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롤랑 가로스
2세트의 타이브레이크가 끝나고 대략 한 시간 후.
경기는 마지막 매치 포인트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4장 진출의 확정이 결정되는 중요한 순간이라 그런지 관중들은 잔뜩 상기된 얼굴로 입을 가리고 있었다.
혹시 자신의 숨소리가 서브를 하는데 방해가 될까 걱정한 것이다.
그렇게 만 명의 사람들이 한 공간에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숙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하앗!”
쾅!!
지혁의 기합 소리가 들리고 얼마 후, 전광판에 찍히는 218km의 속도.
번개처럼 날아간 서브는 클레이 코트 위에 둥그런 자국을 남기며 베이스라인을 지나쳤다.
워낙 깔끔하게 들어가서 그런지 머레이는 챌린지를 따로 요구하지 않았다.
어차피 결과가 확실했기에 의미 없는 일을 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게임 세트! 매치 리! 6-4, 7-6(7-4), 7-5.]
짝짝짝짝짝짝.
체어 엠파이어의 경기 종료 선언이 스피커를 통해 전해지자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기립 박수를 치는 관중들.
롤랑의 다른 경기들보다 훨씬 뜨거운 반응인 걸 보면 아무래도 언더독의 반란이 성공한 게 팬들의 마음에 든 모양이다.
뻔한 결과보다 드라마가 만들어지는 게 대회를 관전하는 입장에서 훨씬 더 재미있으니 말이다.
[마침내 이지혁 선수의 롤랑 가로스 준결승 진출 확정됐습니다! 랭킹 4위의 앤디 머레이를 3-0의 스코어로 완벽하게 제압하고 다음 라운드에 진출합니다! 호주 오픈의 복수를 제대로 해줬어요!]
[아무리 클레이 코트라고 하지만 리벤지 매치의 결과가 이렇게 원사이드하게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 경기 내용이 너무 좋았어요.]
[네. 전문가들이 예측한 승리 시나리오를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오늘 보여준 경기력은 마이애미 오픈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을 것 같네요. 마치 나달에게 승리했을 당시의 모습이 그대로 재연되는 느낌이었습니다.]
[4강의 상대는 테니스의 황제, 로저 페더러인데요. 두 선수는 이번이 첫 경기였죠?]
[공식적인 기록이 없으니 맞습니다. 지난 1년간 이지혁 선수의 메이저 대회 성적은 랭킹이 높은 유망주들 중 비교할 대상이 없을 정도로 좋았지만 무슨 일인지 따로 매치가 잡힌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한동안 대화를 이어가던 해설자들은 갑자기 얼마 전 포털사이트를 점령했던 기사가 생각난 건지 화제를 돌렸다.
언론을 통해 알려진 바에 의하면 지혁과 페더러 사이에는 약간의 접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별다른 사연이 없이 경기를 중계하는 것보다 이렇게 스토리를 만들어 주는 게 시청자들이 몰입하기 좋았다.
겸사겸사 시청률도 챙기고 말이다.
해설자들의 능숙한 진행에 스포츠국의 PD도 흡족했는지 중계석으로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런데 롤랑 가로스가 개최되기 직전에 바브린카를 포함해 3명의 선수들이 같이 합동 훈련을 했다는 기사가 있었죠.]
[네. 이미 정점에 있는 선수와 다음 세대에 그 자리를 이어받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유망주의 만남이라서 해외 언론들이 꽤 떠들썩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허. 아이러니한 상황이네요. 서로 도움을 주고받던 관계에서 이제 반드시 쓰러트려야 할 적이 되었다라······. 페더러는 이런 상황이 생길 거라는 걸 알고 있었을까요?]
[저는 그가 머레이를 꺾는 대이변을 예상하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저희도 이번 결과를 보고 깜짝 놀랐잖아요.]
[확실히 오늘 경기는 선수들의 기량이나 무게감의 차이가 크긴 했죠.]
비록 방송을 보고 있던 대부분의 시청자들도 동의하는 의견이었지만 그들의 생각과 다르게 지혁과 페더러는 합동 훈련을 하면서 준결승에서 만나게 될 확률이 내심 높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첫날 연습 경기를 하고 난 직후, 서로가 쉽게 탈락하지 않을 거라고 본능적으로 느꼈던 것이다.
그럼에도 개인 코트로 초대했으니 페더러의 배포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었다.
이건 무조건 승리할 거라는 자신감이 있어야 가능한 행동이었다.
[음. 여기 기록을 보면 작년부터 올해 호주 오픈까지 페더러의 그랜드슬램 우승 횟수는 3회, 준우승은 2회인데요. 수치로 확인해 보니 역시 테니스의 황제라 불릴만한 성적입니다.]
[만약 다음 경기에서 페더러를 꺾는다면 오늘보다 파장이 훨씬 크겠어요. 마이애미 오픈에서 빅3를 무찌르고 우승한 건 솔직히 성과가 축소되는 경향이 있었잖아요.]
[하긴 그랜드슬램에 임하는 탑랭커들의 자세는 마스터즈 대회와 차원이 달라서 완급 조절이라는 핑계를 대기도 힘들죠.]
[상상만 해도 짜릿한 일입니다. 정말로 그런 기적이 일어나면 좋겠네요. 이지혁 선수의 다음 경기가 시작하는 시간은······.]
그렇게 롤랑 가로스의 중계권을 따낸 공중파 방송국들은 지혁의 승리 인터뷰가 시작하기도 전에 다양한 매체를 통해 다음 빅 매치를 대대적으로 홍보하기 시작했다.
그랜드슬램 준결승에서 세계 최고의 선수와 아시아를 대표하는 테니스 스타가 붙게 되는 사상 최대의 이벤트가 만들어졌는데 관심으로 먹고사는 그들이 흥행이 보장된 이번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하나, 둘씩 기사가 쏟아지기 시작하자 인터넷에서 암표의 가격은 천정부지로 상승할 조짐을 보였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티켓 되팔이들이 돈 냄새를 맡은 것이다.
그리고 그나마 남아있던 물량도 롤랑을 시청하고 있던 팬들에 의해 순식간에 물량이 사라져버렸다.
***
시간이 조금 지나 관중들의 흥분이 어느 정도 가라앉게 된 수잔 렝글렌 스타디움.
떠들썩한 분위기의 인파 속에서 니시코리는 코트 중앙에서 지혁과 머레이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어린 친구가 한참이나 앞서 가게 된 모습에 정체 모를 감정을 느꼈기 때문이다.
테니스 아카데미 시절부터 지금의 프로 생활까지 항상 경쟁자들을 짓밟으며 올라왔던 그는 지금의 기분이 낯설었지만 사실 이건 열등감이었다.
자신보다 월등히 뛰어난 사람에게 누구나 가지게 되는 감정 말이다.
그나마 니시코리쯤 되는 선수여서 열등감이라도 느꼈지 아마 평범한 재능의 선수였다면 도저히 따라잡을 엄두가 나지 않아서 좌절감밖에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어딜 감히 50위 아래의 탑랭커가 빅3에게 경쟁심을 느끼겠는가.
실제로 절대다수의 그랜드슬램 참가자들은 페더러, 나달, 조코비치를 단지 천재지변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
“시간만 있으면 결국 따라잡을 수 있을 거야. 나는 케이의 잠재력을 믿어.”
제법 오랜 시간 동안 니시코리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자 어두운 분위기를 감지한 것인지 손을 잡으며 속삭이는 유즈키.
사랑하는 사람의 굳건한 믿음에 니시코리의 굳어있던 표정이 아주 약간이지만 풀어졌다.
“······그래. 내가 무슨 수를 써도 이길 수 없는 선수들은 항상 있어 왔어. 그리고 오늘 그게 한 명 더 늘었을 뿐이야. 결국 테니스의 신들이 머무르고 있는 정상의 자리를 탈환하려면 저 녀석도 내가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겠지.”
“이제야 내가 알던 일본 최고의 천재로 돌아왔네. 케이는 지금처럼 자신감 있는 모습이 멋있어.”
“후······. 걱정해줘서 고마워.”
“케이, 내일 골든 보이의 훈련은 도와줄 거야? 만약 페더러까지 이기게 되면 따라가기 힘든 위치까지 올라갈 텐데?”
“응. 약속했으니까. 게다가 내가 뛰어넘어야 할 녀석이 더 높은 곳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좋지. 승리했을 때의 보상이 더 커질 테니까.”
유즈키의 도움으로 패배감으로 가득했던 마음을 대부분 정리한 니시코리.
그는 더 이상 이 자리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건지 지혁의 인터뷰에 집중하고 있는 관중들을 지나쳐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코트의 중심에서 팬들의 뜨거운 찬사를 받고 있는 괴물을 따라잡으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기 때문이다.
최근 여자 친구를 사귀면서 나태해졌던 니시코리의 마음가짐은 어느새 처음 프로에 데뷔했을 때처럼 단단해져 있었다.
지혁이 머레이라는 어마어마한 거물을 잡아낸 것이 그에게 엄청난 동기부여가 된 것이다.
***
[이지혁, 머레이를 3-0으로 격파하고 롤랑 가로스 4강 진출 확정.]
[테니스계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킨 신예는 과연 황제를 쓰러트리고 흙신, 나달에게 도전할 수 있을까?]
[세계 최고의 재능을 가진 유망주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하이앤드 시계 브랜드들. IMG에서 현재 리X드밀과 로렉X와 협의 중이라고 전해져.]
[여성 팬들에게 가장 섹시한 테니스 선수로 선정된 이지혁.]
[롤랑 가로스 8강에서 나온 의외의 결과에 유럽과 미국의 스타들이 연이어 호평을 남겨.]
[앤디 머레이, ”골든 보이의 실력이 예상보다 대단했다. 그를 너무 과소평가한 것 같다.“]
[로저 페더러, ”롤랑 가로스에서 이번 경기가 성사되는 걸 기대하고 있었다. 리가 머레이를 상대할 때처럼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길 바란다.“]
[라파엘 나달, ”리와 페더러 둘 중 누가 결승전에 올라오든 상관 없다. 마스터즈 대회에서 확인했듯이 어차피 결과는 똑같을 것.“]
8강 경기가 끝나고 다음 날, 롤랑 가로스의 연습 코트.
지혁은 니시코리와 가벼운 훈련을 하면서 부쩍 늘어난 인지도를 체감하고 있었다.
물론 이전에도 스타라고 하기에 부족하지 않았지만 지금 팬들이 보여주고 있는 반응은 마치 빅3를 눈앞에 두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웅성웅성
한적해야 할 자리들이 팬들로 인해 가득차게 된 관중석.
저 많은 사람들이 오로지 지혁의 훈련을 구경하기 위해 이곳에 모였다.
공식 경기가 아니어서 구경할 게 크게 없는데도 말이다.
“어제 경기는 잘 봤어. 설마 머레이를 그랜드슬램에서 3-0으로 제압하다니. 네 실력을 너무 과소평가한 것 같네. 나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머레이의 방심과 운이 많이 따라줘서 가능했는 걸요. 아마 다음 대회에서 만나면 롤랑처럼 쉽지 않을 거예요.”
“어쨌든 한 번이라도 이겼다는 게 중요하지. 언제든지 위로 올라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팬들에게 확인시켜줬잖아. 이제 너의 잠재력을 깎아내리는 언론도 없을 거야. 만약 그런 기사가 나온다고 해도 사람들이 믿지 않을 걸.”
니시코리는 급상승한 지혁의 실력의 원천에 대해 관심이 많은 건지 상당히 많은 질문을 했다.
이틀 전과 태도가 180도로 달라진 게 아무래도 8강의 결과에 큰 영향을 받은 모양이다.
어제 경기를 기점으로 정상급 선수로 인정받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페더러를 상대할 자신은 있어?”
“조금은요.”
“역시 준비해둔 전략이 있었구나. 황제를 쓰러트릴 방법이라. 어떻게 플레이할지 궁금하네.”
“내일 경기에서 확인할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 두 사람은 페더러를 상대한다고 가정하며 연습 경기를 이어갔다.
랭킹 1위와 니시코리의 현격한 기량 차이 때문에 완벽하게 재연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올라운더 스타일에 익숙해질 수 있으니 하지 않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