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롤랑 가로스
롤랑까지 남은 며칠의 시간 동안 바브린카는 연습 경기에서 패배했던 충격 탓인지 기가 죽은 모습으로 훈련에 임했다.
바쁜 투어 일정과 호주 오픈 이후로 따로 대결이 성사된 적이 없어서 완전히 잊고 있었지만 연습 경기에서 패배하고 나니 지혁의 어린 나이가 더욱 무겁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솔직히 바브린카 정도만 되어도 천재 중의 천재라고 불리기 전혀 부족하지 않다.
다른 탑랭커들에게 열등감을 느낄 수준이 절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런 바브린카조차도 지혁을 상대로는 거대한 재능의 격차를 느꼈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훈련을 했어. 오늘이 마지막이라니 아쉽네······.’
지혁은 마음 같아서 한 달쯤 시간을 내어서 일정을 최대한 늘리고 싶었다.
이번 기회가 아니라면 랭킹 1위와 24위를 훈련 파트너로 둘 수 있는 호사가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몰랐다.
하지만 이틀 뒤에 롤랑 본선이 시작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 바람은 상상만으로 남겨두어야 할 것 같다.
앞으로 5세트 경기를 하느라 체력 관리도 벅찰 텐데 상식적으로 여유를 부리며 연습에 시간을 투자할 탑랭커들이 어디 있겠는가.
그건 빅3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다.
쿵!!
연습 경기의 마지막 포인트를 결정짓는 지혁의 포핸드 스트로크.
그것을 끝으로 페더러가 주관했던 훈련은 마침내 종료되었다.
이제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 선수들은 하루 동안 외부 활동을 하지 않고 휴식에 들어가게 것이다.
“리, 그동안 고마웠어.”
“저한테도 도움이 많이 됐는 걸요. 다음에도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불러주세요. 페더러와 하는 연습은 무조건 환영이니까요.”
“하하하. 그래. 올해 클레이 대회는 이것으로 끝이니까 다음 롤랑 때 다시 부탁할게.”
지혁과 페더러는 이번 훈련으로 얻은 것들이 제법 많았기에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서로 가장 경계하는 플레이를 며칠 동안 반복적으로 경험하면서 어느 때보다 대비를 단단히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금 상태라면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어이없게 패배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비록 근본적인 약점을 해결하진 못했지만 실전 감각이 절정에 달해있었으니 말이다.
“너라면 4강까지 올라올 수 있겠지? 공식 경기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가 되는 걸.”
“2쿼터에서 이겨야 할 경쟁자들이 너무 쟁쟁해서 장담할 수 없어요. 미하일 유즈니, 앤디 머레이, 토마스 베르디흐가 버티고 있거든요.”
“음······. 다른 선수들은 괜찮은데 머레이를 상대해야 한다면 내가 속한 1쿼터보다 난이도가 높겠구나.”
“글쎄요. 페더러도 8강에서 로빈 쇠델링과 만날 확률이 높잖아요.”
페더러가 어렵지 않다는 듯이 말했지만 쇠델링은 작년 롤랑 가로스에서 나달을 꺾고 준우승을 차지했을 정도로 클레이에 특화된 선수였다.
게다가 이번 대회에서 5번 시드를 받을 정도로 랭킹이 높아서 무시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음? 혹시 작년 롤랑 결승을 보지 않은 거야?”
“아······.”
작년이라는 페더러의 대답에 지혁은 드디어 그의 정체 모를 자신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주 잠깐 잊고 있었는데 쇠델링이 준우승으로 그치게 한 장본인이 눈앞에 있는 이 남자였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작년 롤랑 가로스 결승전에서 3-0으로 간단하게 우승했었죠. 그것도 압도적인 스코어로요. 그러면 걱정할 필요 없겠네요.”
“무려 4년 동안 나달에게 시달려서 쇠델링은 아무것도 아니었거든. 분명 뛰어난 선수는 맞지만 내가 경계해야 할 만한 선수는 아니야.”
이미 정점을 찍고 그 자리를 거의 10년이나 유지하고 있는 테니스의 황제라서 할 수 있는 발언이다.
사실 메이저 대회의 전적을 보면 근거가 없는 자신감도 아니다.
페더러는 나달과 조코비치를 제외하면 그랜드슬램에서 무려 90%가 넘는 승률을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 배경을 생각했을 때 사실상 그가 롤랑에서 광탈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이날을 위해서 마스터즈에서도 힘을 아낀 것이니 말이다.
“머레이가 제법 잘하긴 해도 리, 네가 분발한다면 4강에 진출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거야. 내가 직접 경험해본 바로 너희 둘의 실력은 크게 차이 나지 않았거든.”
“정말 그렇게 됐으면 좋겠네요.”
ATP랭킹 4위의 머레이와 동급의 취급에 지혁의 표정이 묘해졌다.
단순히 립서비스인지 아니면 정말 진심으로 한 말인지 판단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한동안 대화를 하다가 각자의 호텔로 돌아갔다.
마지막 날을 기념해서 뭔가 하는 것보다 이틀 뒤의 본선 경기를 위해 휴식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서였다.
***
롤랑 가로스 본선 1라운드, 13번 코트.
지혁은 몇 백명 정도되는 관중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며 경기장에 입장했다.
높은 인지도에 비해 소규모 경기장을 배정받게 된 건 아직 128강이라서 그렇다.
초반 라운드에서 랭킹이 높은 선수들은 대진표 전체에 골고루 흩어져 있어서 사람들이 기대할만한 빅 매치가 단 하나도 성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컨디션은 좋은 것 같네. 몸이 평소보다 가벼워,’
역시 하루 동안 푹 쉬며 체력을 회복하길 잘했다.
이 정도면 당장 경기에 들어가도 아무런 문제가 없이 전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짝짝짝짝짝.
갑자기 듬성듬성 들리는 박수 소리.
처음 지혁이 나타났을 때와 비교하면 한참이나 부족한 반응이다.
1라운드에서 상대할 선수가 랭킹 86위밖에 되지 않는 독일 국적의 평범한 탑랭커라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80~120위 부근의 참가자들은 1라운드에서 탈락하는 게 일반적이라 자국의 선수가 아니라면 팬들이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미디어에 노출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다니엘 브랜즈라······. 그리 어렵지는 않겠네.’
딱히 운이 좋게 대진이 잡힌 건 아니다.
가장 낮은 랭킹의 본선 참가자는 120위 밑인 경우도 있었으니 말이다.
‘87년생이면 22살이나 23살인가. 나이에 비해 제법 괜찮은 랭킹이긴 한데······.’
미래에 높은 랭킹으로 만났던 기억이 없는 걸 보니 아무래도 성장이 여기서 멈추는 모양이다.
어렸을 때 높은 ATP랭킹으로 재능을 주목받던 탑랭커가 정체되는 일은 이야깃거리도 되지 않을 만큼 많아서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다.
다니엘 브랜즈뿐만 아니라 지금 랭킹 100위 안에 들어가 있는 선수들도 전부 어렸을 적에 다음 세대의 황제가 될 거라는 기대를 자국의 팬들에게 넘치도록 받았었다.
그런데 그 많은 선수들 중 그랜드슬램은 단 한 번이라도 우승한 사람이 몇 명이나 있던가?
2010년 기준으로 델 포트로 한 명 밖에 없다.
그 쟁쟁한 앤디 머레이, 스타니슬라스 바브린카, 마린 칠리치도 빅3라는 벽에 부딪쳐 몇 번이나 좌절했던 것이다.
새로운 신성이 나올 법하면 매번 페더러, 나달, 조코비치들이 자근자근 밟아버리니 2003~2020년 사이에 활동하는 테니스 프로들 만큼 불운한 사람들도 없었다.
[플레이어 레디. 서브 리.]
브랜즈가 도착하고 얼마 후, 지혁의 서브로 경기가 시작했다.
서로 친분도 없고 말도 통하지 않아서 시간이 지연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관중들과 체어 엠파이어, 볼키즈, 진행 요원들도 다음 라운드에 진출할 선수가 누군지 이미 알고 있었기에 코트 주변의 분위기는 잔잔했다.
선수들의 팽팽한 대결을 볼 수 없을 거라는 걸 모두 잘 알았기 때문이다.
쾅!!
[피프틴 러브.]
[SERVE SPPED 214km/h]
와아아아아!
처음부터 에이스를 얻어내는 지혁의 고속 서브에 환호성을 지르는 관중들.
속도보다 더 인상적인 건 코스와 정확도였지만 전문가가 아닌 팬들에게는 그저 전광판에 찍히는 숫자만으로도 열광했다.
214km의 서브를 칠 수 있는 선수가 탑랭커 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적어서 크게 어필이 되었던 것이다.
[서티 러브.]
[포티 러브.]
[게임 리 1-0. 코트 체인지.]
세 번의 에이스와 한 번의 백핸드 위너로 첫 번째 게임을 끝내버린 지혁.
3분이 약간 넘는 시간 만에 스코어가 넘어가자 브랜즈는 어이가 없는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아무래도 방금 전 서비스게임에서 자신이 무슨 일을 당했는지 제대로 실감이 되지 않는 모양이다.
랭킹과 커리어의 격차가 워낙 커서 아마 이길 수 없다는 것은 코트에 들어오기 전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표정을 보니 그는 베이글 세트와 베이글 매치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하다.
‘이제 위기감이 조금 들었나 보네. 하긴 스포츠 뉴스 일면에 자신이 처참하게 패배하는 모습이 실리는 건 싫겠지.’
그저 1라운드에서 탈락하는 건 아무런 이슈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6-0의 스코어가 만들어지면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될 수밖에 없다.
객관적으로 생각했을 때 6-4나 6-0이나 똑같은 패배라고 해도 팬들에게 전해지는 임팩트가 차원이 달랐으니 말이다.
[플레이어 레디. 서브 브랜즈.]
코트를 교체하고 다시 경기가 시작되기까지 1분.
그 사이 브랜즈의 분위기는 변했다.
아무런 가망이 없다고 생각해서 어딘가 여유로웠던 느낌이 사라진 것이다.
아마 한 게임을 따내기 전까지 지금 모습을 유지할 할듯하다.
그게 마음대로 될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하앗!”
쾅!!
[SERVE SPEED 218km]
196cm의 신장의 브랜즈가 왕관 자세에서 라켓을 역동적으로 휘두르자 곧 무시무시한 서브가 코트 위에 내려 꽂혔다.
촤아악- 퉁!
발을 길게 끌며 리턴에 성공하는 지혁.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브랜즈는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고속 서브를 주 무기로 하는 빅 서버 스타일의 선수에게 스트로크는 가능하면 피하고 싶은 고질적인 약점이었다.
솔직히 브랜즈에게 평균 이상의 랠리 실력이 있었다면 지금처럼 무명일 수가 없었다.
진작 상위권으로 치고 올라와서 한참 전에 지혁과 경쟁을 하고 있었겠지.
‘랭킹 86위가 220km의 서브와 비슷한 수준의 스트로크를 가지고 있을 리 없어. 난타전에 들어가면 결국 승리하는 건 나야.’
탕!! 탕!! 탕!! 탕!!
[러브 피프틴.]
지혁이 예상한 대로 랠리는 고작 6구 만에 끝나버렸다.
코트 좌우의 사이드라인에 3번 정도 번갈아가며 공을 떨어뜨려 주니 상대가 알아서 자멸했기 때문이다.
평균보다 큰 신장 탓에 다리가 느려서 생긴 일이었다.
물론 키가 커도 풋워크가 빠른 선수도 잘 찾아보면 가끔 있었지만 그건 브랜즈에게 해당하는 얘기가 아니었다.
‘마이애미 오픈에서 붙었던 체코의 테니스 영웅, 토마스 베르디흐라면 훨씬 더 나았을 텐데 그와 비교하면 너무 싱거운 상대인 것 같네.’
앤디 로딕처럼 서브 원툴로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는지 기준이 되어주는 선수라서 베르디흐쯤 되면 다니엘 브랜즈의 상위호환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단순하게 속도만 빠르고 컨트롤이 별로라서 이번 경기에서 얻을 게 별로 없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