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롤랑 가로스
‘······역시 반기지는 않는구나.’
잔뜩 경계하는 유즈키의 눈빛에 어색한 표정을 짓는 지혁.
아무래도 그녀는 연습 경기에서 니시코리를 꺾었던 일을 아직까지 가슴에 담아두고 있는 모양이다.
여행 일정을 맞춰서 대회를 따라다닐 만큼 응원하는 선수가 사랑하는 사람으로 격상됐으니 이런 반응도 이해가 되었다.
만약 지혁이 없었다면 최근 아시아에서 급격하게 늘어나는 수많은 팬들의 관심을 니시코리가 대신해서 받게 될 테니 말이다.
저런 행동이 마냥 억측인 것도 아닌 게 원래 역사대로 흘러간다면 앞으로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아시아 최강자의 자리는 그가 차지하게 된다.
2010년 중반쯤부터 ATP랭킹 4위를 찍고 연수입 400억의 금자탑을 쌓게 되는 것이다.
‘비록 넘사벽인 페더러를 따라잡진 못했지만 조코비치나 나달에게 밀리지 않을 정도로 스폰 금액을 많이 받았지.’
물론 현역 프로 선수들 중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실력이 바닥에 깔려있어서 가능한 일이었지만 동양인 특수로 아시아 시장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한 게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역사적으로 그랜드슬램 우승 커리어가 없는 선수가 이런 막대한 수입을 벌어들인 전례가 없었다.
“여기는 내 여자 친구 유즈키야. 두 사람은 처음 만나는 거지?”
“대화를 하는 건 처음인데 얼굴은 이미 알고 있어요. 저번 마이애미 오픈에서 당신을 응원했던 팬 맞죠? 연습 경기를 했던 날요.”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는 걸. 맞아. 분명 그때를 기점으로 연락하기 시작했어. 그런데 너는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관중들이 수 백 명밖에 안 되는 경기장에서 워낙 눈에 띄었던 팬이라서요. 게다가 니시코리도 기억하고 있겠지만 당시 그녀가 엄청 열정적으로 응원했잖아요. 일본 국적을 가진 팬들이 그런 모습을 보이는 건 상당히 드문 일이라서 인상이 깊었어요.”
“어쨌든 서로 인사해. 두 사람 모두 나에게 아주 중요한 사람이니까. 서로 안면을 트는 게 좋을 거야. 앞으로도 대회에서 자주 만나게 될 테니까.”
“이지혁입니다.”
“네. 저는 후지와라 유즈키예요. 니시코리를 잘 부탁드려요.”
니시코리의 주선으로 악수를 하며 짧게 인사를 나누는 두 사람.
그들은 딱히 친해지고 싶은 생각이 거의 없었기에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무언가 얻을 거라도 있다면 모르겠지만 애초에 그런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
“······”
“그럼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연습 경기도 모두 끝났으니까 이제 가볼게. 계속 여기 있다간 바쁜 네 시간을 필요 이상으로 잡아먹겠다. 안 그래도 엄청 바쁠 텐데 말이야.”
“내일 8강이 끝나고 다음 라운드에 진출하게 되면 오늘처럼 연습 경기를 또 부탁해도 될까요?”
“준결승의 상대가 아마 페더러였지? 그는 나랑 같은 올라운더 스타일이니 확실히 오늘 훈련보다는 낫겠구나. 음. 윔블던까지 스케줄도 넉넉하니 알았어.”
크게 고민하지 않고 지혁의 제안을 받아들인 니시코리.
그렇게 모든 용건이 끝나자 그는 배려 차원에서 금방 훈련장의 자리를 비워줬다.
괜히 눈치 없이 구경하면서 부담을 줄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어차피 이곳에 있어봤자 더 이상 유의미한 도움을 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의 경험상 지금은 방해하지 않는 게 지혁에게 가장 좋았다.
우르르.
열 명에 가까운 대인원이 한 번에 훈련장을 빠져나가자 휑한 느낌이 드는 연습 코트.
절반 이상의 사람이 갑자기 사라져서인지 갑자기 공간이 두 배는 더 넓어진 듯한 착시가 느껴졌다.
“니시코리도 갔으니 우리는 남은 훈련이나 이어서 하죠. 코치님, 일정이 얼마나 남았어요?”
“여기서 하는 건 아마 30~40분이면 충분할 거야. 나머진 머레이에 대한 분석과 전략을 검토하는 걸로 시간을 채워야지.”
지혁은 코치의 대답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코트 안으로 들어갔다.
따로 휴식을 취할 필요도 없이 니시코리를 배웅하면서 떨어졌던 체력이 모두 회복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잠깐 동안 조용했던 연습 코트는 임팩트 소리로 다시 시끄러워졌다.
***
롤랑 가로스 8강, 수잔 랭글랜 스타디움.
지혁은 자신에게 첫 패배를 안겨준 머레이가 경기장에 입장하는 모습을 보자 벌써부터 피가 끓어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오늘 경기에서 승리하고 호주 오픈에서 당했던 수모를 갚아줄 수 있다는 생각에 흥분한 것이다.
정말 이 날을 얼마나 기다려왔는지 모른다.
겉으로 티는 내지 않았지만 당시의 패배가 머릿속에 마치 낙인처럼 뚜렷하게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번 경기에서 승리하게 된다면 과거의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무거운 족쇄가 풀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와아아아아!
귀가 따가울 정도로 사방에서 쏟아지는 관중들의 환호성.
지혁과 머레이의 8강 경기는 롤랑에서 두 번째로 규모가 큰 스타디움에서 열렸기에 관중석은 1만 명이 넘는 사람들로 빼곡하게 차 있었다.
빈자리가 있을 법도 하지만 두 선수들이 워낙 인기가 높아서 그런지 모든 티켓이 매진이 된 모양이다.
“설마 롤랑에서 여기까지 올라오다니······. 역시 너는 그랜드슬램에서 유독 강한 스타일인가 보구나. 매번 중요한 대회에서 자신의 기량을 뛰어넘는 성적을 얻는 건 보통 슈퍼 스타들이 가진 특징인데 이대로 몇 년만 더 흐르면 정말 빅3와 근접한 위치까지 올라올 수도 있겠어.”
코트 중앙에 도착하자마자 친근하게 말을 걸어오는 머레이.
지혁이 긴장으로 굳어있는 것과 다르게 그의 목소리는 마치 집 앞에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평온했다.
아무래도 머레이는 오늘 경기를 그리 걱정하지 않는 것 같았다.
4개월 전에 압도적인 차이로 승리를 거뒀던 만큼 이번에도 똑같은 결과가 나올 거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아무리 고강도의 훈련을 한다고 가정해도 짧은 시간 만에 승패에 영향을 줄 만한 기량의 변화가 생길 리 없으니 나름 근거가 있는 판단이다.
실제로 경기가 시작하게 된다면 그가 예상한 것처럼 진행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 말대로 되려면 일단 머레이부터 넘어야겠죠. 당신이 그랜드슬램에서 수문장 역할을 하면서 빅3에게 도전하는 통로를 바위처럼 가로막고 있으니까요.”
“음······. 나도 원해서 그런 역할을 자처한 건 아니야. 최대한 빨리 윔블던 우승을 해서 정체되어 있는 지금 랭킹을 벗어나야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잖아. 중간에 델 포트로라는 괴물도 나타났었고.”
“저도 그런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어요. 그래도 머레이의 재능과 노력이라면 윔블던의 트로피를 얻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그건 제가 장담할 수 있어요.”
머레이는 지혁의 확신하는 듯한 대답을 듣고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빅3를 제외하면 최고의 선수임이 분명함에도 최근 자국에서 받고있는 기대와 아무리 뼈를 깎는 노력을 해도 페더러, 나달, 조코비치와 좁혀지지 않는 격차에 엄청난 압박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건 영국의 유망주가 전멸하다시피 해서 모든 관심이 그에게 쏠린 탓이다.
무려 7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윔블던에서 우승을 한 선수가 한 명도 나오지 않았으니 말이다.
런던에서 열리는 테니스 대회에서 한 번도 우승자를 배출하지 못한 걸 생각하면 솔직히 자존심을 자극할 만도 하다.
아마 개최국의 팬들은 수십억이나 되는 상금을 도둑맞는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네가 그렇게 말해주니 힘이 나는 것 같네. 고마워.”
산처럼 쌓여있던 부담감이 조금은 줄어든 건지 희미한 미소를 보내는 머레이.
무거운 짐을 덜어낸 그 모습에 지혁은 속으로 아차 싶었다.
대회가 끝나고 해도 될 말이었는데 미래의 경험으로 인해 자세한 내막을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가만있지 못했다.
이번 일이 경기에 어떤 영향을 주게 될지 확실하진 않지만 적어도 좋은 방향은 아닐 것 같았다.
“음. 벌써 시간이 많이 지났구나. 슬슬 준비할까?”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벌써 경기 시간이 다 되었다.
간단한 랠리도 없이 8강전을 시작하기 싫다면 지금이라도 준비 운동을 해야 한다.
그렇게 두 선수는 잡담을 끝내고 코트 위로 올라갔다.
***
같은 시간 한국의 KBC 방송국.
팬들이 고대하던 빅 매치가 마침내 시작하자 롤랑 가로스를 중계하던 전 세계의 테니스 채널의 시청률은 급격하게 치솟기 시작했다.
두 명의 천재들 중 누가 다음 라운드에 진출하게 될지 엄청난 관심이 몰렸기 때문이다.
각 나라를 대표하는 선수들이라 당연히 한국과 영국에서는 응원하는 대상이 확실하게 갈려 있었지만 두 나라를 제외한 미국, 아시아, 호주의 팬들은 7:3의 비율로 지혁의 승리를 내심 바라고 있었다.
새로운 뉴 페이스가 고착화된 테니스판에 변화를 가져오길 바란 것이다.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롤랑 가로스 8강, 이지혁 선수와 앤디 머레이의 경기로 찾아뵙습니다.]
[오늘 경기는 대회가 시작될 때부터 한국의 많은 테니스 팬분들이 기대하고 있었는데 정말로 성사되었군요.]
[해외에서도 기사가 많이 나왔으니 그 관심은 단순히 국내 한정이 아닐 겁니다. 이지혁 선수의 인기는 해외에서도 대단하거든요.]
[오. 정말 중계 화면을 통해서 관중들이 응원하는 소리가 들리고 있습니다. 오히려 유럽이 본진인 머레이보다 더 큰 것 같네요.]
ㅡ 이제 지혁이도 네임드 됐나 보네;;
ㅡ ㄹㅇ 장난이 아니라 진짜 그런 거 같은데?? 유럽에서 머레이가 상대인데 저런 반응이면 빅3가 아니면 거의 불가능함. 아, 물론 프랑스 선수 제외했을 때.
ㅡ 오늘 이기면 레전드 쓰는 거냐?? 전문가들은 리벤지 확률 얼마나 된다고 함? 그런데 승산이 있긴 한 건가. 이지혁 호주 오픈에서 3-1로 머레이한테 발렸잖아.
ㅡ 방금 샘프라스가 BBC 채널에서 롤랑을 한정으로 하면 피프티피프티라고 하던데 50%면 할만하지 않나?
ㅡ 아, 이지혁 리버스 포핸드가 주력 무기였지 그러면 진짜 잘하면 이길 수도 있겠는데?
ㅡ 나만 이해 못하는 건가 ;; 너희들 뭔 소리하는 거임?
ㅡ 바닥 재질이 흙이라 이지혁한테 환경이 유리하다고. 원래 클레이 코트는 바운드 후에 탑스핀 횟수가 엄청나게 증가해서 롤랑만 오면 갑자기 미친 듯이 잘하는 선수들 많았음.
ㅡ 그리고 그게 이지혁이라고?
ㅡ ㅇㅇ 작년에 롤랑 가로스에서 우승한 로빈 소더링이라는 살아있는 증거가 있잖아. 얘 랭킹 10위 밖인데 자기보다 순위 높은 상위 탑랭커들 다 이기면서 결승까지 올라갔었음. 뭐 결국에는 페더러한테 3-0으로 참교육당하긴 했지만 ㅋㅋㅋ
ㅡ 직접 여러 대회를 보면 알겠지만 테니스는 코트만 달라져도 완전히 다른 게임이 된다. 오죽하면 일 년 내내 잔디랑 하드 코트 대회를 전부 스킵하면서 클레이만 찾아다니는 탑랭커가 있겠냐 ㅋㅋㅋㅋ
ㅡ 믿기지 않겠지만 실제로 그딴 짓하는 선수가 존재함 ㅋㅋ 그리고 아직 정확한 건 아니지만 지금 이지혁의 플레이 스타일을 생각하면 주력 코트는 높은 확률로 롤랑이 될 걸. 아마 아시아 최초 그랜드슬램 우승자 나오게 되면 십중팔구 여기일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