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역대급 테니스 천재가 되었다-96화 (96/241)

96화. 롤랑 가로스

준결승전 당일, 필립 샤트리에 스타디움.

지혁은 경기를 시작하기 전에 근육을 풀어주기 위해 간단한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관중석의 앞 열에 앉은 몇몇 여생 팬들이 그 모습을 신기한 표정으로 구경했다.

인터넷 기사와 TV로만 봤던 골든 보이의 실물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괜찮았기 때문이다.

“지혁아 화이팅!”

“골든 보이! 사랑해!”

“리! 제발 여기 한 번만 봐주세요!”

가까운 거리에서 다양한 언어로 들리는 여성 팬들의 고백.

지혁이 그 소리에 고개를 살짝 돌리자 시선을 준 방향에서 꺄악하고 비명이 쏟아졌다.

“헤이, 슈퍼 스타. 여자들에게 인기가 좋은 걸?”

“······페더러, 당신이 그런 말을 하니까 왠지 저를 놀리는 거 같네요.”

최근 활약 덕분에 지혁은 충분히 스타라고 불릴 만한 인지도를 쌓았다.

하지만 역사상 가장 인기가 높은 테니스 선수이자 모든 스포츠 종목을 통틀어서 수입 랭킹 1위를 찍은 최고의 스타가 이런 말을 하니 칭찬을 듣는 입장에서 의미가 완전히 달라졌다.

그와 비교하면 지혁 정도의 선수는 아직 아무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재벌이 일반인에게 돈이 많다고 칭찬하는 느낌이랄까.

“그런데 로빈 소더링을 상대로 엄청 고생하던데요? 몸은 괜찮아요?”

지혁이 언급한 것처럼 페더러는 8강에서 로빈 소더링과 세트 스코어가 3-2까지 가는 혈투 끝에 승리했다.

풀세트까지 가는 과정에서 경기 시간은 자연스럽게 4시간을 훌쩍 넘겨버렸다.

이 정도로 혹사를 당했다면 아무리 그라고 해도 만전의 상태는 아닐 것이다.

이틀 전에 있었던 경기는 고작 하루 휴식하는 것으로 회복할 수 있는 활동량이 절대 아니었다.

물론 약점이 될만한 상태를 겉으로 티내지 않으려고 하겠지만 경기 후반쯤이 되면 아무리 숨기려고 노력해도 티가 날 수밖에 없다.

“클레이 코트에서 소더링을 상대하는 게 쉽지 않더라고. 작년 결승에서 만났을 때보다 더 까다로웠어. 그래도 오늘 경기를 하는데 크게 문제는 없을 거야. 8강을 제외하면 편하게 올라왔으니까.”

“그럼 다행이고요. 저는 최상의 컨디션으로 붙고 싶었거든요. 이긴 후에 뒷말이 나오지 않게요.”

“훗. 자신만만하네. 어제 머레이와 한 경기가 너의 진짜 실력이겠지? 만약 그게 전부라면 생각처럼 되지 않을 거야.”

“글쎄요. 그건 직접 확인해 보면 알겠죠.”

그렇게 두 사람은 짧은 대화를 몇 마디 나누다가 이내 코트 위로 올라갔다.

잡담은 경기가 끝나고 나눠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한 명이 탈락해야 하는 상황이라 화기애애한 분위기도 아니었다.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랜드슬램 결승전이 걸려있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대화하는 게 가능하겠는가.

[플레이어 레디. 서브 페더러.]

얼마 후, 랠리가 끝나고 곧바로 이어진 경기.

페더러는 며칠 동안 합동 훈련을 하면서 지혁의 플레이 스타일을 대략적으로 파악하고 있었기에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시작부터 전력을 다해 라켓을 휘둘렀다.

쾅!!

자를 가지고 잰 것처럼 T존 위에 정확하게 떨어지는 서브.

구속 자체는 머레이보다 느린 편이었지만 세계 최고로 손꼽히는 서버라 그런지 코스와 컨트롤이 월등히 뛰어났다.

가장 리턴하기 힘든 위치에 타구가 날아와서 지혁의 백핸드 스윙 자세가 엉거주춤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퉁!

지혁은 코트 왼쪽으로 빠르게 달려가며 간신히 공을 걷어내는데 성공했다.

본격적인 랠리에 들어가면서 득점을 해보려고 노력을 해봤지만 승산이 크게 보이지 않았다.

서브에서 한 번 밀리기 시작하니 포인트를 따내는 게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세트가 조금 더 진행되어야 페더러의 플레이에 익숙해질 듯하다.

[게임 페더러 1-0.]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나 버린 서비스게임.

지혁은 코트를 교체하며 오늘 경기가 굉장히 힘들어질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황제라는 명성에 걸맞게 서브, 스트로크, 풋워크 등 모든 부분에서 빈틈을 찾아보기 힘들었던 것이다.

저 단단한 성벽에 틈을 만들어내려면 얼마나 고생해야 할지 벌써부터 막막한 기분이다.

***

같은 시간, BBC 스포츠 방송국의 해설 부스.

지혁과 페더러의 대결이 결승전과 무게감이 비슷했기 때문일까.

BBC는 ESPN이 그랬던 것처럼 특별 해설로 테니스계의 초대 황제, 피트 샘프라스를 섭외했다.

올드 테니스 시대를 경험했던 사람이라면 이름을 모를 수가 없는 전설.

그는 그랜드슬램 우승을 총 14번을 하며 1990년대를 지배했던 미국 국적의 선수였다.

그 당시 테니스 팬들은 오랜 기간 동안 이 기록이 깨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샘프라스의 팬들에게 아쉽게도 2000년대 초반에 역사상 최고의 선수라고 평가받는 로저 페더러가 갑자기 등장하면서 그 생각이 틀렸다는 게 증명되었지만 말이다.

[피트, 갑작스러운 섭외였는데 이렇게 해설을 맡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오늘 경기는 정상급 선수의 관점에서 평가를 들어볼 수 있겠군요. 최근 골든 보이의 활약이 정말 인상적인데 롤랑 이전에 그의 경기를 보신 적이 있나요?]

[물론입니다. 앤드리만큼은 아니지만 저도 오랜만에 주목할만한 유망주가 등장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닉이 저의 어린 시절이 연상된다고 해서 꽤나 궁금했거든요.]

[아, 그러고 보니 골든 보이는 인디언 웰스 오픈이 끝나고 닉 볼리티에리 아카데미에서 며칠 동안 코칭을 받았었죠. 그 덕분인지 모르겠지만 플로리다주에서 열린 마스터즈 대회에서도 우승을 했고요.]

[코칭 덕분이라······. 확실히 그런 소문이 돌긴 했었죠. 하지만 아카데미에 방문한 게 큰 영향을 주지 않았을 겁니다. 그건 온전히 리의 능력일 거예요. 최소한 몇 개월은 집중 훈련을 해야 효과가 있지 고작 며칠 가지고 눈에 띄는 변화가 생길 리 없어요. 더구나 골든 보이처럼 상위 랭커 수준에서는 더욱요.]

쿵!!

중계 화면에서 송출되는 지혁의 포핸드 위너.

바운드 직후 가파른 각도로 튀어 오르는 스트로크에 샘프라스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오! 환상적인 리버스 포핸드였습니다. 정말 수준 높은 탑스핀 스트로크예요. 제가 보기엔 40cm는 더 높게 바운드된 것 같습니다. 저러면 에러를 범할 수밖에 없죠.]

[골든 보이가 1세트 초반부터 페더러의 한 손 백핸드를 집중적으로 공략하네요. 저건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인데요.]

[맞습니다. 라파엘 나달이 메이저 대회에 데뷔하면서 알려진 약점이죠. 최근 몇 년간 나달이 저 방법으로 재미를 많이 봤던 걸로 기억합니다.]

지혁은 1세트 2게임 내내 페더러의 백핸드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역동작을 유도하거나 크로스샷으로 허점을 찔러 타구를 따라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실책을 유도하는 플레이에 집중한 것이다.

그리고 그 효과는 제대로 적중했다.

라켓 컨트롤이 뛰어나기로 유명한 페더러의 백핸드가 라인 밖으로 떨어졌으니 말이다.

[아웃! 서티 러브.]

관중들은 좀처럼 보기 힘든 황제의 실책에 놀란 기색을 보였다.

아직 판단을 내리기에 너무 이르지만 비등하게 흘러가는 경기 상황에 벌써부터 기대를 하는 사람도 조금이나마 있었다.

아무래도 나달과 머레이라는 전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두 번이나 랭킹 차이를 극복한 적이 있어서 가능성이 작은 것도 아니었다.

[골든 보이가 준비를 단단히 하고 왔네요.]

[지난 몇 년 간 다른 선수들도 같은 전략을 사용했는데 오늘은 유독 효과가 좋은데요? 제가 모르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일단 탑스핀 스트로크의 숙련도가 뛰어난 게 가장 큰 이유겠죠. 그리고 페더러가 자주 사용하는 슬라이스에 대한 대처 능력이 너무 좋습니다. 제 생각엔 맞춤 전략을 가져온 것 같습니다. 저만큼 준비하는데 아무리 적게 잡아도 몇 달은 걸렸을 거예요.]

[허. 칼을 갈고 있었다는 뜻이군요.]

턱!

네트에 걸려 바닥으로 떨어지는 페더러의 백핸드.

연속해서 실책이 나오자 관중석의 웅성거림은 더욱 심해졌다.

[네트! 게임 리 1-1.]

체어 엠파이어의 목소리가 들리자 관계자 좌석 앉아있던 코치진들의 얼굴에 희비가 갈렸다.

그들은 이번 득점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중계 카메라가 그 모습을 캐치하자 시청자들도 어렴풋이 그런 사정을 파악할 수 있었다.

지금 상황이 페더러에게 좋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역시 아껴두길 잘했어. 이렇게 잘 통할 줄이야.’

며칠 전 연습 경기를 하면서 얼마나 유혹에 시달렸는지 모른다.

그때 가지고 있던 수를 들키지 않게 조심하느라 정말 힘들었다.

다행히 반 년이 넘는 고된 노력은 비로소 합당한 보상을 받게 되었다.

[서브 페더러]

다시 차례가 넘어간 서비스게임.

지혁이 베이스라인에서 리턴을 준비하며 네트 너머로 시선을 주니 어느새 페더러의 눈빛이 변해있는 게 보였다.

머레이를 꺾고 4강에 진출했기에 시작할 때부터 방심한 모습을 보여주진 않았지만 이제 위기감마저 느끼는 모양이다.

첫 경기부터 이렇게 정성을 들여 준비해올 줄 몰랐던 것이다.

‘페더러를 롤랑에서 만난 건 다시없을 천운이야.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당분간 이기는 게 힘들어.’

이번 롤랑 가로스를 끝으로 올해 클레이 대회는 모두 종료된다.

냉정하게 생각했을 때, 남아있는 잔디, 하드 대회에서 페더러를 상대로 이길 확률은 극히 낮다.

그는 명백히 지혁의 상위 호환 격이라 상성이 그다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같은 올라운더 스타일에 공격 옵션까지 더 다양해서 만약 동등한 조건에서 정면으로 붙으면 십중팔구로 패배할 것이다.

마치 앤디 머레이가 빅3들에게 매번 탈탈 털리는 것처럼 말이다.

“하앗!”

탕!!

사이드라인으로 떨어지는 탑스핀 스트로크를 한 손 백핸드로 받아치는 페더러.

지혁은 타점이 흔들려 휘청거리며 날아오는 공을 네트 앞으로 달려가 발리로 되갚아줬다.

그렇게 반대쪽 사이드라인에 떨어진 스트로크는 조금의 여지도 주지 않고 득점을 만들어냈다.

[피프틴 서티. 골든 보이가 발리로 먼저 포인트를 앞서갑니다.]

[아무래도 리버스 포핸드에 적응하기 전까지 지금 상황이 지속될 것 같습니다.]

[페더러는 8강에서 소더링을 상대하면서 체력을 잔뜩 소진하고 왔는데 오늘 경기에서도 엄청 고생하네요. 이번 롤랑은 정말 대진운이 없는 것 같습니다.]

[관점을 바꾸면 완전히 나쁜 것도 아닙니다. 나달을 상대하기 전에 예방주사를 맞는다고 생각하면 되잖아요. 물론 여기서 탈락하게 되면 이것도 전부 의미가 없어지겠지만 말이에요.]

[이쯤 되면 물어볼 때가 된 것 같네요. 피트는 어느 쪽에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하하. 어떤 의도로 그런 질문을 하는지 알겠네요. 저도 마음 같아서 시청자분들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지만 그래도 페더러죠.]

[골든 보이가 더 유리한 상황인데도요?]

[그랜드슬램의 5세트는 정말 깁니다. 경기가 종료되기 전까지 페러더가 방법을 찾고도 시간이 남을 거예요. 일단 제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면 경기의 균형은 순식간에 뒤집어질 겁니다.]

[그러면 그 시점이 중요할 것 같은데 과연 언제가 될까요?]

[음. 제가 현역 시절 그를 상대해본 경험상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것 같네요. 아무리 넉넉하게 잡아줘도 1세트가 한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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