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롤랑 가로스
탕!!
[서티 러브.]
머레이의 서비스게임으로 막 시작한 경기.
지혁은 세트 초반부터 랠리에서 약간 밀리는 기색을 보였다.
그동안 실력이 많이 늘어서 거의 따라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그건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역시 8강까지 올라오면서 만났던 선수들과 느낌이 완전히 다르구나. 간만에 나보다 더 잘하는 선수를 상대해서 그런지 압박감이 장난 아니네.’
이전 라운드에서 11번 시드를 받은 선수와 경기를 했는데도 상대의 샷에 대응하는 게 만만치 않다.
머레이가 이런 상황을 의도한 건 아닐 테지만 상위 랭커들의 수준이 얼마나 격이 다른지 너무 확실하게 체감이 되었다.
[게임 머레이 1-0. 코트 체인지.]
별다른 반항을 하지 못하고 서비스게임을 간단하게 내준 지혁.
그 모습에 관중들은 아쉬운 목소리를 내며 걱정하는 시선을 보냈다.
그들이 보기에 전력 차가 상당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빅매치가 될 거라고 언론에서 그렇게 광고를 했는데 만약 지금 추세로 경기가 진행된다면 사람들의 예상과 다르게 허무하게 무너질 가능성이 있었다.
[아. 머레이의 포핸드 위너로 첫 번째 서비스게임이 마무리됩니다. 이지혁 선수의 몸이 덜 풀린 걸까요? 평소보다 플레이가 조금 아쉬웠어요.]
[세트 초반이라 괜찮을 겁니다. 게다가 아직 시간이 충분히 남아있잖아요. 그것보다 8강쯤 되니 경기 내용이 정말 엄청나네요. 스트로크의 속도, 코스, 정확도, 타이밍, 스핀량 모두 랭킹이 낮은 선수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합니다.]
[원래 탑10 안에 들어가는 상위 랭커들은 격이 다르긴 했죠. 저는 거기에 우리나라 선수가 포함되어 있다는 게 아직도 실감이 되지 않네요. 1년 전만 해도 한국 선수에게서 이런 경기을 보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하긴 이지혁 선수는 존재하는 자체가 신비한 기적 같은 존재죠.]
[이 해설님, 앞으로 한국 테니스계에 저만한 천재가 다시 나올 수 있을까요?]
[음······. 기존에 있던 인프라를 통해 만들어진 선수가 아니라 많이 어려울 겁니다. 그래도 13세부 주니어 대회에서 주목할 만한 유망주들이 있어서 100위 안에 들어가는 건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적어도 10년은 더 기다려야겠군요. 이지혁 선수처럼 고등학교 1학년부터 퓨처스와 챌린저를 졸업하는 건 매우 특별한 케이스니까 말이에요.]
[솔직히 그 나이 때에 상위 리그에 진출하는 건 한국이 아니라 아시아에서 전례가 없는 사건이죠. 정상적으로 유망주들이 성장한다면 21, 22살쯤에 ATP250 이상의 투어에 나가는 게 맞습니다. 물론 그것도 한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재능이어야 가능합니다만······.]
그렇게 해설자들이 테니스 유망주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무렵.
지혁은 코트를 교체하는 잠깐의 여유를 이용해 앞의 경기를 복기하고 있었다.
곧 시작할 자신의 서비스게임을 어떤 방식으로 플레이할지 고민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전체적인 틀은 미리 짜놨지만 단기 작전은 지금처럼 즉석에서 만들어내는 게 더 효율적이었다.
포인트 두, 세 개를 따내는 건 상황에 맞춰서 빈틈을 찌르는 방법이 가장 잘 먹혔으니 말이다.
‘머레이의 실력이 호주 오픈 당시보다 더 상승한 것 같네······. 성장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구나.’
워낙 완벽에 가까운 실력이라 간과하고 있었는데 머레이는 아직 이십대 초반에 불과했다.
전성기라고 하기에는 한참이나 어린 나이인 것이다.
‘오늘도 어쩔 수 없이 장기전이 되겠어.’
현재 가지고 있는 실력으로 상대를 제압하기 힘드니 빠른 시간 안에 경기를 끝내긴 글렀다.
물론 나달에게 승리를 얻어냈던 비장의 수가 남아있긴 했지만 마스터즈에서 사용하던 방식을 똑같이 사용하기는 현실적으로 힘들었다.
그랜드슬램에서 5세트 경기를 한다는 건 단순하게 2세트가 늘었다는 의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상적으로 플레이해도 나중엔 걷는 게 힘들 정도로 탈진하는 경우가 많은데 벌써 꺼내는 건 말이 안 되지.’
보통 경기가 지연되면 5시간을 훌쩍 넘어간다.
그러니 체력 부담이 큰 기술은 중요한 분기점이나 다음 경기를 걱정할 필요 없는 결승전에서나 뒷 일을 생각하지 않고 마음껏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플레이어 레디. 서브 리.]
복잡한 상념을 끊어내듯 두 번째 서비스게임의 시작 신호를 보내는 체어 엠파이어.
머레이가 리턴을 준비하는 모습에 지혁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하며 공을 하늘 높이 토스했다.
쾅!!
[피프틴 러브]
호주 오픈에서 만났을 때와 서브의 숙련도가 차원이 달라져서일까.
머레이는 그 답지 않게 첫 포인트를 에이스를 내주었다.
‘깜짝 놀란 표정이네. 뭐, 4개월 만에 구속이 10km 넘게 상승했으니 저런 반응도 당연한가.’
지금보다 기량이 훨씬 낮았을 때의 지혁을 상대했던 경험이 있어서 많이 혼란스러운 모양이다.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성장 속도가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포티 피프틴]
그렇게 지혁은 스트로크 대결에서 밀렸지만 서브 하나만큼은 우위에 선 모습을 보였다.
쿵!!
[게임 리 1-1.]
와아아아아!
사이드라인 구석을 때리는 지혁의 백핸드 위너로 1세트의 스코어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자 환호성을 지르는 관중들.
비싼 티켓값을 주고 앞 좌석을 구매한 팬들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이번 경기가 호주 오픈처럼 싱겁게 끝나지 않을 거라는 예감을 받았던 것이다.
[이지혁 선수가 머레이에게 당했던 걸 그대로 되갚아 줍니다. 고속 서브가 제대로 먹혔어요.]
[전광판을 보시면 마지막에 220km를 찍었네요. 상대보다 무려 5km나 더 빠른 속도입니다.]
[단순히 피지컬로 평가했을 때 유리한 건 머레이인데 신기하네요. 왜 이런 결과가 나온 걸까요?]
[서브는 힘만 무식하게 강하다고 잘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전신의 협응력과 라켓 가동범위 그리고 유연함이 관건입니다. 물론 키는 기본적으로 받쳐줘야 하고요.]
ㅡ 첫 번째 게임에서 털리더니 이제 정신 차렸네. 당연히 이래야지. 지혁아 이대로 쭉 가자.
ㅡ 머레이 갑자기 왜 저러냐? 랭킹 4위치고 너무 싱거운데? 대체 저기까지 어떻게 올라간 거냐? 해외 언론에서 빅3를 제외하면 최고의 선수라고 엄청 띄어주던데 다 거품이었음??
ㅡ 나도 이지혁이 머레이보다 더 잘하는 거 같음. 방금 게임보면 8강은 쉽게 통과할 것 같다. 대진 망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개꿀이었네.
ㅡ 아직 세트 초반이잖아 ㅋㅋ 원래 빅 서버 스타일의 선수들은 경기 시작할 때는 엄청 유리함 나중에 적응되면 금방 뒤집어질 걸? 지금도 랠리만 들어가면 포인트 내주고 있잖아.
ㅡ ㅇㅈ 2세트 후반만 가도 에이스 당하는 일 어지간해서 없다. 머레이가 괜히 수문장이겠냐. 아직은 속단하기는 너무 이르다 ;;
ㅡ 오!!! 이지혁이 서비스게임 브레이크해서 2-1됐다!! 이러다가 진짜 이기겠는데??? 이제 브레이크 안 당하게 수비만 하면 되잖아.
ㅡ 윗 댓들 모르면 좀 가만있어라 ㅋㅋㅋ 말하는 거 보면 무슨 프로 선수인 줄 알겠네. 우리 지혁이 클래스 봤냐? 원래 천재한테 그런 상식 안 통한다고 ㅋㅋ
ㅡ 4강은 페더러인데 얘 올라운더 스타일이라서 클레이 상성 빨로 커버 가능하다. 베이스라이너들만 뚫으면 이제 탄탄대로임.
ㅡ 롤랑 가로스 결승은 당연히 나달이겠지? 마이애미 오픈에서도 이겼으니까 잘하면 우승할 수도 있겠다. 아시아 최초 우승 가자아!!!
한국의 테니스 커뮤니티는 이미 지혁이 4강 진출을 확정한 듯이 이틀 뒤에 있는 페더러와의 대진에 대해 얘기를 하고 있었다.
비전문가가 보기에는 자신이 응원하는 선수가 승리하는 게 가능할 거라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실제 지혁의 속내가 어떤지 전혀 모르고 말이다.
[게임 머레이 4-4.]
초반에 우위를 잡은 상황에 기뻐하기도 잠시 결국 경기가 1세트 후반으로 들어가게 되자 지혁에게 기울어져있던 승부의 추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어느새 고속 서브에 익숙해진 머레이가 언제 부진한 모습을 보였냐는 듯 원래 기량을 마음껏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아아아······.
가까운 관중석에서 전해지는 팬들의 아쉬운 한숨 소리.
관중들은 먼저 우세를 잡은 지혁에게 잔뜩 기대를 하고 있었지만 방금 전의 브레이크로 아직 역부족이라는 걸 깨달은 모양이다.
괜히 머레이가 몇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슬럼프 없이 높은 랭킹을 일정하게 유지하고 있었던 게 아니었다.
그는 반짝하고 사라지는 플루크들과 격이 다른 선수였다.
‘이제 막다른 길에 몰려서 선택지가 없어······. 1세트부터 사용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래도 괜히 아껴서 후반에 고생하는 것보다 낫겠지.’
지혁은 머레이가 볼 키즈의 도움을 받아 서브를 준비하는 동안 모든 수단을 동원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런 상황을 돌파하려고 체력을 아껴 놓은 것이다.
쾅!!
다시 코트 위에서 들려오는 임팩트 소리.
지혁이 부작용을 각오하고 경기에 임했던 만큼 그 효과는 확실했다.
[러브 서티.]
“······.”
갑자기 선수가 달라진 듯한 엄청난 슈퍼 플레이가 반복되자 코트는 정적에 휩싸였다.
관중들은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묘기와도 같은 각도로 위닝샷이 연속해서 들어간 게 이해가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지금 같이 실력이 증가할 만한 전조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방금 발리는 정말 엄청났습니다. 면도날 같은 컨트롤로 라인 위를 공략하니 저 대단한 머레이도 속수무책이군요.]
[마치 페더러를 연상되게 하는 샷이었습니다. 저런 숙련도가 어디서 생긴 걸까요. 원래 이지혁 선수는 발리가 다른 기술에 비해 미숙했잖습니까.]
[네. 최근 32강, 16강 경기를 보더라도 그랬었죠. 저도 정확한 이유를 잘 모르겠네요.]
해설자들은 테니스에 대한 지식이 일반인보다 월등했기에 도통 진정을 하지 못했다.
저런 비상식적인 실력을 보여줄 수 있다면 얼마든지 상황을 뒤집을 수 있었다.
머레이라는 어마어마하게 큰 장애물조차 말이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나달에게 이겼을 때도 이런 식으로 경기가 흘러가지 않았나요?]
[아! 맞습니다. 그날은 이지혁 선수가 원래 가지고 있던 기량을 훨씬 뛰어넘는 모습을 보여줬었죠. 그 결과로 인해 마스터즈에서 한국인 최초로 우승까지 달성했고요.]
[아마 오늘도 그런 날인 것 같습니다.]
[······그 말대로 된다면 이번 롤랑에서도 우승할 수 있겠군요.]
[지금 모습을 그대로 유지한다면 충분히 가능할 겁니다. 지금 모습으로 나달조차 쓰러트렸잖아요.]
[제발 그렇게 됐으면 좋겠네요. 그러면 이지혁 선수가 테니스의 역사를 새로 쓰는 거잖아요. 게다가 지금 테니스계의 판도가 바뀌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너무 궁금합니다. 솔직히 지난 10년 동안 빅3가 너무 오래 해 먹었어요.]
[세대가 교체될 때도 됐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