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롤랑 가로스
지혁과 페더러의 경기가 끝나고 다음 날.
하단 쿼터에서 최종적으로 남은 선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상했던 대로 결정되었다.
나달이 준결승전에서 위르겐 멜저를 마치 100위권의 하위 랭커를 다루듯이 3-0으로 가볍게 압살한 것이다.
8강에서 앤디 머레이, 4강에서 로저 페더러와 붙으며 생고생을 했던 지혁의 경우를 생각하면 너무나 비교되는 상황이었다.
이런 어이없는 일이 벌어진 가장 큰 이유는 조코비치가 빅3의 명성과 어울리지 않게 8강에서 허무하게 탈락했기 때문이다.
“경기 초반만 해도 나달과 경기가 성사될 거라 생각했는데······, 영양사를 고용하는 시기가 이쯤이 아니었나?”
여전히 체력을 앞세운 선수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걸 보면 조코비치는 아직도 자신이 글루텐 알레르기를 가지고 있다는 걸 눈치 채지 못한 모양이다.
2010년은 그가 본격적으로 무결점의 선수로 거듭나는 시기라고 기억하고 있었기에 설마 마지막 세트에서 그렇게 무너질 줄 몰랐다.
그랜드슬램에서 그럴듯한 성적를 단 한 번도 얻지 못한 81년생의 선수가 빅3를 탈락시킨다는 걸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아마 당사자인 위르겐 멜저조차도 이번 결과가 믿겨지지 않을 것이다.
“베이스라이너가 랠리를 빨리 끝내기 위해 어울리지도 않는 드롭샷을 계속 사용했으니, 실력이 한참이나 떨어지는 선수에게 패배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 어떤 선수든 주력으로 하는 플레이 스타일을 갑자기 바꾸면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니 말이야.”
아마 평소처럼 경기가 3시간 이내로 짧게 끝났다면 경기 결과가 달라졌겠지만 클레이 코트에 발목이 잡혀 이 사단이 났다.
플레이 타임이 4시간을 초과하기 시작하니 조코비치가 호흡곤란과 복통을 호소한 것이다.
내년 1월 초에 개최되는 호주 오픈에서 이틀 연속 6시간, 7시간의 풀세트 경기를 하며 우승을 차지하니 절대 체력이 모자라서 생긴 일은 아니었다.
그의 지구력은 나달과 견주어도 부족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내일 경기에서 원래 기량을 발휘할 수 있을까.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조코비치와 비슷한 꼴을 당할 확률이 엄청 높은 것 같은데.”
결승 진출이 확정되기 전에 미리 짜놨던 일정이 계획대로 진행되었다면 지금쯤 연습 코트에서 니시코리를 경기 파트너 삼아 훈련을 하고 있어야 했다.
나달에게 사용할 전략을 몸에 각인시키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제 있었던 진흙탕 경기로 인해 지혁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호텔에서 얌전히 쉬고 있었다.
승자 인터뷰를 마치고 스타디움을 탈진한 모습으로 나온 게 원인이 되어서 무리가 갈 법한 행동이 전부 금지되었던 것이다.
실제로 그의 혹사당한 신체는 내일 경기를 하는 것도 힘든 상태였다.
어깨와 무릎에서 느껴지는 욱신거리는 통증이 아직 남아있는 걸 고려하면 경험상 최소 3주 이상의 휴식이 필요했다.
“그렇다고 그랜드슬램 결승전을 포기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아무리 이길 가능성이 낮다고 해도 전력을 다해 부딪쳐 봐야지. 이런 기회가 쉽게 주어질 리 없으니까.”
코치들이 결승전의 시뮬레이션을 돌려본 결과 승산은 높게 잡아도 20% 아래.
외부 전문가들의 의견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걸 보면 그리 틀린 판단은 아닐 것이다.
적어도 이번 롤랑 가로스에서 나달의 패배를 고려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 말이다.
“일단 내가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전부 사용해보자.”
마침 페더러와 준결승을 치르면서 막대한 포인트가 쌓였다.
아마 이 정도 양이라면 등급을 올리진 못하더라도 충분히 만족할만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음······. 어디에 투자해야 가장 큰 효과를 얻을 수 있을까.”
[이지혁]
근력: 75 민첩: 75 체력: 75 신장: 188cm▲
서브(A), 포핸드(A+), 백핸드(A+), 풋워크(A), 외모(A-), 트릭샷(A-), 찰나(A)
[1,410,207포인트]
지혁은 오랜만에 불러들인 어플을 보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
“당장 고를 만한 선택지는 두 개인데.”
서브로 공격력을 높이는 길과 풋워크로 수비적은 부분을 보강하는 길이 있다.
아마 둘 중 하나를 고르게 되면 주력으로 내세우는 장점이 달라져서 플레이 스타일이 꽤나 달라질 것이다.
가장 효율적으로 경기를 진행하다 보면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으니 말이다.
지혁이 이번 롤랑에서 백핸드 스트로크로 위닝샷을 넣는 횟수가 눈에 띄게 증가한 걸 보면 이건 나름대로 근거가 있는 생각이었다.
“나달의 수비를 뚫어내는 게 정말로 가능할까? 지금보다 서브 속도가 더 빨라진다고 해도 빅 서버들과 매치를 붙었던 전적을 생각해 보면 쉽지 않을 것 같은데.”
물론 그렇다고 해서 풋워크가 답이라는 건 아니었다.
시원하게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한참 동안 허공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지혁.
그렇게 장고 끝에 선택지가 하나로 좁혀졌다.
“역시 체력이 고갈된 상태에서 경기를 길게 가져가는 전략을 사용하기는 힘들겠지. 지금 내가 처한 환경에는 여러모로 서브가 가장 나을 거야.”
냉정하게 생각하면 프로 선수들 중 손에 꼽히는 지구력을 가지고 있는 상대에게 풋워크를 무기로 도전한다는 자체가 애초에 말이 안 되었다.
괜히 3경기 연속으로 5시간을 넘는 경기를 치르기 싫다면 상대의 장점에 머리를 부딪치는 것보다 이렇게 우회하는 게 현명한 일이다.
“그럼 바로 해보자.”
지혁은 시간 끌 것도 없이 바로 서브에 모든 포인트를 투자했다.
어차피 새로 얻은 실력을 파악하려면 조금이라도 빨리 익숙해져야 했다.
얼마 후, 두통과 함께 서브에 대한 정보가 빠르게 쏟아졌다.
***
롤랑 가로스 결승전 당일, 필립 샤트리에 스타디움.
지혁은 불과 이틀 만에 페더러와 피 튀기는 접전을 펼쳤던 지긋지긋한 장소에 다시 방문하게 되었다.
대체할 만한 다른 스타디움도 있긴 했지만 아무래도 이곳이 좌석의 숫자가 가장 많은 메인 코트였기 때문이다.
‘뭐, 나에게 나쁜 소식은 아니지 익숙한 환경이라서 코트에 적응하는 시간도 줄어들 테니까.’
스윽
허리를 굽혀 클레이 코트 위를 손으로 한 번 쓸어보는 지혁.
그러자 손바닥에서 까끌까끌한 앙투카 재질의 감촉이 느껴졌다.
물기가 하나도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건조되어 있다.
‘이틀 동안 전부 말랐구나. 어제 날씨가 좋아서 정말 다행이야.’
최악의 경우 젖어있는 상태로 경기를 진행하는 것도 각오하고 있었지만 웬만하면 변수가 없는 게 가장 좋았다.
바운드 속도가 느려졌을 때 유리해지는 건 장기전에 강력한 이점을 가지고 있는 나달이었으니 말이다.
와아아아아!
지혁이 가장 중요한 베이스라인 주변의 코트를 자세하게 살피고 있을 때, 갑자기 관중들의 환호 소리가 경기장을 가득 채웠다.
아무래도 정신이 다른데 팔린 사이 나달이 도착한 모양이다.
‘컨디션이 엄청 좋아 보이네. 하긴 결승까지 편하게 올라왔는데 피로를 느낄 일도 없었겠지.’
얼굴의 혈색과 몸이 날아갈 듯이 가벼운 걸 보면 쓸데없는 기대를 할 여지가 조금도 없는 것 같았다.
“골든 보이, 결국 여기까지 올라왔구나. 이틀 전 경기는 정말 잘 봤어.”
코트에 도착하자마자 상당히 의외라는 표정으로 인사를 하는 나달.
그는 설마 롤랑의 결승전에서 페더러나 머레이가 아닌 지혁이 올라오게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 같았다.
워낙 1쿼터를 배정받은 선수들의 실력이 쟁쟁했으니 이해하지 못할 반응도 아니었다.
실제로 5세트 도중에 비가 내리는 돌발 상황이 갑자기 발생하지 않았다면 지혁이 무조건 패배했을 것이다.
“경기를 봤으면 알겠지만 운이 정말 좋았죠.”
“운이라······. 확실히 여러 사건이 맞물려서 너에게 유리한 상황이긴 했지. 하지만 동등한 조건에서 페더러를 이긴 건 분명하잖아.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거야.”
나달은 실력이 부족했다면 주어진 기회를 붙잡지도 못했을 거라고 말하며 지혁의 성과를 일정해 주었다.
오랜만에 만난 기념으로 일상적인 대화를 잠깐 동안 나누는 두 선수.
그런데 잠시 후 시작하게 될 결승전에 어딘가 긴장한 모습을 보이는 지혁과 다르게 나달의 행동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아무래도 그는 어떤 돌발 상황이 생기더라도 오늘 경기에서 승리할 거라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게 아니라면 저 여유로운 분위기를 설명할 수 없었다.
‘그 여유가 언제까지 이어지나 한 번 보자고.’
지혁은 상대의 여유로운 태도에 담긴 의미를 알아차리고 속으로 단단히 각오를 다졌다.
자신이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직접 실력으로 증명하려고 한 것이다.
***
잠시 후, 드디어 막을 올리게 된 롤랑 가로스 결승전.
첫 서브를 시작하는 영광을 차지한 선수는 지혁이었다.
웅성웅성.
몇몇 눈썰미가 있는 관중들은 시작부터 텐션이 낮은 라켓을 들고 나오는 지혁의 모습을 알아채고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주변 사람들에게 속삭였다.
덕분에 경기장 전체에 그 소식이 퍼지는 건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그가 탐색전을 하지 않고 시작부터 전력으로 경기에 임한다는 것을 말이다.
“후우······.”
쾅!!
[SERVE SPEED 227km/h]
[피프틴 러브.]
굉음과 함께 흐릿한 잔상을 남기며 서비스 코트에 내려꽂힌 서브.
나달은 에이스를 한 번쯤 당하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은지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리턴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세트 초반에 브레이크를 얻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본인의 서비스게임만 잘 지켜내면 얼마든지 기회가 찾아올 거라 조급한 마음을 먹을 이유가 없었다.
[아! 정말 좋은 서브입니다! 시작부터 느낌이 좋아요!]
[이지혁 선수의 몸 상태가 괜찮은 것 같네요. 오늘 경기도 마이애미 오픈처럼만 해주면 좋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두 선수의 경기가 이번이 세 번째였죠. 지난 6개월 사이에 많이도 맞부딪쳤네요. 정말 질긴 인연입니다.]
[랭킹이 높은 선수들이 자주 겪는 일이죠. 페더러, 나달, 조코비치의 매치가 매번 메이저 대회에서 한 번씩은 있었잖아요. 앞으로도 이런 상황이 많이 생길 겁니다.]
해설자들은 지혁이 고전할 거라는 예상과 다르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자 기대하는 눈빛을 보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 패배할 거라고 평가가 많았기에 내심 걱정했는데 실제 경기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보게 되니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게임 리 1-0.]
그렇게 첫 번째 서비스게임은 러브 게임으로 종료되었다.
[허. 228km, 229km의 속도라니 엄청납니다. 게다가 전부 라인 위를 공략하는 완벽한 서브였습니다.]
[······조금 이상한데요? 컨트롤이 너무 정교한 느낌입니다.]
[아! 이지혁 선수가 사용하고 있는 라켓이 기존의 것과 달랐었죠. 워낙 훌륭한 경기력을 보여줘서 저도 모르게 잊고 있었습니다.]
[조금 더 지켜봐야겠지만 생각지도 못한 결과가 나올 수도 있겠습니다.]
가까운 거리에서 해설자의 말을 듣고 있던 스태프들은 처음에는 그저 방송용 멘트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경기가 다시 시작되어 멘트가 끊기는 시간에도 변하지 않는 진지한 태도에 조금씩 생각이 변하는 사람이 나오기 시작했다.
정말 지혁이 그랜드슬램에서 우승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은 것이다.
만약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방송국의 입장에서 그만큼 좋은 것도 없었다.
어떤 것을 상상하던 간에 반드시 그것을 뛰어넘는 홍보 효과가 나올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