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롤랑 가로스
갑작스러운 소년의 개입으로 잠깐 동안 중단된 경기.
지혁은 비록 방해를 받았지만 그리 개의치 않은 표정으로 체어 엠파이어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
소년이 보여주는 순수한 팬심이 그저 귀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인종차별적인 행동이나 모욕을 했다면 강력하게 대응을 했겠지만 방금 전 상황은 그런 것도 아니었다.
[플레이어 레디. 서브 우아나.]
잠시 후, 경기장의 소란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우아나는 마침내 서브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아마 이전과 달라진 부분이 없다면 이번 서비스게임도 지혁에게 브레이크될 확률이 높을 것이다.
탕! 탕! 탕! 탕!
우아나의 서브는 랭킹 10위에게 에이스를 따낼 만큼 위력이 뛰어나지 않았기에 경기는 처음부터 예정된 것처럼 랠리로 이어졌다.
보통 이런 상황이 되면 4~6구 안에 승부가 나는 게 일반적이었다.
‘갑자기 플레이 스타일이 끈질겨졌어. 심경의 변화라도 생긴 건가?’
몇 분 전만 해도 차마 기권하지 못해서 어쩔 수 없이 하는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어딘가 필사적인 느낌이다.
마치 이번 경기에 메이저 대회의 우승이 달려있어서 뒷 일을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5구, 8구, 12구.
그렇게 오늘 경기 처음으로 스트로크의 횟수가 10구를 넘어가자 실망하고 있던 팬들의 표정도 천천히 변해갔다.
비록 아직까지 밀리는 모습이 역력했지만 이전과 비교하면 이 정도만 해도 엄청난 성장이었다.
쿵!!
[피프틴 러브.]
마침내 포인트를 결정짓는 우아나의 포핸드 다운 더 라인.
관중들은 클레이 코트를 빠르게 가로 지르는 타구를 보며 크게 환호성을 질렀다.
와아아아아!
“조셀린이 골든 보이에게 한 방 먹여줬어!”
“이대로 이겨 버리자!”
“지금처럼만 하면 돼!”
이번에 얻은 득점이 반격의 서막이 될 거라고 생각한 건지 프랑스 팬들은 기대가 잔뜩 담긴 표정으로 코트에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런 열정적인 응원에 힘을 얻은 것일까.
이후의 서비스게임은 선수들이 서로 위닝샷을 한 번씩 주고받으며 한동안 팽팽하게 유지되었다.
[서티 포티.]
[서티 올.]
[포티 서티.]
이제 우아나가 한 포인트만 더 잃게 되면 듀스가 시작되는 상황이었다.
만약 경기가 그렇게 흘러간다면 그에게 승산은 거의 없을 것이다.
아무래도 시간이 길어질수록 불리해지는 건 기량이 떨어지는 쪽이었으니.
촤아아악- 퉁!
[게임 우아나 1-2.]
가까스로 위닝샷을 넣긴 했지만 슬라이딩하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앞으로 쓰러지는 우아나.
다행히 라켓을 잡고 있는 손으로 땅을 짚어 완전히 넘어지진 않았다.
그쯤 되니 프랑스 팬들을 제외한 다른 관중들 중에서도 우아나를 응원하는 사람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우위에 서 있는 탑독보다 언더독으로 경기를 하는 선수들에게 감정이입이 더 잘되었기 때문이다.
지혁도 마이애미 오픈에서 나달을 상대할 때 이미 똑같이 겪었던 일이다.
지금은 맡은 역할이 완전히 달라졌지만 말이다.
“이러다가 조셀린이 골든보이에게 이기는 거 아니야?”
“지난 1년간 랭킹이 정체하고 있어서 걱정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성장한 것 같아.”
“우리 프랑스에도 리나 나달 같은 정상급 선수가 나올 때가 되긴 했지. 나는 롤랑 가로스의 트로피를 항상 다른 선수들에게 뺏기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어.”
관중들은 세 번째 게임을 마치고 휴식을 하기 위해 벤치로 들어가는 선수들의 모습을 보며 웅성거렸다.
정말 기대하지도 않았던 대사건이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잔뜩 흥분한 대화 소리가 코트에서 휴식하고 있던 선수들에게까지 전해지자 지혁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아직 1세트 초반도 지나지 않았는데 너무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네. 굳이 힘을 뺄 필요가 없어서 내버려둔 건데 말이야.’
방금 전 우아나가 서비스게임을 지킬 수 있었던 건 지혁이 여력을 남겨두고 플레이해서 생긴 일이었다.
1라운드에서 다니엘 브랜즈를 상대헀을 때 그랬던 것처럼 쓸데없이 체력을 낭비하면서 베이글 세트로 이길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어차피 이대로 우아나를 내버려 두면 2세트 후반쯤에 알아서 자멸할 것이다.
상대는 부족한 실력을 체력으로 극복하기 위해 오버페이스로 뛰어다니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직 시즌이 절반도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저런 전략을 꺼낸 걸 보면 정말 어지간히 이기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래.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의미없는 발악이라는 걸 깨닫게 될테니 지금이라도 실컷 좋아해두라고.’
기대감이 클수록 반대급부로 실망감도 같이 커지게 될 테니 그때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
***
2라운드가 시작되고 1시간 30분 후.
경기는 지혁이 장담했던 대로 아무런 기적도 일어나지 않았다.
우아나가 필사적으로 코트를 뛰어다니며 서비스게임을 지켜냈지만 결국 지혁에게 브레이크를 한 번도 따낼 수 없었던 것이다.
테니스는 방어만 해서 절대 이길 수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던 만큼 이런 종류의 경기는 먼저 빈틈을 보이는 선수가 패배하게 된다.
그런데 두 선수들 중 그게 누가 될지는 너무나 뻔했다.
체력 저하로 인해 급격하게 기량이 떨어지는 우아나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쿵!!
결국 베이스라인을 깊숙한 곳을 겅략하는 지혁의 리버스 포핸드가 마지막 매치 포인트를 결정지었다.
클레이 코트 특성을 교과서처럼 잘 이용한 마무리였다.
[게임 세트. 매치 리. 6-4, 6-2. 6-0.]
마침내 3세트가 베이글로 끝나자 관중석에서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는 프랑스팬들.
기대가 완전히 무너진 그 모습에 지혁은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속으로 통쾌한 미소를 지었다.
그도 사람인지라 잘못한 것도 없는데 죽일 듯이 노려보는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성인군자도 아니고 자신을 적대시하는 사람에게 굳이 잘해줄 이유가 없었다.
“역시 골든 보이가 이길 줄 알았어. 와일드카드를 받고 그랜드슬램에 참가한 무명의 선수가 나달을 꺾은 최고의 유망주를 어떻게 상대하겠어. 이번 승리는 생각할 것도 없이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던 일이야.”
“맞아. 랭킹이 무려 100위나 차이나는 선수들이 붙었는데 하극상이 일어날 리 없지. 기적이 일어나는 것도 실력이 어느 정도 받쳐줘야 가능하니까 말이야. 내가 생각하기에 저 프랑스 선수는 최소한의 자격도 갖추지 못했어.”
“우아나는 골든 보이와 대결한 걸 영광으로 여겨야겠네. 앞으로 두 사람이 만나는 일이 없을테니 말이야.”
“음. 재능을 보면 확실히 그렇긴 하겠네.’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선수들에 대한 평가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몇몇 관중들.
지혁은 그들의 너무 빠른 태세 전환에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분명 그가 기억하기로 1시간 전 만 해도 괜히 왔다는 표정을 지으며 불평을 하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과대평가됐다던가 소문만 못하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뱉어 놓고 고작 1시간 만에 자신들이 했던 발언을 모두 잊은 모양이다.
원하는 대로 기억을 조절할 수 있다니 저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다.
‘경기 내용이 어떻든 이기면 모든 게 해결되는구나.’
랭킹에 비해 훌륭한 실력을 보여줬던 우아나는 경기에서 패배한 탓에 조금의 관심도 받지 못했다.
냉정한 현실이지만 스포츠는 승자독식의 구조라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푸대접을 받는 게 마음에 들지 않다면 실력이 높여서 결과를 만들어내면 된다.
그러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람들의 찬사가 금방 쏟아질 테니 말이다.
씁쓸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쓸쓸히 퇴장하는 그에게 박수를 쳐주는 사람은 같은 국적인 프랑스 팬들밖에 없었다.
이것도 파리에서 열린 대회라서 그렇지 만약 연고가 없는 다른 나라였다면 우아나가 언제 사라진 줄도 몰랐을 것이다.
“골든 보이! 경기에서 승리하신 걸 축하합니다! 저는 당신이 이길 걸 예상하고 있었어요. 오늘 경기에서 보여준 모습은······.”
지혁은 승자 인터뷰를 하며 자신은 머레이와 페더러와 붙을 때 저런 꼴을 당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다른 사람의 들러리가 되는 건 과거에 경험했던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했기 때문이다.
기껏 막대한 대가를 치르고 이 자리까지 왔는데 그저 남들을 돋보이게 하는 장식 역할을 하는 건 싫었다.
***
128강, 64강에서 다니엘 브랜즈와 조셀린 우나라를 차례차례 쓰러트린 지혁은 16강까지 별다른 위기 없이 편안하게 진출갔다.
그걸 보면 이제 하위 라운드에서 그를 상대할 선수는 사실상 없는 것 같았다.
탑시드 20번 대 이하의 선수들에게 전혀 위협을 느낄 수 없었으니 말이다.
‘128명의 선수가 16명까지 추려지니까 이제 만만한 상대들이 없네······.’
대진표에 남아있는 이름들이 테니스를 잘 모르는 사람들도 전부 한 번쯤은 들어봤을 만한 선수들로 가득하다.
무엇보다 빅3와 머레이, 네 사람이 1, 2, 3, 4쿼터를 모두 한 자리 씩 차지하고 있는 게 끔찍한 느낌이다.
이건 최종적으로 8강까지 올라간다면 어느 쪽에서 출발해도 결국 그들과 만날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저번 호주 오픈에서는 운 좋게 델 포트로가 머레이 대신 랭킹 4위를 차지하고 있어서 4강까지 갔지만 올해는 그런 행운이 없을 것이다.
그는 부상으로 시즌 아웃을 당한지 이미 오래였기 때문이다.
‘경쟁자가 사라진 건 좋지만······. 빈자리를 머레이가 차지해서 이게 좋은 건지 모르겠네.’
부상 없이 절정의 실력을 발휘하는 델 포트로를 직접 경험해본 적이 없어서 정확한 기량이 짐작되지 않는다.
작년 US오픈에서 페더러를 이기는 모습을 직관하긴 했지만 단순히 눈으로 보는 것과 경기를 하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와아아아아!
그렇게 지혁이 상념에 잠겨있을 때.
땅이 흔들리는 함성 소리가 주변에서 들려왔다.
지혁은 32강을 마치고 하루 동안 주어진 휴식일을 투자해 테니스 경기를 관전하러 왔던 것이다.
여유를 부린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오늘 경기에서 이긴 선수가 4강의 상대가 되는 터라 탐색하는 의미에서 온 것이다.
‘드디어 도착했구나.’
시선을 돌리니 스타디움 입구에서 걸어 나오는 페더러의 모습이 보인다.
과연 5년 연속 테니스 선수 인기 순위를 차지하고 있는 황제답다.
중국 상하이에 투어를 가도 그곳을 홈코트화시켜 버리는 압도적인 인기.
아마 그보다 실력이 뛰어난 선수는 시간이 지나면 나올 수도 있겠지만 파급력과 인지도를 따라잡을 수 있는 스타는 수십 년이 흘러도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다.
2010년 이후 그랜드슬램을 지배하는 나달이나 조코비치조차 페더러와 비교하면 몇 수는 접어줬으니 말이다.
‘바브린카도 보이네.’
서로 약속한 것 마냥 똑같은 시간에 입장했지만 언더독의 바브린카는 전혀 관심을 받지 못한다.
그도 꽤 인기가 있는 선수인데 페더러 옆에 붙여 놓으니 졸지에 조연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코트 위에서 만난 두 선수는 평소처럼 인사를 하고 랠리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