 정체하고 있는 거겠지”

“타고난 성격을 갑자기 바꾸는 게 쉬울 리가 없잖아. 그가 한 단계 도약하려면 최소한 몇 년은 담금질이 필요해. 힘들겠지만 부딪치고 깨지면서 성장하는 수밖에 없어.”

“그에 비해 우리 지혁이는 불가사의한 녀석이란 말이야. 이제 데뷔를 한 지 14개월이 조금 넘었는데 저 침착함은 어디서 나오는 거지?”

“솔직히 저 녀석은 나도 잘 모르겠어. 워낙 행보 하나하나가 전설적이라 상식이 통하지 않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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