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역대급 테니스 천재가 되었다-98화 (98/241)

98화. 롤랑 가로스

[게임 리 6-6.]

결국 2세트는 타이브레이크까지 도달하고 말았다.

지혁과 페더러가 자신의 서비스게임을 필사적으로 지켜내는데 집중했기 때문이다.

경기가 길어지자 안 그래도 위험 신호를 보내고 있던 지혁의 몸 상태는 더욱 나빠졌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직까진 하루 정도 푹 쉬면 말끔하게 회복될 수준이라는 것이다.

슬슬 경기력의 저하가 생기고 있었지만 주의를 한다면 다음 경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을 거다.

‘시간을 끄는 걸 보니 페더러도 멀쩡한 건 아닌가 보네.’

여러 루틴을 하며 서브의 텀을 길게 가져가는 페더러.

2세트 초반만 해도 텀을 주지 않고 플레이했던 것과 매우 상반된 모습이다.

압도적인 실력으로 경기를 휘어잡던 그도 로빈 소더링과 풀세트를 한 부작용이 조금씩 겉으로 티가 나기 시작했다.

한 눈에 봐도 활동량이 부쩍 줄어들었으니 말이다.

이건 굳이 생각해 볼 필요도 없이 체력 고갈을 의식한 행동이었다.

[두 선수의 뛰어난 코트 커버력이 돋보이는 경기였습니다. 강력한 서브도 그렇고 수비 범위가 정말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넓네요.]

[확실히 일반적인 경기에서 보기 힘든 하이라이트 장면이 상당히 많이 나왔죠. 다양한 공격 옵션과 테크닉을 중점으로 하는 올라운더들의 대결이라 묘기 같은 샷이 자주 나오는 것 같습니다.]

[이번에 필립 샤트리에 스타디움에 방문한 관중들은 행운이네요. 이런 명경기를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다니요. 저도 해설을 맡지 않았다면 파리로 곧장 날아갔을 겁니다.]

[실제로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테니스팬들이 많아서 티켓이 엄청 빠르게 매진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수요가 많아서 암표 가격이 몇 배나 뛰었다죠.]

[음. 100% 이해가 되는 소식이군요. 페더러와 골든보이의 경기는 기대를 저버리는 일이 거의 없으니까요.]

두 포인트가 쌓일 때마다 서브권이 교체되는 규칙이 있어서일까.

타이브레이크는 2세트의 게임들과 똑같은 양상으로 진행되었다.

선수들이 승부를 내지 못하고 지지부진한 상황이 이어진 것이다.

그렇게 경기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스코어는 균형을 이루며 계속해서 상승했다.

[3-4. 리!]

[5-4. 페더러!]

[5-6. 세트 포인트 리!]

[7-6. 어드벤티지 페더러!]

“허억···. 허억···.”

휴식 없이 경기를 진행하느라 어느새 거칠어진 지혁의 호흡.

왠만하면 지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지만 의지만으로 참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솔직히 폐가 타들어가는 고통 탓에 다른 사람의 시선 따윈 안중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잔뜩 지쳐있는 몸을 본래의 상태로 되돌리는 것에 모든 정신이 쏠렸기 때문이다.

‘얼마나 끈질긴 거야.’

좀처럼 끝나지 않는 경기에 지혁은 심기가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도대체 뭘 한 거냐고 물어볼 수도 있었다.

경기에서 이기는 건 고작 한 포인트를 따내고 서브를 지키기만 하면 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건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찰나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며 이전보다 훨씬 더 공격적으로 플레이에 집중했다.

페더러가 괴물 같은 저력을 발휘하며 스트로크를 전부 막아낸 게 문제였지만 말이다.

[골든 보이의 경기를 보면서 항상 느끼는 거지만 역시 단기전에 특출 난 재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벌써 슈퍼 플레이가 몇 번이나 나왔어요.]

[강력한 스트로크가 계속해서 떨어지는데 페더러는 단 한 번도 실점을 하지 않네요. 아무래도 경기 중반부에 들어가면서 감각이 정점에 도달했나 봅니다.]

[이대로 스코어가 어디까지 올라갈지 구경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이런 경기를 어딜 가서 볼 수 있겠습니까.]

[글쎄요. 경기를 뛰고 있는 페더러와 골든 보이는 그 생각에 전혀 동의하지 않을 겁니다. 숨을 몰아쉬며 경기를 준비하는 저 모습을 보세요. 타이브레이크 동안 따로 휴식을 취하지 못해서 지긋지긋한 기분일 거예요.]

퉁!

T존 근처를 공략하는 220km의 서브를 백핸드 슬라이스로 받아내는 페더러.

백스핀이 잔뜩 걸린 리턴은 베이스라인 깊숙한 곳으로 떨어졌다.

타다다다!

지혁이 급하게 뛰어가며 코트 밖으로 빠져나가는 공을 간신히 걷어내자 곧이어 반대쪽 코트에서 쿵!하고 묵직한 소리가 들렸다.

이 모든 것이 발리를 치기 위한 사전 빌드업이었던 것이다.

경기를 시작할 때부터 계속 똑같은 레파토리에 당하고 있었지만 저 어프로치샷과 발리의 연계는 미리 알고 있어도 막는 게 힘들었다.

[15-14. 어드벤티지 페더러!]

무려 29포인트 만에 브레이크가 처음 나오자 관중석에서는 탄식이 쏟아졌다.

길었던 2세트가 지혁의 패배로 끝나려고 했기 때문이다.

마침 서브권이 페더러에게 넘어가는 순서라 상황마저 좋지 않았다.

[페더러가 백핸드 슬라이스로 223km의 서브를 완벽하게 격파했습니다. 타구를 쫓아가면서 저렇게 완성도 높은 발리 셋업이 가능하다니 백핸드 숙련도가 말 그대로 예술의 경지에 올랐습니다.]

[반면 골든 보이는 조금 아쉬운 모습이네요. 여기서 빅3와 역량 차이가 나는 것 같습니다. 만약 똑같은 상황에서 나달이었다면 저 슬라이스를 무조건 뚫어냈을 거예요.]

페더러는 세트 포인트만을 남겨둔 상황에서 발리를 적극적으로 유도했다.

네트 근처로 드롭샷이나 슬라이스를 날리면서 지혁의 플레이를 강제한 것이다.

여기에 간간히 다운 더 라인이나 크로스샷을 섞어주자 당하는 입장에서는 속수무책으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탕!!

‘너무 멀어······.’

지혁은 반대편 코트에서 넘어오는 스트로크를 보자마자 위기감을 느끼고 찰나를 사용했다.

그러자 슬로우모션으로 패싱샷이 스쳐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이건 진행 방향을 알고 있어도 라켓으로 받아낼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아무리 부상의 위험을 감수하며 허슬 플레이를 하더라도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던 것이다.

[세트 페더러.]

그렇게 타이브레이크를 발리와 패싱샷으로 마무리하고 2세트를 가져간 페더러.

지혁이 허탈감에 한숨을 쉬자 코트에 주변에 있던 볼 키즈와 진행 요원들의 시선이 슬쩍 집중되었다.

그들은 선수들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이 있다 보니 이 상황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힘이 잔뜩 빠진 모습으로 터벅터벅 코트를 나가자 관중석에서 드문드문 페더러를 응원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15,000명이 넘는 관중들의 숫자를 생각하면 그 소리가 크지 않은 걸 보니 지혁의 승리를 원하는 팬들이 더 많은 모양이다.

안타깝게도 그 바람이 이루어지는 건 힘들어 보였지만 말이다.

***

[아, 결국 페더러가 3세트까지 가져가면서 경기를 역전합니다. 역시 반전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골든 보이에게 빅3의 벽은 너무 높았어요.]

[6-2라······. 이전 세트에서 보여줬던 경기력을 생각하면 스코어 차이가 제법 크네요.]

[아무래도 타이브레이크에서 간발의 차이로 패배한 게 영향이 컸던 모양입니다. 3시간이 넘는 혈투를 하면서 대부분의 전략이 쓸모 없어진 이유도 있고요. 솔직히 두 선수가 순수한 기량 싸움을 하면 결과가 뻔하잖아요.]

[그래도 골든 보이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롤랑에서 패배하더라도 나중에 다른 대회에서 만날 확률이 높으니까요.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 트로피를 얻으려면 필연적으로 빅3들을 꺾어야 합니다. 경기를 하고 싶지 않아도 피할 방법이 없어요.]

[말씀하신 대로 이름이 있는 대회는 참가자들이 거의 비슷하니 두 선수의 재경기가 빠른 시일 내에 다시 성사될 수도 있겠네요. 앤디 머레이와 골든 보이가 결국 롤랑에서 재회를 했던 것처럼요. 그런데 피트는 이미 페더러의 승리를 거의 확신하고 있는 듯한데 그가 이길 확률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흠······. 소극적으로 잡아도 80% 이상입니다. 골든 보이가 다른 수를 숨기고 있는 게 아니면 기적이 일어날 일은 없을 거예요.]

3세트가 페더러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나자 흥미를 상당 부분 잃어버린 듯한 얼굴을 하는 관중들.

대부분의 팬들은 이제 뻔한 결과만 남아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경기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기운데다가 지금 지혁의 모습이 그만큼 무력해 보였기 때문이다.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하고 3세트를 빼앗기는 모습은 그런 확신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어차피 질 거라면 할 수 있는 건 전부 해보자.’

상황이 이 지경까지 되니 이제 지혁은 다음 경기를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어차피 롤랑에서 탈락하게 되면 삼 주 뒤에 열리는 윔블던까지 대회 스케줄이 없었다.

지친 체력을 회복할 수 있는 시간이 차고 넘칠 정도로 충분하니 부상 같은 심각한 피해가 아니라면 조금 무리를 해도 괜찮을 것이다.

게다가 다음 대회에서 만났을 때 오늘 당한 치욕을 되돌려주려면 지금 밑천을 바닥까지 털어놓는 게 최선의 선택이다.

그때도 똑같은 과오를 범하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플레이어 레디.]

그렇게 4세트에 접어들자 지혁의 실력은 곧바로 수직 상승했다.

뒷일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플레이 했기에 원래 가지고 있는 기량보다 훨씬 뛰어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이다.

[세트 리 2-2.]

위력 행사를 하며 어거지로 가져온 4세트.

페더러는 알아서 자멸하는 지혁을 보고 장단을 맞춰주며 적당히 상대해줄 뿐이었다.

시간이 자기 편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서였다.

털썩

마지막 휴식을 하기 위해 벤치에 앉은 지혁의 안색은 어느새 하얗게 질려있었다.

피로감과 욱신거리는 몸은 이미 한계에 도달했다.

지금 상태로 계속 경기를 한다면 언제 탈진해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지혁이 가만히 눈을 감은 채로 체력을 회복하고 있자 무릎 위로 뭔가 후두둑 떨어졌다.

반바지를 입고 있었기에 그 액체가 따뜻한 온기가 있다는 게 느껴졌다.

‘······피가 나네.’

지혁은 굳이 눈을 떠서 확인하지 않아도 액체의 정체가 짐작되었다.

비정상적으로 높아진 혈압 때문에 코피가 나고 있었던 모양이다.

송가와 했던 경기 이후로 이런 일은 없었는데 더 이상 무리하지 말라고 몸이 경고를 보내는 것 같았다.

‘이 상황에서는 포기하는 게 맞는데.’

외부인들이 옆에서 보기엔 고민하는 게 이상할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

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생각이 쉽게 정리가 되지 않았다.

1세트만 따내면 그랜드슬램 결승에 진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스코어가 2-1일 때 똑같은 선택지가 주어졌다면 결정하기가 훨씬 쉬웠을 것이다.

복잡한 머릿속을 도저히 정리하기 힘들 때, 벌써 120초의 시간이 지났는지 체어 엠파이어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민할 여유조차 없이 경기가 속행되자 코트 안으로 들어가는 지혁의 발걸음은 자신도 모르게 느려졌다.

페더러는 그런 망설임을 귀신같이 알아차린 것인지 쐐기를 박는 서브를 T존 위에 내려꽂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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