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롤랑 가로스
1-1의 스코어에서 지혁의 두 번째 서브는 이전처럼 에이스를 따내지 못했다.
아무래도 머레이가 똑같은 방법으로 당할 만큼 만만한 선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리턴이 힘없게 돌아오는 걸 보니 영향이 완전히 없는 건 아닌 모양이다.
퉁!
네트 앞으로 달려가며 라켓을 수직으로 내려치는 지혁.
공을 쪼개버릴 듯한 스윙을 하자 곧 스트링에서 드르륵하고 긁히는 소리가 들렸다.
백스핀이 잔뜩 걸린 드롭샷을 사용한 것이다.
스트로크를 비스듬히 깎아 쳤기에 타구의 속도 자체는 아주 느렸다.
물론 이 정도만 하더라도 절대 느린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2-1. 리!]
“케이, 서브가 갑자기 빨라진 이유를 알고 있는 것 같던데 이유가 도대체 뭐야? 혹시 골든 보이의 특별한 비밀이라도 알고 있는 거야?”
유즈키는 어제 훈련을 도와주면서 뭔가 알아차린 거라고 생각한 건지 눈을 반짝이며 질문했다.
하지만 웃으며 고개를 젓는 니시코리의 모습을 보면 그녀의 예상은 틀린 것 같았다.
“음. 사실 비밀이라고 할 것까진 아니야. 그냥 라켓의 텐션을 줄였을 뿐인 걸.”
“아! 그럼 서브의 위력이 올라갔던 원인이······.”“컨트롤을 희생해서 파워에 집중한 거지. 하여튼 재밌는 녀석이야. 저런 미친 짓거리를 실전에서 써먹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거든. 따라 할 엄두도 나지 않는 기괴한 작전이야.”
“원하는 순간에 마음껏 속도를 올릴 수 있다니 내가 듣기엔 엄청 좋은 방법인 것 같은데 혹시 내가 모르는 문제라도 있는 거야?”
“단순하게 이론만 따지면 그렇지. 하지만 애써 만들어놓은 감각이 완전히 망가져버려서 저런 짓을 하는 선수는 아무도 없어. 선수들이 로봇도 아니고 스위치를 누른 것처럼 스트링 텐션에 가장 적합한 자세를 자유자재로 바꾸는 게 가능할 리 없잖아. 짧게는 10년 길면 20년 이상을 뼈를 깎는 노력을 통해 최고의 자세를 고정시켜 놓은 건데. 아마 저 녀석도 잠깐 재미를 보다가 나중에 고생 좀 할 거야. 저 플레이의 여파로 샷 감각이 고장 날 테니 말이야.”
“라인 안 쪽으로만 넣으면 될 거 같은데······. 그렇게 영향이 크다고?”
“테니스는 자세가 1cm만 달라져도 인이 아웃으로 변해. 유즈키가 생각하는 것보다 엄청 섬세한 작업이라고.”
그렇게 두 사람이 지혁의 새로운 작전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머레이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깜짝 전략으로 두 포인트를 잃고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직접 서브와 스트로크를 받고 있는 당사자라서 라켓의 텐션이 다르다는 걸 그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솔직히 샷의 느낌이 너무 달라져서 모를 수가 없었다.
‘이런 잔재주를 자신에게 써먹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나 보네. 뭐, 무려 ATP랭킹 4위니까 그럴 수도 있지.’
아마 아마추어도 아닌 자신과 비슷한 실력의 랭커가 이 짓거리를 하는 걸 경험해본 적이 없을 것이다.
지혁도 실제로 만난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 말이다.
솔직히 경기 성적에 남은 인생이 달린 상황에서 어떤 선수가 이런 선택을 하겠는가.
‘나도 어플이 없었더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짓이긴 하지.’
애초에 이번 전략은 어떤 조건에서도 실력이 유지되는 어플의 능력이 있어서 가능했다.
물론 그렇다고해서 연습 없이 바로 실전에 투입한 건 아니었다.
만약 그게 가능했다면 첫 메이저 대회 데뷔전이었던 호주 오픈에서 곧바로 사용했을 것이다.
어쨌든 몇 개월의 훈련 기간을 거쳐서 롤랑에서 처음으로 공개된 무기는 지혁이 만족할만한 효과를 발휘했다.
쾅!!
당황스러운 마음이 어느 정도 정리된 건지 멈춰있던 타이브레이크를 다시 재개하는 머레이.
이후의 경기는 지혁이 예상했던 대로 스트로크 컨트롤을 공략해서 실책을 유도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상식적으로 그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으니 말이다.
아마 제풀에 지쳐서 포기하게 만들 생각이겠지.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는 얼굴을 보니 공짜 승리를 얻을 생각에 기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정석적인 방법을 꺼냈구나. 리가 어떻게 대처할지 궁금하네. 자신 있게 시작했으니 분명 대책을 가지고 있을 텐데 말이야.”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이 그냥 서브만 하고 리턴할 때 라켓을 바꾸면 간단하게 해결되는 거 아니야?”
“아니, 라켓이 망가지지 않는 이상 벤치에 들어가기 전에 교체하는 건 금지되어 있어.”
“그러면 일부로 망가트리면 되겠네. 경기가 안풀리면 화풀이로 라켓을 부수는 선수들이 엄청 많잖아.”
“벌금이 라켓 한 개당 300달러밖에 되지 않아서 그 말대로 하는 것도 가능하긴 해. 하지만 매너가 없는 행동이라 보기 안 좋잖아. 게다가 의도 자체도 엄청 불순하고. 리가 팬들에게 비난을 받으면서 그런 행동을 할 거라고 생각되진 않아. 앞으로 그랜드슬램에 참가할 기회가 없는 것도 아니잖아.”
“확실히 그런 행동으로 이긴다고 해도 인정받지 못할 것 같긴 해.”
[4-2 리!]
니시코리는 뭔가 기발한 방법이 있을 거라 유즈키에게 말했지만 지혁은 클래식한 기존의 방식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포인트를 차곡차곡 쌓아갔다.
그러자 컨트롤이 떨어질 거라 생각했던 테니스 전문가들은 넋이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그들은 예상을 벗어난 지금 상황에 엄청난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말도 안 돼. 저딴 라켓을 사용하면서 기량이 그대로 유지하고 있잖아.”
“······분명 임팩트 감각이 달라져서 익숙하지 않을 텐데 어떻게 한 거지?”
“텐션이 그대로인 거 아니야? 저게 정말로 가능하다고?”
“혹시 저 라켓에 어울리는 최적의 자세를 이미 찾은 게 아닐까? 기존의 감각은 그대로 유지한 채로 말이야.”
“농담하지마 네 말이 맞다면 골든 보이의 재능이 얼마나 대단하다는 거야······. 그건 인간이 아니잖아.”
여러 가지 추측이 쏟아져서 그런지 전문가들의 의견들은 하나로 정리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혼란스러운 분위기를 보면 짧은 시간 안에 결론이 나오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어차피 경기가 진행될수록 내막이 밝혀질 테니 상관없었다.
[인! 세트 리!]
와아아아아!
결국 7-4까지 간 접전 끝에 타이브레이크에서 승리한 지혁.
평범한 관중들은 단순히 선수들의 전력을 다한 대결에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지만 테니스를 잘 알고 있는 소수의 사람들의 눈빛은 불가사의한 생물을 보는 것처럼 변해 있었다.
뭐든지 아는 만큼 보이기 마련이었다.
‘출혈이 크긴 해도 이 정도면 잘 막았어. 타이브레이크에서 사용했던 전략도 공식 경기에서 보여주는 게 처음인데 상당히 잘 먹혔고’
무리를 한 탓에 경련이 일어나는 지혁의 다리.
하지만 그는 지친 상태를 들키지 않기 위해 크게 내색하지 않고 벤치로 태연한 태도로 걸어갔다.
세트가 끝나고 120초의 휴식 시간이 주어졌지만 머레이는 스트로크를 받던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이해하는데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다.
털썩.
자리에 앉자마자 수건으로 무릎을 가리는 지혁.
그러자 지금까지 필사적인 의지로 통제하고 있던 다리가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관중석에서 보기에는 티가 거의 나지 않았지만 1m 거리의 볼 키즈는 충분히 알아챌 만한 떨림이다.
빤히 쳐다보는 시선에 지혁이 비밀로 해달라는 듯이 눈 짓을 하자 볼 키즈가 걱정하는 눈빛을 보내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된 이상 무슨 일이 있어도 3세트 안에 끝내야 되겠어.’
지금 실력을 유지한 채로 4세트까지 갈 자신이 없다.
지금처럼 체력 관리가 엉망인 건 위협적인 상황을 막느라 기술을 너무 많이 사용해서였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머레이의 기량이 기존에 가정했던 것보다 훨씬 높아서 어쩔 수 없었다.
패배하지 않으려고 한계치 이상으로 체력을 사용한 것이다.
“타이브레이크는 결정력이 높은 리가 가져갈 거라 생각하긴 했는데 설마 이런 식으로 승리할 줄이야. 리에 대한 평가를 다시 수정해야겠어.”
나름 높게 평가했다고 생각했음에도 예상을 한참이나 초월하는 재능에 니시코리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아무리 친분이 있다고 해도 앞으로 높은 확률로 경쟁자가 될 선수가 대단하다는 걸 마냥 좋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조만간 대회에서 만나게 되면 저런 괴물을 직접 상대해야 하는 입장이라 벌써부터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다.
카멜레온처럼 변하는 지혁에게 이길 방법이 도통 떠오르지 않아서였다.
“케이, 골든 보이의 컨트롤이 떨어진 게 맞아? 내가 보기에는 큰 차이가 없는 것 같아.”
“아주 약간이지만 스트로크 정확도가 감소하긴 했어. 그런데 거의 티가 나지 않을 정도라서 의미가 없을 정도야.”
“응? 스트링의 텐션을 낮추면 분명 컨트롤을 조절하기 힘들다고 했잖아?”
“맞아. 통상적으로 그렇지. 문제는 저 녀석이 재능으로 그런 패널티를 극복했다는 거야. 나도 저런 게 실제로 가능한 줄 오늘 알았어. 리가 창의적인 플레이를 하는 걸로 유명하긴 했지만 이건 기대를 넘어섰어. 오늘 경기가 끝나면 언론에서 난리가 날 거야.”
“저게 대단한 거야?”
“엄청. 훈련을 하는데 막대한 시간을 투자한다고 가정해도 평범한 선수라면 불가능할 수도 있어. 밸런스에 민감하면 애초에 시도조차 힘들고.”
니시코리는 어딘가 흥분한 어조로 지혁에 대한 극찬을 이어갔다.
이건 테니스를 업으로 하는 사람에게 그만큼 커다란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의 반응처럼 중계를 하고 있던 방송국의 상황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이지혁 선수! 정말 무서운 재능입니다! 천재라는 수식어가 전혀 아깝지 않아요!]
[역시 역대급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가 있습니다. 아시아가 아니라 전 세계를 샅샅이 뒤져봐도 현재 활동하는 프로들 중에 저만한 잠재력을 가진 선수는 없어요.]
[이제 세트 스코어 2-0인데요. 롤랑 가로스 4강까지 고작 1세트만 남았습니다.]
[네. 고지가 코앞이네요. 지금 경기가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다음 라운드에 진출하는 게 그리 어렵지 않아 보입니다. 많은 팬분들이 염원하던 황제와의 대결이 성사되는 거예요.]
[오늘 경기에서 무시무시한 저력을 보여준 이지혁 선수라면 충분히 기적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잘하면 롤랑 최연소 우승기록을 갈아치울 수도 있겠어요.]
[준결승의 로저 페더러, 결승의 라파엘 나달. 만약 두 선수를 꺾는다면 전설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정말 상상만 해도 짜릿하네요.]
지혁이 상식을 파괴하는 플레이 스타일을 선보였기 때문일까.
200여국으로 송출되고 있는 롤랑 가로스 8강은 아직 경기가 끝나지 않았음에도 후폭풍이 엄청났다.
빅3를 위협하는 신예의 등장과 불가능에 가까운 퍼포먼스가 맞물려 어마어마한 시너지를 만든 것이다.
거기다 기존의 인기가 합쳐져 이제 테니스를 시청하는 팬이라면 지혁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지경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