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역대급 테니스 천재가 되었다-89화 (89/241)

89화. 롤랑 가로스

지혁은 오랜만에 만난 니시코리와 대화를 조금 나누다가 이내 코트 위로 올라갔다.

내일 머레이를 상대하려면 지금처럼 놀고 있을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머레이는 수비를 중시하는 베이스라이너 스타일이니까 최대한 방어적으로 플레이하면 되는 거지?”

“네. 그리고 머레이가 자주 쓰는 슬라이스나 발리도 기회가 보이면 간간히 보내주세요.”

“음. 발리는 그리 자신 없는데 일단 알았어.”

“······니시코리, 당신은 대부분의 공격 옵션을 거의 완벽한 수준으로 사용할 수 있잖아요. 다른 탑랭커들이 자신 없다는 말을 들으면 분명히 어이없어할 거예요.”

지혁은 니시코리가 엄살 부리는 모습을 전혀 믿지 않았다.

비록 공식적인 경기를 해본 건 아니었지만 그는 견고한 스타일의 테니스를 하는 것으로 아주 유명한 올라운더였다.

유년기 시절부터 닉 볼리티에리 아카데미에서 기본기를 철저하게 닦은 엘리트 선수가 애초에 균형이 맞지 않는 실력을 가지고 있을 리 없다.

솔직히 니시코리는 지혁에 비해 약간 부족할 뿐이지 지금도 아시아 최고의 천재라고 팬들에게 귀가 따갑도록 찬사를 듣고 있는 만큼 재능이라면 어떤 선수와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았다.

이래 봬도 빅3를 제외하고 그랜드슬램를 우승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3인의 유망주 안에 들어가는 인물이었으니 말이다.

지금 지혁의 위상이 과거와 다르게 엄청나서 그렇지 이 정도만 해도 평범한 선수가 말도 제대로 못 붙여볼 만큼 테니스계의 거물이다.

“나와 실력이 비슷한 경쟁자들이나 골든 보이, 너하고 비교하면 한참 부족한 게 맞지. 실제로 득점 성공률이 높은 것도 아니니까. 몇 달 전에 있었던 연습 경기에서 간단하게 패배해버렸잖아? 그때 느껴지는 게 많더라고. 절대 이대로 안주하면 안 된다고 말이야.”

“······.”

“나는 20위 근처의 랭커까지 통하는 수준일 뿐이야. 이 벽을 넘으려면 앞으로 많은 숙련이 필요하겠지.”

어딘가 씁쓸한 목소리를 듣고 말문이 턱 막혀버린 지혁.

그 반응에 니시코리는 더 이상 부담을 주는 게 싫었는지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

그도 자존심이 있었기에 괜히 이런 소리를 해서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비록 지금은 조력자의 입장이지만 두 사람은 언제든지 공식 경기에서 만날 수 있는데 나약한 이미지를 심어줄 필요는 없다.

“하여튼 시작하자.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볼게.”

“잘 부탁드려요. 그리고 오늘 신세는 빠른 시일 내에 갚을게요. 나중에 제가 필요하다면 부담가지지 말고 불러주세요. 만약 경기 스케줄이 겹치지만 않으면 무조건 갈 테니까요.”

“오. 고작 하루 시간을 내는 걸로 골든 보이에게 빚을 지게 할 수 있다니 꽤 수지맞는 장사인 걸. 알았어.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일이 있으면 연락을 할게.”

그 말을 끝으로 본격적으로 경기를 시작하는 두 선수.

니시코리는 머레이처럼 220km가 넘는 고속 서브를 치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기에 연습 경기는 스트로크 위주로 진행되었다.

아무리 피나는 트레이닝을 통해 노력을 한다고 해도 테니스 선수치고 작은 178cm의 피지컬로 빠른 서브를 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탕!!

그렇게 경기 초반은 굳어있던 몸을 푸는 게 목적이었기 때문에 대략 80% 정도되는 위력의 스트로크가 코트 좌우를 날아다녔다.

그 정도만 해도 어지간한 프로들이 쫓아가기 힘들 만큼 빨랐지만 선수들에게는 슬로우모션이 걸린 것 마냥 느리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랠리를 하면서 풋워크가 무려 한 걸음 이상 남았으니 말이다.

“니시코리, 이제 제대로 갈게요.”

지혁은 이만하면 충분히 준비 운동을 했다고 판단한 건지 짧은 통보를 하고 라켓을 등 뒤로 빼며 테이크백 자세를 취했다.

굽혀진 무릎이 스프링처럼 튕기며 빠르게 회전하는 허리와 라켓.

그렇게 응축되어 있는 힘이 풀려나오자 코트에서는 공이 쪼개지는 듯한 임팩트 소리가 크게 들렸다.

탕!!

레이저처럼 일직선으로 쭉 날아가는 백핸드 스트로크.

오늘 봤던 것 중 가장 빠른 속도의 타구이긴 해도 지혁이 상대를 배려하는 차원에서 코스를 정면으로 보냈기에 니시코리는 어렵지 않게 랠리를 이어갈 수 있었다.

아무리 강력한 스트로크라도 속도, 스핀량, 코스가 맞춰지지 않으면 이렇게 위력이 급격하게 떨어진다.

역동작을 노리거나 빈틈을 공략하지 않는다면 랭킹 50위 안에 들어가는 상위 랭커에게 포인트를 따내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두 사람 다 상위 랭커라서 연습은 문제 없는 것 같네. 지혁이가 시기적절하게 파트너를 잘 구했어.”

“마이애미 오픈에서 만났던 인연이 설마 여기까지 이어질 줄이야. 적어도 머레이를 상대할 때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일은 없겠어.”

“지금 관계가 앞으로 계속 이어지면 최상의 시나리오인데 그러면 두고두고 니시코리를 써먹을 수 있잖아.”

“그런 부분을 생각하면서 관계를 이어나가는 건 힘들지. 우리가 강요하는 것도 조금 이상하고.”

“하긴······.”

코치들은 쓸만한 조력자를 오랫동안 써먹고 싶은 욕심을 꾹 눌렀다.

공식 대회에서 만나도 얼마든지 승리할 자신이 있는 한 수 아래의 연습 파트너를 구하는 건 하늘의 별따기였지만 그렇다고 지혁에게 강요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말한다고 해서 의도대로 따라 준다는 보장도 없고 말이다.

일년 동안 원정을 다니며 꽤 친해지긴 했어도 침범하지 않아야 하는 선을 넘게된다면 전담 코치에서 잘릴 수도 있었다.

노파심이 크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지혁이 어린 나이와 어울리지 않게 가끔 보여주는 냉정하고 단호한 결정을 생각했을 때 이건 얼마든지 있을 법한 얘기다.

쿵!!

“크윽.”

턱! 통. 통. 통.

코트에 바운드된 후 얼굴 정면으로 튀어 오르는 리버스 포핸드에 신음을 흘리며 실책을 하는 니시코리.

이미 한 번 겪어본 지혁의 탑스핀 스트로크였지만 니시코리는 완전히 다른 선수의 샷을 받고 있는 것처럼 생소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아무래도 클레이 특성상 스트로크의 회전량이 하드 코트와 크게 차이가 났기 때문이다.

“지혁이의 포핸드는 현존하는 프로 선수들 중에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간다고 내부 평가가 나왔었지?”

“맞아. 그런데 클레이 코트를 한정으로 하면 다섯 손가락도 충분히 가능할 거야.”

“이론적으로 롤랑에서 탑스핀이 극대화된다고 알고 있긴 했는데 탑10 안에 들어가는 정상급 선수가 직접 플레이하는 걸 보니 역시 체감이 확실하게 되네.”

“구경하는 사람들에게 느껴질 정도면 직접 스트로크를 받고 있는 사람은 훨씬 더 죽을 맛일 거야. 나는 니시코리가 지금처럼잘 버틴다는 게 더 신기해. 임팩트 위치가 완전히 다른데 적응을 저렇게 잘 한다니 그도 천재는 천재인가 봐.”

“갑자기 이번 대회에서 지혁이를 상대했던 선수들이 불쌍해지네······. 저런 샷을 치는 괴물을 어떻게 상대해. 내 생각엔 10번 시드 안쪽이 아니라면 엄두도 내지 못할 것 같아.”

“지금 모습을 보니까 머레이를 상대할 때도 괜찮겠네. 호주 오픈이나 US오픈 같은 하드 코트라면 모르겠지만 적어도 롤랑에서 비슷한 실력을 가진 선수에게 패배하진 않을 거야.”

“그럼 내일 경기장에 들어갈 때까지 지혁이가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게 전력을 다하자. 괜히 문제가 될 수 있는 일이나 의도하지 않은 사고가 나지 않게 말이야.”

지혁의 전담 코치들은 이대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그랜드슬램에서 무난하게 4강 진출을 할 수 있겠다는 판단이 서자 선수의 안전에 대해 더욱 신경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이번 그랜드슬램은 한국의, 아니 전 세계 테니스계의 분기점이 될 수 있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만 16세의 나이로 롤랑에서 우승한 선수가 역사상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으니 말이다.

만약 지혁이 롤랑에서 우승하게 된다면 기존 19살 300일이라는 기록을 갈아치우고 역사의 한 페이지에 지어지지 않는 기록을 새길 수 있다.

그 영광스러운 기회를 한순간의 실수로 날려버릴 수는 없었다.

***

경기를 시작하고 약 80분의 시간이 흐른 후.

지혁과 니시코리는 마침내 훈련을 마치고 코트 밖으로 나왔다.

몸에 피로가 쌓이지 않게 하려면 이 정도 운동량이 딱 적당했기 때문이다.

경기 시간은 2세트를 치르는 것과 비슷했지만 중간중간 휴식을 많이 가져서 실질적으로 움직인 건 거의 1세트와 비슷했다.

기존에 연습 경기를 약속했던 그대로 가벼운 훈련 수준이었던 것이다.

“많이 힘들었지 케이?”

“유즈키구나. 걱정하지 않아도 돼. 고작 한 시간밖에 하지 않았는 걸.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하루에 몇 시간 씩 훈련하는지 잘 알고 있잖아?”

“하지만······. 경기를 하는데 사용하는 체력은 다르다고 들어서.”

니시코리는 애정이 담긴 눈으로 수건으로 땀을 닦아주는 일본인 여자친구와 다정한 대화를 나누었다.

소개를 받지 않아도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과 행동을 보면 연인 사이라는 게 너무나 분명했다.

‘그새 여자친구가 생겼구나. 그런데 얼굴이 어딘가 익숙한 느낌인데 어디서 본 사람이지?’

분명히 마이애미 오픈 당시만 해도 솔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테니스 선수들은 투어를 다니며 한 나라에 머무르는 일이 적어서 시간이 없었을 텐데 그새 연애를 하는 걸 보면 정말 재주도 좋다.

‘소문을 들었던 대로 경기력에 악영향을 끼치는 건 생각도 하지 않는구나.’

직접 확인하지 않아도 아마 코치들이나 니시코리의 가족들은 니시코리의 여자친구를 끔찍하게 싫어할 확률이 높다.

단순히 억측이 아니라 실제로 과거, 일본의 여자 연예인과 사귀면서 같은 관중석에 앉지도 못하게 했던 걸로 기억한다.

성격이 나쁜 가족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한창 테니스에 집중해야 할 시기에 족쇄를 찬다면 제법 긴 시간 동안 어중간한 선수로 머무르며 재능을 썩힐 우려가 있었다.

솔직히 니시코리처럼 재능있는 유망주가 연애를 하면서 기량이 떨어지는 일은 비일비재했으니 말이다.

그러니 그의 커리어를 진심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런 상황을 우려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가 가족들의 걱정한 것처럼 니시코리가 연애를 하면서 랭킹이 떨어지는 상황이 실제로 일어나게 된다.

‘페더러의 부인처럼 예외적인 상황도 있지만 그런 일은 거의 없으니까.’

미르카 페더러가 괜히 주목을 받은 게 아니다.

그런 일이 열에 하나 있을 법한 케이스라서 기사 거리가 되고 미담이 된 것이다.

“아! 마이애미 오픈의 연습 경기!”

그렇게 지혁은 다정한 두 남녀의 모습을 한동안 주의 깊게 지켜보다가 마침내 여자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단순히 스쳐 지나가던 팬이라 잊고 있었는데 워낙 특이한 조합이라서 이제야 기억이 난다.

아마 평범한 팬이었더라면 4개월이 지난 지금쯤 잊고도 남았겠지만 당시 플로리다에서 보기 힘든 미모의 일본인 여자 2명이 니시코리를 열정적으로 응원하는 모습에 큰 인상을 받아서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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