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롤랑 가로스
[포티 서티.]
바브린카는 먼저 서비스게임을 시작했음에도 포인트를 무려 두 번이나 허용했다.
보통 서브가 강력한 선수들이 경기 초반에 쉽게 스코어를 얻는 것과 매우 상반된 상황이었다.
아무래도 클레이 코트라는 원인도 있었지만 오늘따라 지혁의 리턴이 워낙 좋았기 때문이다.
쿵!!
[······게임 바브린카!]
라인에 걸친 바운드 흔적을 잠깐 살펴보더니 결국 들어갔다고 판단한 체어 엠파이어.
상당히 애매한 위치라 지혁의 반발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바브린카도 그걸 아는지 곧바로 코트 체인지를 하지 않고 어떻게 행동할지 지켜봤다.
스으윽-
‘정확하게 확인할 방법도 없으니까 그냥 넘어가자. 어차피 좋은 결과가 나오지도 않을 거야.’
오른발로 베이스라인 위의 흔적을 지워버리는 지혁.
클레이 코트에서 경기할 때 이런 제스쳐는 체어의 판정에 승복하겠다는 뜻이었다.
그 모습에 바브린카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네트 쪽으로 걸어왔다.
일단 위험한 순간을 넘겼다고 생각한 것이다.
[서브 리.]
그렇게 선수들이 자리를 바꾸자 드디어 지혁에게 공격권이 넘어오게 되었다.
이제 방금 전 서비스게임에서 당했던 수모를 되돌려줄 차례다.
‘그래도 체감상 어제보단 나은 것 같네. 어제 상대했던 바브린카는 정말 상대하기 힘들었는데 말이야.’
스트로크의 정확도도 어제와 비교하면 훨씬 떨어졌다.
하여간 참 재미있는 선수다.
하루 간격으로 실력의 편차가 이렇게 심하다니 말이다.
아마 어제가 특별한 날이었을 뿐이고 이게 평소 실력이겠지.
“흐읍!”
쾅!!
지혁은 습관처럼 간단한 루틴을 실행한 뒤에 곧바로 경기를 시작했다.
이미 서브와 스트로크를 몇 번이나 받은 후라서 몸은 이미 어느 정도 풀려 있었다.
[피프틴 러브.]
“오! T존에 에이스가 제대로 들어갔어. 아무리 바브린카라도 저 정도 수준의 서브는 받기 어려운 모양이네.”
“오늘 컨디션이 좋은 건가? 평소보다 컨트롤이 좋아진 것 같아. 원래 지혁이의 서브가 정교한 편이긴 했지만 10cm 단위로 조절하는 건 거의 불가능했잖아.”
“라켓에 임팩트가 잘 된 거겠지. 아마 의도적으로 라인을 맞춘 건 아닐 거야. 페더러도 아닌데 그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쾅!!
[서티 러브.]
정확하게 똑같은 위치로 에이스가 다시 성공하자 말문이 턱 막힌 코치들.
그들은 210km가 넘는 고속 서브를 가로, 세로 5cm안에 넣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너무나 잘 알았기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연속으로 저런 샷을 보게 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쉽게 끝날 수도 있겠는 걸. 저런 서브를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게 가능하다면 정상급 선수가 아니고서야 대적할만한 선수가 없어.”
“그래. 어제 경험했던 페더러의 서브와 거의 필적하는 것 같아.”
비록 페더러의 서브 기록은 230km여서 순순하게 속도만으로 탑 10안에 들어가지는 못했다.
하지만 지난 10년 동안 테니스 팬들과 전문가들은 현역 선수들 중 서브가 가장 뛰어난 선수를 페더러로 뽑길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걸 보면 단순하게 전광판에 찍히는 숫자만으로는 최고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말로 중요한 건 상대가 예측할 수 없는 서브를 자신이 의도한 위치에 정확하게 넣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오랜만에 느껴지는 감각인데······. 지금이라면 누구라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야.’
지혁은 오른손에 남아있는 여운을 즐기면서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한 가지 아쉬운 건 이런 날이 롤랑에서 온 게 아니라는 거다.
상위 라운드로 진출할 확률이 대략 50~60%인 8강이나 페더러를 상대할 때 이랬으면 좋았을 텐데.
이 상황을 기뻐해야 할지 조금 애매하다.
단지 미신에 불과하지만 바브린카가 그랬던 것처럼 운을 당겨쓰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복잡한 건 우선 이기고 생각해보자.’
집중을 방해하는 잡생각을 지워버리기 위해 고개를 좌우로 흔들자 정신이 돌아왔다.
아무리 이길 자신이 있다고 해도 바브린카에게 전력을 다하지 않고 승리하는 건 힘들다.
며칠 후에 있을 일은 경기가 끝나고 여유롭게 생각해도 될 것이다.
[게임 리.]
결국 러브 게임으로 서비스게임을 마무리하게 된 지혁.
그 결과에 훈련장의 분위기는 완벽하게 희비가 갈렸다.
코치들은 테니스를 업으로 하는 전문가답게 직감적으로 남은 경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예상이 됐던 것이다.
실제로 바브린카의 전담 코치들의 얼굴은 벌써부터 어두웠다.
아직 스코어가 1-1임에도 오늘 경기가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골든 보이의 실력이 이 정도였나? 어쩐지 페더러가 극찬을 하더라니, 그저 립서비스로 했던 말이 아니었나 보네.”
“지금 같은 경기력이라면 나달을 꺾은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돼. 스탠이 컨디션이 좋지 않은 것도 아닌데 시작부터 러브 게임을 당했잖아.”
“다음 경기에서 만났을 때 오늘처럼 낭패를 당하지 않으려면 랭킹 10위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걸 완전히 바꿔야겠어.”
“그래. 이제 유망주라고 부르기도 어렵겠어. 골든 보이는 랭킹뿐만 아니라 실력으로도 탑10 안에 충분히 들어가는 선수가 된 것 같네.”
코치들이 예측한 대로 지혁은 여세를 몰아 다음 게임을 간단하게 브레이크 해버렸다.
바브린카가 한 번 밀리기 시작하더니 그 후로 쉽게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서였다.
그는 몇 년 뒤 인간계 최강이라고 불리는 탑랭커들 중 수좌를 차지할 만큼 재능이 풍부한 선수였지만 아직 충분히 여물지 못한 탓에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종이처럼 가벼운 멘탈과 한 번 말리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하락하는 기량을 아직까지 극복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
[게임 세트, 세트 리 6-1.]
30분도 되지 않는 시간으로 연습 경기를 끝내버린 지혁.
마치 그랜드슬램에서 랭킹이 50~100위 이상 차이나는 선수들이 붙은 스코어가 나오자 훈련장은 적막한 침묵이 잠깐 맴돌았다.
지혁이 순수한 기량으로 바브린카를 넘었다는 게 확실해졌기 때문이다.
코치들은 승부가 정해지더라도 이런 점수 차가 나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무난하게 6-3, 6-4이거나 최악의 경우에도 6-2가 한계치라고 생각한 것이다.
‘내가 실력이 많이 상승하긴 했구나······.’
솔직히 지혁은 스무 명 남짓한 상위 랭커들 중 자신의 위치를 중간 정도라고 믿고 있었다.
최근 성적이 정체하고 있는 데다가 슬슬 상대 전적이 하락할 기미가 보여서 밑천이 대부분 드러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너무 소극적인 판단이었던 모양이다.
‘하긴 최근 마스터즈에서 만났던 선수들이 하나같이 무시무시하기는 했지.’
언제라도 그랜드슬램을 우승하는 게 이상하지 않은 네임드 선수들을 기준으로 생각했으니 이런 착각을 할 법도 했다.
빅3가 등장하지만 않았더라도 그들은 한 세대를 정복하고도 남았을 테니 말이다.
저벅저벅.
경기가 마무리되자 네트 앞으로 걸어가서 악수를 하는 지혁과 바브린카.
충격적인 결과가 나와서인지 두 사람 사이에는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라이벌이라고 생각했던 선수에게 도저히 변명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패배했는데 당연히 아무렇지 않게 행동할 수 있을 리 없다.
자연스럽게 대화가 뚝 끊기자 경기가 시작했을 때부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던 페더러가 딱딱한 분위기를 풀기 위해 시기적절하게 개입했다.
훈련장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담담한 표정인 걸 보니 이런 결과가 나올 줄 알고 있었나 보다.
그는 어제 지혁을 직접 상대하면서 숨겨진 기량을 정확하게 파악한 것이다.
“스탠, 단지 연습 경기일 뿐이니까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 너도 잘 알고 있겠지만 실제 경기는 어떻게 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잖아. 만약 그랜드슬램에서 재경기를 하게 된다면 그날 패배하게 되는 건 리가 될 수도 있어.”
“······네. 알고 있어요. 오늘은 제가 컨디션이 나빠서 이만 들어갈게요. 갑자기 너무 피곤하네요.”
페더러가 나름 위로를 했지만 별로 소용이 없는지 바브린카는 그 말을 끝으로 훈련장을 나갔다.
누군가에게 쫓기는 것처럼 걸음이 빠른 게 잠시도 여기 있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낮 동안은 여기서 일정이 있는 걸로 아는데 훈련을 건너뛰려고 하나 보네.’
지혁은 저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갑자기 사라진 바브린카에게 불만을 조금도 표현하지 않았다.
아마추어나 루키가 아닌 이상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고작 이 정도로 무너질 선수였으면 여기까지 올라오지도 못했다.
몇 년 후의 미래에 머레이와 동급의 실력을 가지지도 못했을 테고 말이다.
“연습 경기도 전부 끝냈으니 이제 훈련이나 할까요?”
마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마냥 제안을 하는 지혁.
페더러는 그 배려를 알아차린 것인지 훈련장의 입구 쪽으로 향해있던 고개를 돌리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 어제 얘기했던 대로 서로가 원하는 플레이 스타일을 맞춰주면서 연습을 하자. 방금 경기가 끝났으니 좀 쉬고 있어. 20분 후에 시작하면 되겠지?”
“네. 충분해요.”
선수들이 먼저 나서서 딱딱한 분위기를 풀어버리니 코치들도 그제야 긴장을 풀었다.
솔직히 그들은 오늘 하루를 통째로 날리는 상황도 각오하고 있었다.
페이를 받으며 고용되어 있는 입장에서 페더러와 지혁이 하기 싫다고 하면 딱히 통제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걱정할 필요도 없이 알아서 연습이 착착 진행되자 조용했던 훈련장에서도 대화 소리가 조금씩 들리기 시작했다.
“골든 보이가 고작 4개월 만에 바브린카의 실력을 넘었구만. 정말 무서운 재능이야.”
“두 선수는 호주 오픈에서 5세트가 넘는 접전을 치렀는데 이제 그런 장면은 보기 힘들겠네요. 벌써 실력 차이가 제법 있으니까요.”
“맞아. 성장 속도가 달라서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격차가 더 벌어지겠지.”
“이대로라면 아무리 늦어도 2년 안에 랭킹이 크게 요동치겠는데요. 뭐, 변화 없이 고정되어 있는 것보다 훨씬 낫지만 말이에요. 그나저나 리가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아요?”
“빅3 바로 밑까진 무난하게 도달하지 않겠나?”
“적어도 머레이급 선수가 된다는 뜻이군요? 역시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페더러, 나달, 조코비치를 뛰어넘진 못하겠죠? 그들은 역사상 최강의 선수들이잖아요.”
“단순하게 재능의 크기보다 나이대가 맞지 않는데 어쩌겠나. 페더러만 해도 골든 보이와 무려 12살 차이야. 테니스 선수들의 전성기인 20대 중반이 되려면 앞으로 6~7년은 더 지나야 하는데 그때가 되면 지금 랭킹 10위 안에 포함된 대부분의 탑랭커들은 은퇴를 해서 세대가 교체되어 있을 거야.”
“그래도 결국 정상을 밟기는 하겠네요. 부상을 당하지 않는다고 치면 적어도 14~15년은 프로 활동을 하게 될 테니까 말이에요.”
“하지만 그 가치가 많이 떨어지겠지. 누가 뭐라고 해도 황금기는 지금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