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롤랑 가로스
지혁과 머레이의 대결은 스트로크 횟수가 늘어나면서 교착 상태에 빠졌다.
2세트를 하는 도중에 경기를 시작한 지 무려 1시간 30분을 돌파한 것이다.
드르르륵-퉁!
강력한 백스핀이 걸린 채 코트 왼쪽으로 떨어지는 백핸드 슬라이스.
그 공격에 베이스라인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지혁은 한 템포 늦게 타구를 따라갔다.
머레이의 슬라이스 자세가 플랫 성향의 스트로크와 전혀 구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임팩트가 되는 마지막 순간까지 페이크 동작을 걸다니 190cm가 넘는 키에 힘도 무식하게 강한데 정말 어울리지 않게 기교파다.
물론 이만한 실력을 가지고 있어서 랭킹 4위를 유지하고 있는 거겠지만 말이다.
촤아아악-
클레이 코트 위를 미끄러지면서 손바닥 높이로 낮게 바운드되는 공을 퍼올리는 지혁.
라켓에 맞은 타구는 드롭샷같이 스핀이 걸린 게 아니라서 완만한 포물선을 그리며 네트를 아슬아슬하게 넘어갔다.
“하앗!”
탕!!
잠시 후, 무너진 균형을 회복할 여유도 없이 네트 앞쪽에서 임팩트 소리가 들리자 지혁은 곧바로 본래 있었던 베이스라인으로 빠르게 돌아갔다.
굳이 스트로크 궤적을 확인하지 않아도 대충 어느 위치에 떨어질지 예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목표 지점까지 절반 정도 달려왔을 때쯤, 타구가 라인 위로 바운드되는 장면이 보였다.
나름 빠르게 센터 마크로 복귀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늦은 모양이다.
[아, 14구의 랠리 끝에 서비스게임이 종료되네요. 게임 스코어 5-4. 보통 슬라이스와 발리는 에러를 저지르거나 카운터를 당하기 딱 좋은 기술인데 숙련도가 굉장합니다.]
[두 기술은 머레이의 특기로 유명하죠. 그는 세계 최고의 베이스라이너이면서도 공격력이 어떤 탑랭커에게도 밀리지 않을 만큼 대단합니다.]
[지금 경기 시간이 막 100분을 넘었네요. 만약 지금 같은 추세로 5세트까지 이어진다면 경기가 끝날 때까지 최소 5시간 정도는 각오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매 포인트가 끔찍하게 길어요.]
[저는 선수들이 탈진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런던의 현재 기온이 25도가 넘잖아요.]
[맞습니다. 절대 쾌적한 환경이 아니죠. 저녁에 경기가 열렸다면 좋았을 텐데 이건 조금 아쉽네요.]
2세트 9게임이 끝나자마자 지혁은 지친 몸을 회복하기 위해 바나나를 우물거리며 씹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숨이 턱 끝까지 차 올라서 뭔가 먹을 기분이 아니었지만 주기적으로 에너지원을 공급해줘야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랜 경험상 아무것도 섭취하지 않고 4~5시간이 넘게 경기를 하다 보면 무조건 근육에 경련이 일어났다.
그런 불상사를 방지하려면 억지로라도 뭔가를 먹어야 했다.
‘후······. 벌써 몸이 무거운 것 같은데 이건 내가 생각했던 최악의 상황이야. 가장 아픈 부분을 찔러오다니 역시 무서운 판단력이네.’
이제 스코어가 5-4라서 2세트를 승리하려면 듀스나 타이브레이크를 치러야 한다.
두 가지 선택지 중에 뭐가 됐든 최소한 20~30분은 잡아먹을 것이다.
[플레이어 레디. 서브 리.]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간 휴식 시간.
겨우 90초 동안 벤치에 앉아있는 걸로 지친 몸을 회복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쿵쿵거리는 심장도 전혀 진정되지 않았지만 경기에서 이기려면 이런 사소한 건 견뎌내야 한다.
후반이 되면 지금보다 훨씬 힘들어질 테니 말이다.
솔직히 폐와 심장이 터질 것 같거나 다리를 인두로 지지는 듯한 고통을 참으며 경기를 뛴 적도 있는데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과거에는 실력이 부족해서 체력과 근성으로 밀어붙였으니까. 그 대가로 돌이킬 수 없는 부상을 입었지만.’
성적을 얻기 위해 부상의 위험을 감수한 결과였다.
아마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부족한 재능으로 ATP랭킹 50위를 찍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이제 선수 수명을 깎아가며 미련하게 플레이할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지금의 실력을 가지고 그런 상황이 닥칠지도 의문이다.
지혁의 피지컬은 최소한도로 잡아도 경기를 5시간 이상을 뛰어야 후유증이 남을 데미지가 쌓이기 시작해서 애초에 막다른 길에 몰릴 일이 매우 드물었으니.
***
쿵!!
[게임 리 5-5. 듀스.]
세트를 절대 양보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일까.
지혁은 자신의 서비스게임을 무사히 지켜냈다.
중간에 브레이크를 당할 위기가 몇 번이나 있었지만 위기 상황에서 사용하기 위해 아껴둔 찰나를 꺼내 들면서 머레이가 날린 회심의 공격을 무사히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브레이크가 아슬아슬하게 실패했는데 평온한 표정이네. 아쉽지도 않나.’
절호의 기회를 놓친 것에 상심할 법도 한데 멀쩡하게 묵묵히 서브를 준비하는 걸 보니 머레이는 경기가 길어지는 상황을 내심 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단기적인 이득을 얻는 것보다 나중에 어마어마한 규모로 돌아올 세금을 기대하는 모양이다.
[아, 결국 듀스까지 가네요. 두 선수 모두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습니다.]
[어째서 서로 결정타를 날리지 못하는 걸까요. 공격력이 부족한 것도 아닌데 말이죠.]
[코트 커버력에 일가견이 있는 선수들이라 그럴 겁니다. 워낙 필사적으로 플레이를 하는 이유도 있고요. 그랜드슬램 4강과 막대한 상금, ATP포인트 720점이 걸린 경기라 열정이 보통이 아니네요.]
[위험한 외줄 타기를 하는 느낌입니다. 타이브레이크에 들어가면 결국 승부가 갈릴 텐데 과연 누가 2세트를 가져가게 될까요.]
[저는 이지혁 선수의 손을 들어주고 싶습니다. 단기 결전은 단순히 기량이 높은 것보다 순발력이 뛰어난 쪽이 이기는 경우가 많거든요.]
[하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기발한 샷을 많이 치긴 하죠. 스트로크 성공률도 상당히 높은 편이고요.]
[뭐, 지금 스코어는 5-5니 상황을 조금 더 두고 봅시다. 7-5로 끝나면 타이브레이크는 성립하지도 않을 테니 말이에요.]
[글쎄요. 선수들의 진지한 분위기를 보면 듀스로 싱겁게 끝나진 않을 것 같네요.]
2세트의 경기는 해설자가 장담했던 것처럼 결국 더 이상 물러날 수 없는 마지막 순간까지 도달했다.
그렇게 타이브레이크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 휴식 시간.
지혁은 최선의 상태를 만들기 위해 상의를 탈의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땀으로 젖어서 납덩이처럼 무거운 상의가 사라지자 몸이 한층 가벼워진 기분이다.
‘진작 갈아입을 걸 그랬네.’
[타이브레이크. 서브 머레이.]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시작된 2세트의 마지막 게임.
관전하고 있던 1만 명의 팬들은 침을 꿀꺽 삼키면서 시선을 집중시켰다.
본능적으로 이번 타이브레이크가 4강에서 가장 하이라이트가 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장 많은 것이 걸려있는 순간에 선수들이 모든 걸 쏟아부을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
같은 시간 관중석.
가장 뷰가 좋은 좌석에서 앉아있던 니시코리는 긴장된 표정으로 코트 위로 올라가는 지혁과 머레이에게 눈을 때지 못했다.
잘하면 오늘 경기가 테니스계에서 역사적인 순간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케이, 골든 보이에게 왜 그렇게 신경을 쓰는 거야? 실력이 더 뛰어난 선수들도 많잖아.”
정신이 완전히 팔려있는 니시코리에게 의문이 담긴 표정으로 질문하는 유즈키.
그녀는 자신의 남자친구가 필요 이상으로 지혁에게 집착하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저 녀석은 다른 평범한 선수들이랑 다르거든.”
“어디가?”
“음. 네가 만약 테니스 선수로 대회를 뛰어봤다면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을 텐데······. 리가 가지고 있는 잠재력은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해. 아마 역사상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걸.”
“케이도 일본, 아니 아시아에서 가장 뛰어난 유망주잖아. 따지고 보면 골든 보이와 거의 비슷하지 않아? 게다가 테니스는 단순하게 나이만 먹는다고 실력이 선형적으로 늘어나는 것도 아니잖아. 지금 반짝하고 뜨고 있어도 언제 성장이 멈출지도 모르고 말이야.”
“아니. 나를 높게 사주는 건 고맙지만 저 녀석의 재능은 나와 비교가 되지 않아. 그리고 만약 네가 말한 것처럼 불확실한 재능의 선수였다면 빅3와 레전드 선수들에게 주목을 받지도 않았을 거야. 정점을 찍은 거물들이 리와 친분을 쌓으려고 하는 건 나처럼 뭔가 특별한 점을 발견······.”
탕!!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던 도중 시작한 타이브레이크.
니시코리는 혹시 한 장면이라도 놓칠까 걱정해 바로 설명하는 것을 중단하고 코트 쪽으로 고개를 빠르게 돌렸다.
유즈키가 그 행동 때문에 뾰로통한 얼굴로 입을 삐죽이는 것도 모르고 말이다.
아마 경기가 끝나고 밤이 되면 그는 자신의 무심한 행동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하앗!”
쿵!!
무시무시한 속도로 베이스라인 끝자락을 때리는 머레이의 백핸드 스트로크.
자로 잰 것처럼 정확하게 선 위를 공략하는 공격에 지혁은 헛숨을 들이키며 라켓을 뻗었다.
하지만 그런 노력을 했음에도 거리가 모자랐는지 공은 한 뼘이 넘는 큰 차이로 지혁의 옆을 지나쳤다.
[1-0. 머레이!]
“와! 케이, 방금 봤어? 나 저런 스트로크는 오늘 처음 봐. 내가 이때까지 경험했던 것들 중에 가장 수준이 높은 것 같아.”
“그래. 언제 봐도 머레이의 백핸드는 일품이네. 흠잡을 데가 전혀 없어. 아마 저것보다 더 좋은 백핸드를 칠 수 있는 선수는 조코비치밖에 없을 걸. 네가 제대로 본 게 맞아.”
1-0이 되자 서브권을 바꾸는 선수들.
타이브레이크의 규칙상 머레이가 1번 했으니 이제 2번씩 번갈아 가면서 서브 차례가 돌아올 것이다.
스코어의 총합이 6이 되면 코트를 교체하고 말이다.
타이브레이크는 상당히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기에 잡담을 나눌 여유도 없었다.
“흐읍!”
쾅!!
[1-1. 리!]
[SERVE SPEED 229km/h]
우와아아아아!
“헉. 229km? 기록 경신을 했잖아. 2세트 후반에 갑자기 저런 서브를 친다고?”
“······에이스라. 확실히 서브를 잘하긴 하네. 그런데 고등학생의 힘이 왜 저렇게 강한 거야. 저건 사기잖아.”
경악한 표정을 짓는 니시코리와 관중들.
현역으로 활동하는 선수들 중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강서브에 경기장은 술렁이는 목소리로 가득 찼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갑자기 속도가 5km 이상 빨라졌기 때문이다.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 분위기에 지혁은 검지 손가락을 입술 위에 올렸다.
그러자 관중들이 그 제스처의 의미를 알아차리고 떠드는 것을 멈추었다.
타이브레이크처럼 중요한 순간에서 선수들의 집중력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쾅!!
그렇게 경기장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곧바로 서브를 속행하는 지혁.
니시코리는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자세를 보고 짧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 갑자기 빨라진 이유가 있었구나. 저런 방법을 쓸 줄이야. 각오를 단단히 했나 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