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역대급 테니스 천재가 되었다-92화 (92/241)

92화. 롤랑 가로스

[포티 서티! 이제 세트 포인트입니다! 이번 포인트만 따내면 1세트를 가져갈 수 있어요!]

[이지혁 선수가 슈퍼 플레이로 경기를 완벽하게 주도하고 있네요.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엄청난 실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쿵!!

세트 포인트를 패싱샷으로 장식하는 지혁.

네트 앞에서 발리를 치려고 준비하던 머레이는 역방향으로 날아오는 타구에 손쓸 틈도 없이 득점을 허용했다.

[세트 이지혁.]

와아아아아!

그렇게 1세트가 6-4의 스코어로 종료되자 환호성을 지르는 관중들.

지혁이 경기를 먼저 앞서나가게 되자 경기장의 분위기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음······. 너무 많이 사용한 건가.’

지혁은 벤치에 앉자마자 한 번에 몰려오는 피로감에 짧게 신음을 흘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가벼웠던 몸이 갑자기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기술을 나름 효율적으로 사용했다고 생각했는데 밀리고 있던 상황을 뒤집는 것에 취해서 자신도 모르게 무리를 한 모양이다.

‘지금 상태를 사람들에게 들키면 안 돼. 최대한 멀쩡하게 행동하자.’

대략 2m 거리에 있는 옆 벤치에서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고개를 돌리지 않고 눈동자만 힐끗 움직여 보니 머레이가 눈을 날카롭게 뜨고 탐색하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패배한 원인을 찾고 있는 것 같았다.

멀쩡히 잘 진행되고 있던 경기에서 허무하게 1세트를 내준 게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해가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오! 결국 이지혁 선수가 승리를 가져왔습니다! 시작이 정말 좋아요. 지금처럼만 하면 4강 진출도 문제가 없을 겁니다.]

[9게임과 10게임에서 그림 같은 스트로크가 몇 번이나 나왔습니다. 환상적인 퍼포먼스였어요. 해외에서 어떻게 골든 보이라는 별명이 붙은 건지 알겠군요. 인기가 많을 수밖에 없는 플레이 스타일이에요.]

[이 해설님, 이제 2분의 휴식 시간이 끝나면 다음 세트가 시작합니다. 남은 경기는 어떻게 진행될 것 같나요?]

[지금 기세라면 이지혁 선수가 한동안 우세한 모습을 보일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그랜드슬램은 짧게 끝나도 150분은 훌쩍 넘기니 후반이 되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군요. 보통 선수들 간의 기량 차이는 체력이 떨어지는 순간에 나타나니까요. 저번 호주 오픈에서도 지금과 비슷한 방식으로 패배했었잖아요.]

[그러면 3세트, 길어도 4세트 안에 끝내는 걸 목표로 잡아야겠군요.]

[네. 길어지면 좋을 게 없습니다.]

해설들이 어떤 전략을 사용하는 게 가장 승률이 높을지 의논하고 있을 때.

인터넷 커뮤니티는 지혁의 승리로 인해 축제 같은 분위기가 흘렀다.

이대로 기세를 이어간다면 머레이를 꺾고 준결승에 진출하는 게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희망적인 분위기가 점점 팬들 사이에 퍼지자 댓글은 눈으로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쏟아졌다.

이것만 보더라도 비인기 스포츠 종목이었던 테니스의 위상이 얼마나 올라갔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지금 화력은 야구와 축구를 가볍게 뛰어넘었으니 말이다.

ㅡ 너희 이지혁이 친 발리랑 패싱샷 봤음? 저게 사람이 맞긴 한 건가 반사 신경이랑 동체 시력이 무슨 탈인간급이다. 사실 뜯어보면 사실 로봇 아닐까? 진짜 얘가 고등학생 맞냐고 ㅋㅋㅋ

ㅡ 그런데 원래 이 정도로 잘했었나···. 페나조랑 머레이 경기하는 모습이랑 오버랩되는데 너무 낯설다. 1년 만에 인간계 뚫고 신계로 입성한 건가.

ㅡ 발리, 패싱샷, 백핸드 다운 더 라인. 진짜 종합 선물 세트네 저걸 어떻게 받아 ㅋㅋㅋㅋ

ㅡ 1세트 이겼으니까 이제 다 이긴 거 아님? 인간계 수문장이라고 하더니 머레이도 별 거 없네 ㅋㅋ

ㅡ 난 4-4 됐을 때 지는 줄 알았는데 그새 뭔 일이 일어난 거냐? 저런 상황에서 어중간한 탑랭커도 아니고 머레이한테 역전을 한다고?

ㅡ 원래 이지혁은 위기 상황에서 원래 실력보다 훨씬 더 잘하잖아. 최근 마스터즈 경기에서도 뒤집기 밥 먹듯이 했었음.

ㅡ 내 생각엔 이번 대회는 역대급으로 컨디션이 좋은 거 같다. 롤랑 가로스에서 사고칠 기세임 ㅋㅋ

ㅡ 아, 머레이랑 지혁이 코트 안으로 들어가는 거 보니까 휴식 끝난 것 같음. 나는 이제 테니스 보러 간다.

······.

소란스럽던 테니스 커뮤니티는 2세트가 시작하자마자 정전이 일어난 것 마냥 조용해졌다.

댓글을 쓰던 지혁의 팬들이 전부 롤랑 가로스를 시청하러 떠났기 때문이다.

아마 중간에 휴식 시간이 다시 주어지면 이곳은 원상태로 돌아갈 것이다.

***

2세트 중반 무렵.

지혁은 이전 세트에서 보여줬던 압도적인 실력이 마치 환상인 듯 간신히 경기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만약 원한다면 얼마든지 우세한 상황을 이어나갈 수도 있었지만 체력을 관리하는 차원에서 다시 기술을 봉인한 탓이었다.

사정을 모르는 관중들은 어린 선수가 치기 때문에 여유를 부린다고 생각할 수 있었지만 아무런 대책 없이 찰나를 남용하면 후반에 퍼질 수도 있었다.

지금 전략은 지혁이 고를 수 있는 최선의 선택지인 것이다.

[아웃! 게임 머레이 3-2.]

구석을 노린 스트로크가 라인 밖을 아슬아슬하게 때리자 아웃 선언을 하는 체어 엠파이어.

지혁은 완벽한 자세로 받아쳤다고 생각했는데 실책을 저지른 걸 보니 머레이의 무식할 정도로 강한 힘에 라켓이 뒤로 밀린 모양이다.

그게 아니면 코스가 이상하게 틀어질 리가 없었으니 말이다.

‘이건 들어가야 하는 샷이었는데······. 백핸드 등급이 올랐는데도 머레이와 비교하면 아직 부족하구나. 괜히 다른 탑랭커들이 조코비치와 동급의 백핸드라고 말하는 게 아니었어.’

클레이 코트에서 사용할 무기가 하나 사라지자 표정이 어두워지는 지혁.

탑스핀 스트로크로 재미를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게 전부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라켓을 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스트로크의 무게감이 엄청남에도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만큼 스트로크의 완성도가 높다니.

보통 속도가 빠를수록 바운드 지점을 컨트롤하는 난이도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법인데 역시 머레이는 일반적인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선수였다.

털썩.

5게임이 끝나고 벤치에 앉아서 생각을 이어가는 지혁.

거북이처럼 단단해진 상대의 코트 커버력을 어떤 방법으로 뚫어야 할지 조금 막막하다.

‘아직도 경계가 풀리지 않았네.’

1세트에서 예상을 한참이나 벗어난 퍼포먼스를 보여줬기 때문일까.

머레이는 2세트에 들어가고 나서 방심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다.

냉정하게 판단했을 때 자신이 더 뛰어난 선수인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두 선수 모두 서비스게임을 철저하게 지키는데 집중합니다. 이지혁 선수 아까 전에 발휘했던 실력을 다시 보여줘야 합니다. 지금처럼 경기가 길어지면 좋지 않아요.]

[정확한 의도는 모르겠지만 숨을 고르고 있다는 느낌이 드네요. 4-4가 될 때까지 방어만 하면서 버틸 생각인 모양입니다.]

[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요. 그냥 제 실력만 발휘하면 이길 수 있을 텐데요.]

[분명 의미 없는 행동은 아닐 겁니다. 뭔가 노리는 바가 있을 거예요.]

[동감입니다. 즉흥적인 선택을 하면서 저 위치에 올라갈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요. 냉철한 판단력이 없으면 랭킹 10위를 고작 1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어떻게 찍었겠습니다.]

[그러면 저희는 남은 경기를 주의 깊게 보면서 어떤 전략인지 밝혀보죠.]

쿵!!

[게임 리 3-3.]

‘후······. 서비스게임을 지키는 것도 만만하지 않구나. 위험했어.’

지혁은 포티 서티까지 이어진 접전에서 마침내 승리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경기의 템포가 점점 빨라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서브를 준비하는 시간이 절반으로 줄어들고 코트 위에서 뛰어다니는 활동량은 몇 배로 증가했다.

‘내가 얻는 것에 비해 체력이 훨씬 빨리 떨어지고 있어.’

가능하면 무난하게 스코어를 쌓고 싶었지만 머레이는 지혁의 의도대로 따라갈 생각이 전혀 없는 모양이다.

이건 같이 죽자고 하는 방식의 플레이인데 이러면 누가 이기더라도 다음 4강에서 막대한 페널티를 지고 들어가게 될 것이다.

물론 아무것도 하지 않고 탈락하는 것보다 이게 몇 백배 낫지만 말이다.

‘경기가 지금 같은 분위기로 유지되면 위험하다고 느낀 건가. 아무리 베이스라이너라고 해도 이건 너무 심한데.’

솔직히 지혁은 지금처럼 미친 듯이 뛰어다니면서 5세트까지 따라갈 자신이 없었다.

엄살이 아니라 멀쩡한 상태에서도 체력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찰나까지 사용하면 그게 가능할 리가 없다.

‘피할 방법이 딱히 떠오르지 않아······. 역시 출혈을 감수할 수밖에 없나.’

이러면 원래 계획대로 천천히 빌드업 쌓는 게 의미가 없다.

아마 3-0으로 속전속결로 끝내버리지 않는 이상 후반에 무너질 확률이 매우 높을 것이다.

[플레이 레디. 서브 머레이.]

이후의 경기는 체력전으로 끌고 가려는 게 확실한 건지 질척한 난타전이 되었다.

머레이가 얼마든지 득점을 할 수 있는 유리한 상황에서도 의도적으로 여지를 주면서 랠리를 지속한 것이다.

지혁은 저런 행동에 말리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발목을 잡히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늪으로 빨려 들어가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서비스게임을 포기할 수도 없는 입장이라 마땅한 선택권이 없다.

2세트를 포기하지 않는 이상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후두둑.

이마에서 비가 내리는 것처럼 떨어지는 땀방울.

햇볕이 따갑게 내려쬐는 더운 날씨와 어마어마한 활동량 때문인지 선수들의 옷은 한 번 갈아입었음에도 순식간에 땀으로 흠뻑 젖었다.

[11구, 12구. 허······. 머레이가 장기전으로 가려는 것 같습니다. 랠리가 눈에 띄게 길어졌어요. 이지혁 선수의 발목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습니다.]

[바운드 속도가 느린 클레이 코트의 특성을 잘 살린 전략이네요.]

[네. 아마 미끄러운 잔디 코트라면 절대 통하지 않았을 겁니다. 잔디는 타구가 워낙 낮게 깔리니까요.]

[정말 지독하긴 하네요. 경기 시간이 2배, 아니 3배는 길어진 느낌입니다.]

[머레이의 전략이 얼마나 지속될까요? 설마 끝날 때까지 유지되는 건 아니겠죠?]

[그건 말이 안 되죠. 길어봤자 3세트가 한계일 겁니다. 그가 탑랭커들 중에 체력이 좋은 편에 속한다고 해도 그쯤이면 무조건 퍼져버릴 거예요.]

[······잠깐만요 그 말은 5세트까지 갈 수도 있다는 뜻인가요? 그러면 이지혁 선수가 이겨도 재미가 없을 것 같은데요. 4강에 진출에 성공한다고 해도 만신창이가 될 테니까요.]

[그래서 저 거미줄 같은 코트 커버력을 뚫을 수 있는지가 관건입니다. 이지혁 선수는 앞으로 공격적인 플레이를 해야 돼요.]

[그나마 올라운더 스타일이라 다행이네요. 만약 베이스라이너면 꼼짝없이 말려들어 갈 뻔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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