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롤랑 가로스
S증권 실업팀 선수들이 모여있던 숙소는 불과 방금 전까지 시끌벅적했던 게 거짓말인 것처럼 적막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경기에 완전히 몰입한 상태라 주변에 신경을 분산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통. 통. 통. 통.
그렇게 지혁이 코트 바닥에 공을 튕기는 소리가 몇 번 들리길 잠시.
곧이어 무시무시한 속도의 서브가 T존 위로 떨어졌다.
선이 교차하는 지점을 정확하게 노리는 샷에 지혁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저절로 지어졌다.
분명 이틀 전이라면 이 정도까지 높은 숙련도를 보여주진 못했을 것이다.
‘100만이 넘는 포인트를 투자한 보람이 있네. 지금도 기대 이상의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데 만약 A+로 상승하게 된다면 얼마나 더 좋아진다는 걸까.’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실망을 하진 않을 것 같았다.
매번 등급이 한 단계씩 올라갈 때마다 커다란 변화가 찾아왔으니 말이다.
“허엇!”
퉁!
흐릿한 궤적을 따가며 몸을 던지다시피 하며 공을 걷어내는 나달.
반사신경이 뛰어난 그조차도 230km가 넘는 서브를 받아내는 건 쉽지 않나 보다.
지혁은 상대의 리턴 자세가 크게 흔들렸는데도 발리를 사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네트 앞으로 달려간다고 해도 이득을 보는 게 거의 불가능한 코스로 공이 돌아왔던 것이다.
긴박한 상황에서 지금처럼 까다롭게 반격을 하다니 참 재주도 좋다.
‘풋워크도 다른 탑랭커들에 비해 느린 편인데 저 근육덩어리 몸으로 에이스를 잘도 막아내네.’
마음 같아서는 계속 경기를 날로 먹고 싶었지만 이제 시간이 꽤 지났으니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솔직히 세계 랭킹 2위나 되는 선수가 고속 서브에 적응하지 못할 거라고 바라는 건 너무 욕심이긴 했다.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만족해야겠지. 일단 1세트부터 마무리하자.’
마침 이번이 매치 포인트니 이제 한 번만 더 위닝샷을 성공하면 첫 번째 세트가 끝난다.
이후의 일이 걱정되지만 그건 그때 가서 상황이 닥치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나올 것이다.
탕!!
나달과 제법 긴 랠리를 주고받던 도중 갑자기 관중들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만드는 트릭샷을 사용하는 지혁.
스윙을 한 템포 느리게 하는 페이크 동작에 나달은 풋워크 동작이 엉켜 휘청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스트로크의 방향이 처음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반대로 떨어져 미끄러운 클레이에서 균형을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곧 쿵!하는 굉음이 들리고 뒤이어서 두 번째, 세 번째 바운드 소리가 이어졌다.
지혁의 회심의 위닝샷이 성공적으로 들어간 것이다.
[세트 리.]
······우와아아아!
체어 엠파이어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전해지자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기립 박수를 치는 관중들.
몇몇 사람들은 자신이 본 관경을 믿을 수 없는지 눈을 비비면서 눈을 몇 번이나 껌뻑거렸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지혁의 창의적인 플레이에 머리를 둔기로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그렇게 1세트가 6-3으로 종료되자 접전을 벌이던 선수들에게 휴식이 주어졌다.
방송을 통해 경기에 집중하고 있던 시청자들도 어느새 뻐끈해진 몸의 긴장을 풀며 자연스레 대화의 물꼬를 틀 수 있었고 말이다.
“우와! 방금 무슨 짓을 한 거야? 저런 샷을 실전에서 가능하다고?”
“이지혁의 라켓 컨트롤이 정교한 건 알고 있었지만 오늘따라 샷 감각이 더 미친 것 같아. 과장이 아니라 페더러와 비교해도 전혀 밀리지 않는 느낌이야.”
“오랜만에 보는 트릭샷이네요. 챌린저급 대회에서만 보여주던 기술이라 그랜드슬램에서 사용하는 건 힘들 거라 생각했는데 방금 전 위닝샷을 보면 그게 아니었나 봐요.”
“그동안 외부인들이 모르게 꾸준히 훈련을 지속해오던 게 아닐까? 머레이와 했던 경기에서 처음으로 보여준 텐션이 다른 라켓처럼 말이야.”
“음······. 그러기엔 준비 시간이 너무 부족하지 않아? 나달에게 먹힐 정도면 몇 개월 가지고 답이 나올 리 없잖아.”
“세계 최고의 재능을 가진 천재라면 가능할지도 모르지. 애초에 우리처럼 평범한 선수들의 상식이 적용되는 녀석이 아니잖아.”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하지. 어떤 테니스 기술이라도 몇 개월의 시간만 있다면 완벽하게 습득할 수 있다라······. 그게 사실이라면 정말 무서운 일이네. 원하기만 한다면 카멜레온처럼 플레이 스타일을 바꿀 수도 있다는 뜻이잖아. 선수에 따라 맞춤 전략을 가져올 수 있다면 사실상 무적 아니야?”
“글쎄 전례가 없는 일이라서 그게 현실에서 좋을지 모르겠네. 일반적으로 정상급 선수들은 한 가지 스타일만 고집하니까.”
지혁의 화려한 트릭샷이 성공적으로 들어가자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들뜬 목소리로 계속해서 대화를 이어가는 실업팀 선수들.
상상 속에서나 가능할 법한 슈퍼 플레이를 목격하게 되자 그들의 눈빛은 반짝반짝 빛이 났다.
“이러다가 정말 이지혁이 롤랑에서 우승을 하는 건 아닐까? 지금 경기 상황을 보면 꽤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데······.”
“내 생각엔 아직 확신을 가질 정도는 아닌 것 같아. 원래 나달은 후반에 강한 선수잖아. 최소한 2세트까지는 지켜봐야 대강의 윤곽이라도 나올 거야. 동현아, 너는 어떻게 생각해? 승리할 가능성이 보이는 거 같아? 그러고 보니 넌 이런 상황을 기가 막히게 잘 맞추는 편이었지?”
“저도 아직까지는 판단을 내리기 이르다고 생각해요. 굳이 느낌만으로 말하자면 지혁이가 많이 힘들 것 같은데요?”
“응? 지금 상황만 봐서 괜찮은 것 같은데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거야?”
“고속 서브의 이점이 대부분 사라진 것 같아서요. 저는 랠리 싸움에서 나달이 밀리는 모습은 전혀 떠오르지 않거든요. 더구나 클레이 코트에서는 더욱요.”
“지구전에 들어가면 그럴 수도 있겠네. 충분히 일리가 있는 생각이야.”
결국 선수들은 지혁이 다음 세트에서 고전할 거라고 의견이 하나로 모아졌다.
그리고 이런 추측을 하는 건 이들만이 아니었다.
롤랑 가로스의 중계를 맡은 해설진들도 흡사한 멘트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현역 선수들과 전 프로의 시선이 거의 비슷한 모양이다.
은퇴한 지 시간이 꽤 지나서 실력이 크게 하락했지만 경기를 보는 눈만큼은 여전했으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육체는 쇠약해져도 실전에서 얻은 경험이 갑자기 사라질 리 없으니 말이다.
***
[플레이어 레디. 서브 나달.]
나달의 서비스게임으로 다시 시작한 경기.
지혁은 공이 불규칙하게 튀어 오르는 돌발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코트 위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발자국과 바운드 흔적을 테니스화로 지우며 각오를 단단히 했다.
분명 초반에 압도한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세트가 끝날 때쯤 그런 기미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이제 똑같은 0-0의 조건으로 다시 시작하니 나달도 본격적으로 전력을 다해 경기에 임할 것이다.
‘최대한 짧게 끝났으면 좋겠지만 역시 힘들겠지.’
보통 전략은 상대 선수가 가장 꺼려하는 방향으로 만들어지게 된다.
그런 점을 생각해보면 지혁이 원하는 대로 경기가 흘러갈 확률은 낮다.
분명히 가장 아픈 곳을 찔러서 상대를 철저하게 무너트릴 방법을 사용할 것이다.
“후우······.”
지혁은 장기전이 될 거라는 느낌에 벌써부터 한숨이 나왔다.
하지만 이건 반드시 거쳐가야 할 관문이라 이내 라켓을 강하게 쥐며 상체를 아래로 숙였다.
옆에서 보기에 폼이 나지 않는 자세지만 이렇게 몸의 중심이 아래에 있어야 방향 전환이 빨라진다.
리턴 에이스를 한 번이라도 더 성공시키려면 주위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말아야 했다.
[게임 나달 1-0.]
잠시 후, 나달 쪽으로 간단하게 넘어가 버린 서비스게임.
관중들은 싱거운 경기 내용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혁이 힘을 그다지 못 쓰고 위닝샷을 허용했기 때문이다.
이전 세트에서 보여줬던 모습을 생각하면 당연히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게임 나달 2-0.]
“여기서 브레이크를 당한다고? 지금은 체력이 부족할 만한 시점이 아닌데. ”
“이지혁이 랠리에서 밀릴 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지만 설마 이렇게 빠를 줄이야.”
“아무래도 나달이 1세트를 버리고 완급 조절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아. 그게 아니라면 지금 상황이 말이 안 돼.”
“나름 치열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여유를 부리고 있던 실력이었다니. 빅3는 진짜 무섭구나······.”
[피프틴 러브.]
[서티 러브.]
[포티 피프틴.]
[게임 나달 3-0.]
순식간에 기울어버린 2세트에 경기장은 침묵에 휩싸였다.
나달이 본 실력을 드러내자 테니스를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도 선수들 간의 실력이 현격하게 차이가 났던 것이다.
상대조차 되지 않는 모습에 승산이 없다고 생각한 것인지 벌써 고개를 젓는 관중들도 보였다.
실망한 얼굴을 보면 역시 이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이게 말로만 듣었던 클레이 코트의 나달이라고?’
지혁은 나달의 우주 방어에 막혀 게임을 내주고 어이가 없는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갑자기 상대하고 있던 선수가 바뀐 느낌에 당황스러웠기 때문이다.
이건 생각하고 있던 한계치를 한참이나 넘은 실력이었다.
‘체감상 수비 범위가 30% 이상 늘어난 것 같아. 예전에 하드 코트에서 내가 경기를 했던 나달이 진짜 맞는 건가? 도저히 같은 선수라고 느껴지지 않아.’
말이 삼 분의 일이지 이 정도면 코트 전체를 커버하고도 남는 수준이다.
어떤 곳에 스트로크를 떨어트려도 반드시 타구가 돌아온다는 뜻이다.
엄청난 고생을 하며 간신히 승리를 따낸 페더러보다 더한 압박감이라니.
어째서 그에게 흙신이라는 별명이 붙었는지 이제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지혁도 답답한가 보네. 하긴 답이 안 나오는 상황이긴 해.”
“나라도 저 상황에 처하면 막막할 것 같아. 마땅한 돌파구가 없는 것 같은데. 저건 단순히 코트 커버력이 뛰어난 것뿐이라 머리를 부딪치는 방법밖에 없잖아.”
“맞아. 그게 베이스라이너의 진정한 무서움이지. 자신보다 기량이 떨어지는 선수에게 승률이 극단적으로 높으니까.”
“그러면 남은 경기는 얼마나 날카로운 위닝샷을 넣느냐가 관건이겠네. 그래도 재미는 있겠다.”
“발버둥을 치다 보면 명장면이 많이 나올 수밖에 없겠지. 이지혁은 완전 죽을 맛이겠지만 관중들은 계를 탔네. 다양한 공격 옵션들을 볼 수 있을 테니 말이야.”
그렇게 2세트는 지혁이 나달의 수비를 뚫기 위해 온갖 방법을 사용하는 모습이 계속 반복되었다.
다행히 고속 서브가 조금이나마 통하는 편이었지만 스트로크만 들어가면 계속 실점을 허용했다.
지혁은 그런 암담한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한 손 백핸드, 트릭샷, 드롭샷, 발리, 크로스샷, 다운 더 라인, 로브, 슬라이스 등의 공격을 쏟아부었다.
그 화려한 퍼포먼스에 관중들의 환호성은 멈출 새도 없이 계속해서 터져 나왔다.
결과적으로 경기를 뒤집는데 큰 효과가 없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