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롤랑 가로스
[게임 세트. 매치 리 6-2, 6-1, 6-2.]
롤랑 가로스 1라운드 경기는 모든 사람들이 예상했듯이 지혁이 3-0으로 승리하게 되었다.
의외인 점은 6-0, 베이글 세트가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두 선수의 실력 차이를 생각했을 때 적어도 한 번쯤은 나올 법도 했는데 말이다.
짝짝짝짝짝.
관중석에서 들려오는 환호성과 박수 소리.
경기가 싱겁게 끝나서인지 팬들의 반응은 그리 뜨겁지 않았다.
아마 너무 뻔한 결말이라서 그럴 것이다.
“골든 보이가 랭킹이 낮은 선수들에게 유독 강한 모습을 보여준다고 듣긴 했는데 그 말이 사실이었구나. 다니엘 브랜즈가 이 정도로 간단하게 패배할 줄이야. 이것도 전력을 다하지 않은 실력이겠지?”
“당연히 그럴 거야. 이번 경기에서 한 손 백핸드는 사용하지도 않았잖아.”
“그런데도 이런 스코어라니······. 탑랭커들이 리를 피하려고 하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네.”
“아마 원래 실력대로 플레이했다면 충분히 베이글 세트가 나왔을 거야.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걸 보니 이번에는 효율적으로 경기를 하려는 것 같아.”
“하긴 그랜드슬램은 후반 라운드가 될수록 선수들이 체력 문제로 기량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으니까. 그래도 나이도 어린 선수가 멘탈을 저렇게 잘 조절한다는 게 신기하네. 베테랑들도 막상 경기를 하게 되면 쉽게 흥분해서 페이스가 꼬이는데 말이야.”
“평정심을 타고난 거지. 조코비치나 바브린카같이 다혈질이라면 뒷일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6-0으로 상대를 짓밟아버렸을 테니까.”
그렇게 두 사람이 지혁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갑자기 관중석 앞쪽에서 잔뜩 들뜬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앞으로 몰려드는 게 무슨 이벤트라도 있는 모양이다.
“사인해주세요!”
“골든 보이! 당신은 저의 우상이에요!”
“정말 페더러와 같이 훈련을 한 거예요!?”
“저도 당신처럼 되고 싶어요!”
“리! 사랑해!”
잘못하면 펜스에서 떨어질 것처럼 몸을 위태위태하게 걸친 채로 팔을 쭉 뻗는 10~20대 팬들.
그들의 손에는 하얀 종이와 축구공 크기의 테니스공이 쥐어져 있었다.
아무래도 사인을 받기 위해 특별히 준비한 물건인 듯했다.
지혁은 나이와 국적을 가리지 않고 간절한 눈빛을 보내는 팬들의 사인 요청을 거절하지 않고 전부 받아줬다.
평소 10,000석이 넘는 경기장에서 팬 서비스를 할 때는 워낙 숫자가 많아서 엄두도 내지 못했지만 여긴 좌석이 고작 몇백 석 규모라 부탁을 전부 들어줘도 괜찮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사인 1~200개를 하는데 10분이 약간 넘는 시간밖에 소요되지 않는다.
“지혁아! 이제 슬슬 가자. 벌써 시간이 많이 지났어.”
그렇게 지혁이 20분이 넘도록 팬 서비스를 하면서 경기장을 떠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더 이상 기다리기 힘들었는지 코치가 가까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이제 사인도 대부분 해줬으니 호텔로 돌아가자고 하는 것 같았다.
1라운드가 비교적 빨리 끝났다고 해도 피로가 쌓이지 않은 건 절대 아니었으니 말이다.
이럴 때일수록 컨디션을 신경 써서 관리해야지 지금처럼 내키는 대로 행동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솔직히 다음 라운드를 대비하기 위한 훈련 일정도 남아있어서 여유를 부릴 시간도 넉넉하지 않았다.
“알았어요. 저도 막 끝내려고 했거든요.”
한국어로 대화를 해서 내용을 알아듣지 못했는데도 팬들은 지혁이 떠난다는 것을 눈치 챈 것인지 아쉬운 반응들이 주변에서 쏟아졌다.
그래도 보호자로 동행한 어른들의 주의 덕분에 반발은 그리 심하지 않았다.
그랜드슬램 경험이 많았던 올드 팬들은 지혁이 다른 선수들과 비교했을 때 2배 이상 시간을 내줬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이만 가볼게요. 응원해줘서 고마워요.”
마지막 인사를 하고 경기장 출구로 걸어가는 지혁.
팬들은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박수를 치며 배웅했다.
***
롤랑 가로스 본선 1라운드가 끝나고 이틀 후.
128강의 결과는 대부분 지혁이 예상한 대로 나왔다.
탑시드를 받은 32명의 선수들 중 첫 라운드에서 탈락한 건 고작 4명뿐이었던 것이다.
무려 87.5%의 승률, 스포츠에서 이 정도의 수치면 하극상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뜻이었다.
심지어 저 4번의 패배조차 1명을 제외하고 전부 20번 시드 밑에서 생긴 일이었으니 말이다.
‘역시 내가 경계하고 있던 선수들은 전부 탈락하지 않았구나. 한 명쯤은 떨어졌으면 좋았을 텐데······. 하긴 실력을 생각하면 당연한 거겠지.’
솔직히 탑10 안에 들어가는 자신의 경쟁자들이 고작 랭킹 50~120위 사이의 탑랭커에게 패배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들은 니시코리나 마린 칠리치, 델 포트로쯤 되는 대형 신인이 아니라면 감히 넘볼 수 있는 선수들이 아니었다.
‘쯧. 이번에도 어부지리 없이 실력으로 뚫고 가는 방법밖에 없겠네.’
지혁은 4강까지 올라갈 자신이 충분히 있었지만 그 과정이 험난한 길이 될 거라는 불길한 예감에 혀를 차며 경기장의 입구를 통과했다.
찌릿찌릿.
그렇게 관중석 옆을 지나서 클레이 코트가 있는 위치로 걸어가자 사방에서 쏟아지는 적대적인 분위기가 뚜렷하게 느껴졌다.
사람들의 눈빛이 살벌한 게 마치 적진에 들어온 느낌이다.
‘원인은 저 선수인가······.’
지혁은 코트에서 한 편에서 자신을 멀뚱히 쳐다보고 있는 장신의 남자의 모습을 발견하고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어느 정도 짐작이 되었다.
아마 저 남자가 와일드 카드를 받고 롤랑에 참가한 프랑스 국적의 탑랭커, 조셀린 우아나일 것이다.
이번 대회가 파리에서 열렸기 때문에 오늘 경기를 구경하러 온 관중들은 대부분 그의 편이겠지.
투어를 다닐 때마다 겪은 일이라 딱히 낯선 기분은 아니었다.
‘랭킹이 낮아도 자국 프리미엄이 붙어서 프랑스에서 인기가 대단한가 보네.’
자신보다 무려 7살이나 많은데도 아직까지 그랜드슬램 본선 진출권의 최소 자격 조건인 104등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선수인데 말이다.
경기장에 오기 전에 조사한 바로 현재 우아나의 랭킹은 133등.
테니스 선수의 전성기인 23살의 나이를 생각하면 상위 랭커가 되기에는 한참이나 부족한 재능이다.
아마 커리어 최고 성적을 얻는다고 해도 높아봐야 70~80등이 한계일 확률이 높겠지.
실제로 미래에서 그의 이름을 들어 본 적도 없었다.
그가 추측한 것처럼 결국 테니스 팬들의 눈에 띌만한 활약을 하지 못하고 이대로 사라졌다는 뜻이다.
‘1라운드를 용케도 통과했네. 역시 와일드 카드가 좋긴 하구나. 탑시드를 피할 수도 있고 말이야.’
와일드 카드는 보통 그랜드슬램 개최국의 선수들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 지혁은 과거 랭킹이 낮을 때 이런 기회를 단 한 번도 받지 못했었다.
한국의 G자동차가 그랜드슬램 중 하나인 호주 오픈의 메인 스폰서를 맡고 있음에도 자국의 선수에게 시드권을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 상품성과 성장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해서 그랬을 것이다.
정작 스페인 국적의 나달은 유망주 시절부터 G자동차에서 거액을 지원 받았으니 말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투자 전략은 사업적인 측면에서 완벽하게 옳았다.
‘나달이 프로 데뷔 3년 만에 롤랑에서 우승하면서 정상의 자리에 섰으니까. 뭐, 나는 G자동차의 지원이 필요 없어서 이제 상관 없지만.’
지혁이 지난 1년 동안 쌓은 명성의 크기를 생각했을 때 예기치 못한 부상을 당해서 1년 이상의 공백이 생긴다고 해도 메이저 대회에서 와일드카드를 받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대회의 흥행으로 수입이 결정되는 주최 측이 높은 인지도와 실력을 모두 겸비한 스포츠 스타를 거절할 리 없었기 때문이다.
유망주들처럼 터무니 없는 경기 내용으로 대회 수준을 떨어트리지도 않고 이득만 있는데 바보가 아닌 이상 누가 굴러들어온 금덩이를 걷어차겠는가.
[서브 우아나.]
그렇게 선수들이 모두 도착하고 10여분이 지나자 긴장되는 분위기 속에서 경기가 시작했다.
먼저 서비스게임을 얻은 건 우아나였지만 서브를 하기 전부터 그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암울하게도 지혁의 사기적인 코트 커버력을 뚫을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최근 나달의 우주 방어와 비교되는 최강의 유망주를 100위권 밖의 선수가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갑자기 천재지변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두 선수 간의 하극상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앗!”
쾅!!
서비스 코트에 떨어지는 우아나의 서브.
제법 빠른 속도이긴 하지만 다니엘 브랜즈과 비교하면 명백히 한 수 아래였다.
탕!!
[러브 피프틴.]
““아······.””
백핸드로 친 리턴이 에이스로 들어가자 관중석에서 탄식을 흘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프랑스 팬들은 약간의 기대를 가지고 있었지만 지혁이 첫 포인트를 얻는 모습을 보고 자신이 응원하는 선수가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꿈에서 깨어나듯이 자각해서였다.
아직 기적이 일어나길 바라는 소수의 팬들이 남아있긴 했지만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그들도 정신을 차리게 될 것이다.
[게임 리 1-0. 코트 체인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쉽잖아. 메이저 대회에서 이런 수준의 선수를 상대하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네.’
지혁은 최근 쟁쟁한 선수들을 워낙 많이 상대해서 더 확실하게 체감이 되었다.
조금 과장하면 마치 챌린저에서 랭킹이 낮은 선수를 양학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만큼 두 선수의 실력 차이가 도저히 좁힐 수 없을 만큼 현격했던 것이다.
‘2라운드는 프리 패스겠구나. 오랜만에 운이 좋았어.’
뒤에 남아있는 대진이 워낙 최악인 만큼 가끔 이런 날도 있어야 한다.
실력이 비슷하거나 자신보다 더 뛰어난 선수들을 매번 어떻게 상대하겠는가.
쿵!!
베이스라인에 떨어지는 지혁의 리버스 포핸드.
클레이 코트의 특성상 스트로크의 바운드 각도는 평소보다 훨씬 높이 튀어올랐다.
이래서 탑스핀 스트로크를 주무기로 하는 탑랭커들이 롤랑에서 훨씬 높은 성적을 얻는 것이다.
라파엘 나달이 롤랑에서 10년이 넘도록 장기 집권하게 된 것도 이 영향이 적지 않았다.
물론 탈인간급 체력과 외계인이라 불리는 수비력이 바탕이 된 게 가장 큰 이유였지만 말이다.
[게임 리 2-0.]
스트로크, 서브, 풋워크 등 모든 방면에서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준 지혁.
우아나는 2세트까지 러브 게임으로 패배하고 전의를 완전히 잃어버린 것 같았다.
마치 아마추어와 프로가 붙는 것 같은 장면이 수도 없이 연출되었는데 솔직히 그럴 만도 했다.
지금 상황을 뒤집을 방법이 전혀 생각나지 않겠지.
테니스는 워낙 정직한 스포츠라 꼼수를 사용할 수도 없어서 순수한 실력으로 정면 돌파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지금 상황에서는 갑자기 기량이 증가하지 않는 이상 그런 기적은 불가능했다.
“조셀린! 포기하지 마!”
서브의 순서가 다시 조셀린 우아나로 바뀌면서 잠깐 동안 짬이 나자 앳된 목소리가 갑자기 관중석에서 들렸다.
그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란 진행 요원이 곧장 소란의 진원지로 달려갔다.
선수와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는지 확인된 건 아니었지만 경기력에 영향이 갈만한 코칭을 하는 건 엄격하게 금지되어있었기 때문이다.
10대 중반쯤 되는 소년은 퇴장을 당하면서도 후회하지 않는다는 듯 몇 번이나 조셀린 우아나를 응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