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롤랑 가로스
어느새 1세트를 끝내고 벤치에서 휴식을 취하는 선수들.
경기장 중심으로 시선을 보내고 있는 관중들의 들뜬 표정을 보면 승부의 결과가 어떻게 나왔는지 듣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준결승전이 시작하기 전 수많은 전문가들과 팬들이 고전할 거라고 예상한 것과 달리 지혁이 오랫동안 준비했던 전략이 제대로 먹혀든 것이다.
하지만 정작 페더러에게 첫 번째 세트를 얻어낸 지혁의 얼굴은 그리 좋지 못했다.
먼저 한 걸음 앞서 나가긴 했지만 경기를 자세하게 뜯어보면 내실이 너무나 부족했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브레이크를 두 번이나 당하다니······.’
지혁의 세트 포인트로 1세트가 종료된 시점의 스코어는 6-4.
이건 초반에 먼저 이득을 가져가지 못했다면 패배하고도 남았을 스코어였다.
상대와 똑같은 횟수의 서비스게임을 내줬다는 뜻이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높았던 페더러의 백핸드 에러율도 빠른 속도로 떨어지고 있었다.
‘완전히 통하지 않는 건 아닌데 이제 큰 기대를 하는 것도 무리야.’
페더러는 랭킹 1위를 4년이라는 시간 동안 어떻게 유지한 건지 직접 실력으로 증명했다.
괴물 같은 기량과 끈질긴 집념으로 고작 40여분 만에 지혁이 심연을 기울여 준비한 전략을 극복해낸 것이다.
그 과정에서 막대한 체력을 소모하며 미친 듯이 뛰어다니긴 했지만 이것도 일반적인 탑랭커였다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이 지경까지 왔으니 지금 추세대로 경기가 흘러간다면 페더러의 승리로 무난하게 끝날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수면 아래에 숨겨져 있는 진짜 상황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한국의 팬들은 커뮤니티에서 잔뜩 흥분한 게시글을 쓰며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단순히 겉모습만 보면 지혁이 결승전에 진출하는 게 충분히 가능해 보였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선수를 꺾고 아시아 최초의 업적을 달성하는 순간이라 착각하는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롤랑을 중계하는 방송들의 시청률도 연신 최고점을 갱신했다.
지인들에게 경기 소식을 듣고 사람들이 전부 스포츠 채널로 몰려든 것이다.
마침 시간도 한국을 기준으로 오후 10시쯤이라 중계 조건도 상당히 괜찮았으니 말이다.
ㅡ 지금처럼만 하면 롤랑 가로스에서 최연소 우승하겠다 ㄷㄷㄷㄷ
ㅡ 와 ;; 페더러를 저렇게 밀어 붙인다고? 이거 이지혁 평소 실력 맞냐? 원래 이 정도까진 아니었잖아. 높게 잡아줘도 마린 칠리치, 델 포트로하고 비슷한 급이라 빅3한테 털리는 게 정상 아닌가?
ㅡ 해설자들이 맞춤 전략을 준비해서 이겼다고 하는 걸 보면 아무래도 이번 경기 한정인 거 같은데? 어쩐지 갑자기 너무 잘하더라. 이게 본 실력이면 진작 마스터즈 대회를 휩쓸었겠지.
ㅡ 그런데 얘는 페더러하고 무슨 원수라도 지고 있는 거냐? 머레이나 나달하고 붙을 때 이런 전략을 준비하지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대체 뭐임??
ㅡ ㅇㅈ 준비 시간도 엄청 길어서 투자대비 효율을 생각하면 최악일 걸. 말 그대로 비효율의 극치임 ㅋㅋㅋ 뭐, 결과론적인 측면에서 따져보면 오늘 경기에서 전부 회수한걸로 보이지만 ㅋㅋㅋ
ㅡ 우리가 모르는 사연이라도 있겠지. 세계 랭킹 1위를 한 번쯤 이겨보고 싶다던가. 이지혁 예전 인터뷰에서 페더러가 자신의 지향점이자 목표라고 하지 않았나?
ㅡ ㅁㅊ 고2에 최종 목표에 도달하는 놈이 어딨냐고 ㅋㅋㅋㅋ 솔직히 저 발언한지 아무리 길어봤자 몇 개월밖에 안 지났을 건데 벌써 끝판왕 자리까지 올라갔네 ㅋㅋ
ㅡ 기존 그랜드슬램 최연소 우승 기록이 마이클 창의 17세 3개월이지? 이번에 우승하면 20년 만에 신기록이 세워지겠구나.
ㅡ 7개월 단축이라 이번에 바뀌면 영원히 안 깨질 걸 ㅋㅋㅋ 2000년대 들어오면서 올드 테니스 시절이랑 경기 스타일이 완전히 달라져서 미성년자가 높은 랭킹 얻는 경우가 거의 없었잖아. 물론 이지혁 같은 돌연변이를 제외하면 말이야.
그렇게 한국의 팬들은 지혁이 어떤 심정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계속 경기를 시청했다.
커뮤니티의 댓글을 보면 준결승전의 승부는 이미 결정된 것처럼 느껴졌다.
지혁에게 유리한 상황이 변하지 않고 계속 유지될 거라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착각이라고 깨닫게 되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2세트에 들어서고 페더러가 본격적으로 실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
[레디.]
휴식이 끝나자 베이스라인이 있는 위치로 이동하는 선수들.
그 모습을 화면으로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샘프라스는 뭔가 발견한 건지 고개를 끄덕였다.
[골든 보이가 새로운 수를 꺼내려고 하는 모양입니다. 하긴 슬슬 기존 전략에 힘이 빠지는 기색이 보이긴 했죠. 이전 세트와 똑같은 플레이를 하는 걸 무리라고 생각할 법도 합니다.]
[피트, 그게 무슨 말인가요? 저와 시청자분들이 이해할 수 있게 자세하게 설명해 주세요.]
[하하하.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라켓을 한 번 확인해 보세요.]
해설자는 샘프라스의 말을 듣고 지혁의 오른손에 들린 라켓에 시선을 주었다.
짧은 침묵이 흐르길 잠시, 뭔가 알아차린 건지 중계석에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아! 라켓의 색깔이 바뀌었네요! 그렇다는 건······.]
[생각하는 게 맞을 겁니다. 기울어가는 경기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머레이에게 사용했던 기술을 꺼내려고 마음먹은 거죠. 만약 2세트를 넘겨주기라도 하면 기껏 얻은 이점이 전부 사라질 테니까요.]
[리는 이번 세트에 모든 걸 쏟아부을 생각인가 보네요. 저는 조금 더 결정적인 순간에 나올 줄 알았는데요.]
[처음부터 지금 상황을 의도한 건 아닐 겁니다. 아마 페더러의 적응 속도가 워낙 빠른 탓에 강제로 떠밀리듯 전략을 수정했을 가능성이 높아요.]
[그런데 저 방법이 얼마나 통할지 궁금합니다. 페더러처럼 경험이 많은 베테랑에게도 효과가 있을까요?]
[글쎄요. 저도 궁금하네요. 어차피 조금만 기다리면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보죠.]
“후우···.’
크게 숨을 한 번 들이쉬고 공을 하늘 높이 토스하는 페더러.
곧이어 라켓이 채찍처럼 휘둘러지자 눈 깜짝할 사이에 강력한 타구가 서비스 코트의 가장자리로 떨어졌다.
퉁!
지혁은 바운드 지점으로 달려가며 서브를 라켓으로 걷어냈다.
경기가 제법 진행된 상황이라 이제 속도가 빠른 공도 눈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모양이다.
에이스를 당할 법한 샷도 어떻게든 받아낼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탕!! 탕!! 탕!! 탕!!
리턴의 성공으로 랠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관중들의 눈동자도 자연스레 바빠졌다.
두 선수의 아슬아슬한 플레이에 잠시도 시선을 땔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언제 위닝샷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접전이 이어지길 잠시.
페더러는 커다란 기합을 내지르며 포핸드 스트로크를 다운 더 라인 코스에 때려 박았다.
쿵!!
관중석까지 전해지는 묵직한 바운드 소리.
애매한 위치에 둥그런 자국이 생기자 선수들은 판정을 듣기 위해 체어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재빠르게 돌렸다.
그리고 1초도 채 지나지 않아 라인심이 콜을 외쳤다.
“인!”
[피프틴 러브.]
와아아아아!
관중들의 뜨거운 찬사가 끝도 없이 쏟아졌지만 페더러는 승리의 여운을 즐길 생각이 없는지 곧바로 서브 자세를 다시 취했다.
쉴 틈을 주지 않고 몰아치는 그 모습에 지혁은 몸의 중심을 더욱 낮추며 집중력을 날카롭게 가다듬었다.
언제, 어느 위치에 공이 떨어질지 몰랐기 때문이다.
아주 잠깐만 정신을 놓아도 220km가 넘는 고속 서브가 에이스를 노릴 터라 약간의 빈틈도 상대에게 보여주면 안 된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허무하게 포인트를 잃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쾅!!
[게임 페더러 1-0.]
라켓을 바꾸는 전략을 사용했음에도 결국 페더러에게 넘어간 2세트의 첫 번째 서비스게임.
지혁은 그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혀를 차며 코트를 교체했다.
찔러 볼만한 허점을 찾을 수 없는 상황이 커다란 압박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몸이 완전히 풀린 건가. 반사신경이 더 좋아진 것 같은 느낌인데.’
분명 라켓을 교체하고 나서 스트로크의 속도가 한층 빨라졌는데 흔들리는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저 강철같은 멘탈을 조금이라도 흔들려면 어떤 방법을 써야할지 더 고민을 해봐야겠다.
‘그래. 스트로크만큼 서브도 잘 받아내나 보자.’
꽈아악-
한계점까지 전신을 쥐어짜며 왕관 자세를 취하는 지혁.
곧이어 한계점까지 웅축된 힘이 엄청난 속도로 풀려나오자 임팩트 지점에서 폭발하는 듯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컨트롤을 대부분 희생하고 파워 하나만을 중시한 서브를 사용한 것이다.
쿵!!
[SERVE SPEED 228km/h]
갑자기 5km 이상 높아진 타구의 속도에 페더러의 스타트는 미세하게 늦어졌다.
그리 치명적인 실수는 아니었지만 이 정도의 차이만으로도 리턴의 위력은 크게 감소했다.
스윙 자세가 불안정해서 코스의 선택지가 상당히 줄어든 탓이다.
이렇게 상대의 플레이를 강제할 수 있는 상황에서 득점을 하는 건 어린아이 손목 비트는 것처럼 너무 쉬웠다.
랠리가 길어져도 위닝샷을 넣을 만한 기회가 차고 넘쳤으니 말이다.
[포티 러브.]
지혁은 230km에 근접하는 고속 서브를 받아내느라 빈틈을 보이는 페더러에게 서브 앤 발리로 몇 번이나 득점을 얻어냈다.
이 상황이 오래 지속될 리 없으니 최대한 경기 템포를 빠르게 만들어야 했다.
그렇게 2세트 1게임의 서비스게임과 똑같은 방법으로 갚아주는 모습이 연출되자 해설자들의 표정은 묘해졌다.
[아무래도 2세트는 서브 위주로 흘러갈 것 같습니다. 듀스까지 갈 수도 있어서 경기 시간이 제법 길어질 수도 있겠어요.]
[장기전으로 가서 체력 싸움이 된다면 어떤 선수에게 유리할지 되게 애매하네요. 8강에서 풀세트를 치르고 온 페더러와 탈진 이슈가 있는 골든 보이라. 신경 써야 할 변수가 너무 많습니다.]
[아뇨. 만약 5세트까지 가게 된다면 치열해 보이는 것과 달리 일방적으로 끝날 확률이 높습니다.]
[네?]
[골든 보이에게 데미지가 조금씩 쌓이고 있거든요. 아, 표정을 보니 벌써 세금을 지불하고 있는 모양이네요.]
욱신욱신
“으음······.”
뼈마디가 삐걱거리는 고통에 눈썹을 찡그리는 지혁.
손목, 팔꿈치, 어깨, 허리, 무릎, 발목 등 전신이 종합병동이 된 것 마냥 통증이 몰려온다.
한계 이상의 힘을 억지로 끌어 쓰다 보니 자연스레 부작용이 덮쳐온 것이다.
라켓의 텐션을 바꾸는 플레이를 할 때마다 매번 있는 일이었다.
‘······이래서 어지간한 선수들에게 사용하지 않았던 건데.’
다행히 아직 견딜 만 하지만 경기가 지속될수록 점점 증상이 악화될 거라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당장 플레이 스타일을 원상태로 돌리거나 준결승전을 최대한 빨리 끝내버려야 했다.
‘미련한 짓인 건 알고 알지만 욕심이 나네. 조금만 더 버텨보다가 참기 힘들면 방향을 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