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역대급 테니스 천재가 되었다-87화 (87/241)

87화. 롤랑 가로스

페더러와 바브린카가 스트로크를 가볍게 주고받기 시작하자 제법 멋진 그림이 연출되었다.

같은 국적을 가진 두 사람의 관계를 알고 있다면 오늘 경기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훈련을 할 때부터 이런 일이 생길 것 같더라니······. 결국 바브린카도 16강까지 진출하게 됐구나.”

보디가드라는 명목으로 경기장에 같이 동행한 박 코치는 생각할 게 많은지 복잡한 표정으로 코트를 내려다봤다.

아무래도 짧은 기간 동안 같이 훈련장을 쓰면서 정이 많이 든 모양이다.

워낙 매력적인 선수들이어서 그의 마음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페더러를 상대로 얼마나 해줄 수 있을까요. 최대한 체력을 빼놓으면 좋겠는데······. 역시 쉽지 않겠죠?”

“오늘 컨디션에 달렸지. 연습 경기에서 보여줬던 수준만 유지해도 괜찮을 거야. 비록 너한테 패배했지만 낮게 잡아도 랭킹 10위 초중반쯤의 실력은 되니까.”

“멘탈이 깨져서 삽질만 하지 않으면 된다는 거네요.”

지혁과 코치는 다양한 의견을 나누면서도 바브린카가 이긴다는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았다.

그의 빅3 통산 전적을 보면 승률이 5%가 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년 무렵, 등급이 낮은 대회에서 이긴 적이 한, 두 번 있긴 해도 그건 롤랑 가로스에 비해 상금의 크기가 엄청나게 떨어지는 대회라 참고 자료로 거의 의미가 없었다.

일반적으로 우승에 걸려있는 보상이 보잘 것 없으면 자연스럽게 경기 내용도 형편없어졌기 때문이다.

1년 동안 뛰어야 할 대회가 얼마나 많은데 어떤 선수가 바보같이 남은 일정을 희생하면서 모든 전력을 발휘하겠는가.

연말에 열리는 이벤트 대회처럼 일정이 아주 여유롭거나 언론에 노출될 기회라도 많으면 모르겠지만 마이너리그 격인 ATP250, 500은 그런 것도 아니었다.

“진짜 인기가 대단하긴 하네. 작년 US오픈에서 봤던 것보다 관중들의 반응이 더 격렬한 걸. 역시 본진은 유럽이라는 건가.”

“바브린카는 제대로 관심을 받지도 못하네요. 원래라면 저렇게 무시받을 만한 인지도가 아닌데요.”

“안 그래도 주변 환경에 영향을 많이 받는 선수인데 압박감이 심하겠어. 재수 없으면 생각했던 것보다 간단하게 무너질 수도 있겠는데.”

“그러질 않길 빌어야죠. 저는 멀쩡한 상태의 페더러를 이길 자신이 없어요. 직접 경기를 해보니까 정말 장난이 아니었거든요.”

“우리에게 나쁜 소식이긴 하지만 정말 황제라는 명성이 아깝지 않은 선수이긴 하지. 무려 237주 연속 세계 랭킹 1위를 유지했던 살아있는 전설이니까. 솔직히 다른 탑랭커들과 같은 선상에서 비교하는 자체가 무의미한 사람이야.”

탕! 탕! 탕!

관중들은 페더러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으려고 그가 움직이는 방향으로 고개를 같이 움직였다.

분명 테니스공은 좌우로 움직이는데 정작 고개는 한쪽 코트에만 고정되어있다.

팬들에게 바브린카의 플레이는 전혀 관심의 대상이 아닌 모양이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 지나자 드디어 몸 풀기가 끝났건지 선수들이 네트 앞으로 걸어갔다.

짧게 대화를 나누는 것이 아마 서비스게임을 정하기 위해 동전의 앞면과 뒷면을 정하고 있는 것 같았다.

팅!

엄지를 이용해 동전을 허공으로 튕기는 체어 엠파이어.

바닥에 떨어진 동전은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곧 움직임을 멈추었다.

[서브 페더러.]

“이제 시작하네요. 우리도 훈련에서 봤던 실력과 얼마나 다른지 확인해보죠.”

“그래. 너한테 끝까지 보여주지 않은 기술을 어떻게 사용하나 보자.”

쾅!!

경기장에서 울리는 임팩트 소리와 함께 시작된 경기.

페더러는 탐색전을 할 생각이 없는지 처음부터 전력을 다해 서브를 넣었다.

[피프틴 러브.]

T존에 면도날처럼 날카롭게 내려 꽂힌 공.

마치 라인을 자로 잰 것 같은 정확도에 코치는 혀를 내두르며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허, 저건 다시 봐도 신기하네. 기계도 아니고 저런 라켓 컨트롤이 어떻게 가능한 거지. 심지어 속도도 너보다 더 빠르잖아.”

“괜히 전문가들이 페더러의 서브를 세계 최고로 꼽는 게 아니죠. 저것보다 더 빠른 240, 250km의 빅 서버들도 에이스 확률로 따지면 그보다 낮잖아요.”

“저 정도는 해야 황제라고 불리는구나······.”

“나름 자신이 있었는데 저 모습을 보니까 아직도 갈 길이 먼 것 같네요. 저는 저런 서브는 아직 엄두도 내지 못하니깐 말이에요.”

완벽에 가까운 페더러의 실력에 어딘가 씁쓸한 표정을 짓는 지혁.

코치는 그 태도에 어이가 없는 말투로 끼어 들었다.

“프로 데뷔를 한지 고작 1년 2개월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페더러를 따라잡으려고 하는 거야? 넌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까 좀 더 여유를 가져도 돼. 아직 성인이 되려면 2년이나 더 남았잖아. 너랑 비슷한 나이 대의 유망주들은 주니어 대회나 출전하고 있다고.”

“가능하다면 페더러가 전성기 때 넘어보고 싶어서요. 5, 6년이 지나서 그가 30대 중반이 되면 지금보다 이기는 게 훨씬 쉽겠지만 제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거든요.”

“너도 참 힘들게 산다······. 그래. 네 생각이 그렇다면 원하는 대로 해야지. 그런데 필요 이상으로 무리하지는 마. 지금도 다른 선수들과 비교하면 충분히 빠르니까. 델 포트로의 전철을 밟지 않아야 될 거 아니야.”

“네. 저도 한 시즌 반짝하고 사라질 생각은 없어요.”

쾅!!

두 사람이 대화를 하는 사이 다시 페더러의 서브가 서비스 라인 위로 떨어졌다.

바브린카는 이번에도 에이스를 당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슬라이딩을 하는 등 갖은 수를 써서 어떻게든 리턴에 성공했다.

쿵!!

[서티 러브.]

어렵게 걷어낸 보람 없이 오른쪽 옆구리를 관통하는 페더러의 패싱샷.

예술과도 움직임에 관중석에서 감탄과 박수가 쏟아졌다.

아무래도 쉽게 볼 수 없는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서브 앤 발리. 페더러의 전매특허가 나왔네. 저런 클래식한 방법을 잘도 쓴단 말이야. 저 선수만큼 ’한 물간 전략이라도 사용하는 선수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다‘라는 교훈이 잘 어울리는 사람도 없을 거야.”

“라켓 기술이 발전하면서 서브 앤 발리가 완전히 사장되다시피 했으니까요. 저건 탁월한 센스를 타고나지 않으면 흉내를 내는 것도 힘들어요.”

“동체시력이 다른 선수들에 비해 극도로 뛰어나거나 사전에 타구의 방향을 예측하는 게 쉬울 리 없지. 그런데 지혁이, 네가 요즘 발리 실력이 많이 늘었잖아. 너는 어떤 경우인 것 같냐?”

“갑자기 없던 센스가 생길 리는 없으니까 동체 시력 덕분이죠. 그래도 컨디션이 정말 좋을 때나 발리가 가능한 거라서 아직 완벽한 건 아니에요.”

“그것도 충분히 축복받은 거야. 나머진 차차 개발해 나가면 돼.”

[게임 페더러 3-0.]

시종일관 페더러의 우세로 진행되는 경기.

지혁과 관중들은 이미 승패가 뻔한 선수들의 대결보다 황제의 화려한 퍼포먼스를 감상하는데 초점을 잡았다.

아무리 바브린카가 발악한다고 해도 조셀린 우아나가 지혁에게 처참하게 패배했던 것처럼 결과가 뒤바뀌는 일은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솔직히 테니스를 잘 모르는 사람들도 경기를 보면서 현격한 실력 차를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두 선수들 사이에 넘을 수 없는 무형의 벽이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세트 페더러 6-2.]

그렇게 첫 세트는 큰 스코어 차이로 페더러가 승리하게 되었다.

경기가 마음대로 풀리지 않자 라켓을 든 손을 치켜드는 바브린카.

아무래도 바닥에 내려쳐서 때려 부수려고 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어깨 높이까지 빠르게 내려오던 라켓은 뚝하고 움직임을 멈추었다.

차마 자신의 우상 앞에서 무례한 행동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걸 보면 불리한 상황임에도 아직 한 가닥의 이성이 남아있는 모양이다.

“슬슬 멘탈이 무너질 것 같은 조짐이 보이는데 조금만 더 압박하면 알아서 자멸하겠어.”

“경기장의 분위기 때문에 더 그런 것 같네요. 전부 페더러만 응원하고 있으니까요.”

“정말 최고까지 올라가려면 저런 핸디캡도 극복해야겠지. 하지만 오늘 바브린카는 힘들 것 같네.”

모든 조건이 불리해서 바브린카에게 한 줌의 희망도 없는 상황.

그는 관중들이 표정을 파악할 수 없게 고개를 푹 숙인 모습으로 벤치로 들어갔다.

안쓰러운 모습에 동정하는 팬들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뭔가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페더러도 그 모습이 신경 쓰이는지 힐끗 시선을 돌려 옆자리를 확인했다.

하지만 지금은 경기 중이라 딱히 말을 걸진 않았다.

자칫하면 좋은 의도가 이상하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일부로 져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배려해줄 수 있는 건 최대한 빨리 끝내주는 것뿐이다.

[레디.]

120초의 휴식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자 체어 엠파이어는 선수들에게 경기를 시작하라고 신호를 보냈다.

힘없이 터벅터벅 걸어가는 발소리만 들어도 바브린카의 답답한 심정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

[게임 세트. 매치 페더러 6-2, 6-3, 5-7, 6-2.]

스피커로 들리는 체어 엠파이어의 경기 종료 선언.

무려 2시간이 넘는 경기가 끝나자 관중들은 훌륭한 플레이를 보여준 페더러에게 기립 박수를 보냈다.

현대식 테니스가 주류가 된 2010년에 클래식 스타일을 유지하고 있는 선수는 정말 극소수였기 때문이다.

“3-1이라······. 이 정도면 오늘 보여준 경기력에 비해 꽤 잘해준 것 같네. 플레이 타임도 제법 길었고.”

“음. 시간은 큰 의미가 없을 것 같아요. 여력을 남겨두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너는 페더러가 힘을 아낀 상태로 바브린카를 상대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두 사람의 실력 차이를 생각하면 스코어가 더 심하게 나왔어야 했어요. 갑자기 바브린카의 실력이 늘어난 것 같지는 않으니 분명히 완급 조절을 한 거겠죠.”

“1세트가 끝나고 압도적인 장면이 많이 나오지 않긴 했지. 역시 페더러는 베테랑이라 그런지 엄청 냉철하구나. 정상의 자리에 오래 머무르면 조금 자만할 수도 있을텐데 말이야.”

“저런 겸손한 자세를 가지고 있었기에 지금까지 롱런할 수 있었겠죠. 그리고 원래 페더러가 오만한 성격은 아니잖아요.”

“4년 간 랭킹 1위를 유지한 비결이 저건가 보네. 저러니 무리한 일정에도 큰 부상을 당하지 않은 거겠지. 우리도 저런 부분은 배워야겠다. 그나저나 지혁아, 감상은 어때? 이길 자신은 좀 생겼어?”

“네. 저희가 준비했던 전략이 통할 거라는 확신이 더욱 굳어졌어요. 만약 4강에서 만나게 된다면 이길 수 있겠어요.”

“하하하. 자신이 있다고? 넌 빈말을 하는 성격이 아니니까 진심이겠네. 그때가 정말 기대되는 걸.”

“일단 머레이부터 이겨야죠. 탈락하면 아무 소용도 없으니 우선 그것부터 생각해요.”

“나는 지혁이. 네가 호주 오픈에서 패배하고 칼을 얼마나 갈아놨는지 알고 있어서 그건 걱정이 안 돼. 게다가 이번 롤랑에서는 코트마저 너에게 유리한 클레이잖아. 정말 사고를 칠 수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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