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롤랑 가로스
타다다다!
사이드라인으로 떨어지는 나달의 포핸드 스트로크를 급하게 따라가는 지혁.
부족한 거리를 만회하기 위해 슬라이딩까지 시도했지만 타구는 미세한 차이로 라켓을 벗어나 버렸다.
지혁의 풋워크로 따라가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었던 것이다.
[인! 게임 나달 5-2.]
라인 위를 아주 잠깐 확인하고 나서 곧바로 판정을 내리는 체어 엠파이어.
그렇게 2세트는 나달 쪽으로 완전히 기울어버렸다.
그쯤 되자 지혁도 위닝 샷을 성공시키는 것에 집착하지 않고 수비적인 자세를 고수했다.
이번 세트의 결말이 너무 뻔한데다가 아직 경기가 많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나중에 만회할 기회가 충분히 있으니 쓸데없이 힘을 빼는 것보다 그때를 대비해서 체력을 비축하는 게 현명한 일이다.
“2세트를 버리려고 하는구나. 하긴 선택과 집중이 중요한 순간이긴 하지.”
“그런데 경기 분위기가 한쪽에 치우친 것에 비해 위닝샷이 나오는 텀이 묘하게 느린 것 같은데 내 착각인가?”
“아니. 내가 보기엔 나달이 의도적으로 랠리를 길게 가져가고 있어. 이지혁은 8강과 4강에서 초장기전을 하느라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잖아. 분명히 그 점을 공략하려고 저런 플레이를 하고 있는 걸 거야.”
“지금처럼 유리한 상황에서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아마 여지를 조금도 주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겠지. 마이애미 오픈에서도 방심하다가 참패를 당한 일이 있었으니까.”
실제로 나달은 변수도 허용하지 않기 위해 오늘 경기에 완벽에 가까운 전략을 가지고 왔다.
이전에 예기치 못한 패배를 겪은 경험으로 인해 지혁을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 경계 대상에 올려두었기에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우직하게 밀고 나간 것이다.
관중들은 밑바닥부터 조금씩 빌드업이 되어가는 정확한 경기의 내막을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건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지혁이 고전을 하는 모습을 보고 본능적으로 숨통이 조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저 철벽같은 수비를 뚫을 수 있을까.’
당장 써먹을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시험해봤는데 도통 그 효과가 시원치 않았다.
아무리 찾아봐도 나달에게 약점이라 할 만한 부분을 찾기 힘들었던 것이다.
‘이럴 거면 차라리 페더러를 상대하는 게 훨씬 낫겠어.’
어떤 샷을 치더라도 무조건 돌아오는 탓에 사람이 아니라 마치 벽을 향해 라켓을 휘두르는 기분이다.
분명히 위닝샷이 들어가도 이상하지 않을 위력의 스트로크가 수도 없이 나왔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으니 말이다.
객관적으로 비교했을 때 경기 센스나 스트로크 결정력은 페더러가 수준이 더 높았다.
문제는 나달이 코트 커버력 하나만으로 그걸 전부 극복해버렸다는 거지만.
짧은 휴식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고 다시 시작한 경기.
지혁은 3세트가 되자마자 이때까지 완급 조절을 하던 모습이 마치 거짓말이라는 듯 활동량을 부쩍 올렸다.
여기서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달은 풀세트까지 가는 장기전을 고려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절대 그 의도대로 따라갈 생각이 없었다.
지금 같이 암담한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승산을 높이는 방법은 단기 결전뿐이다.
[게임 리 3-3.]
3세트는 브레이크가 나오지 않은 채 계속 지속되었다.
분명 나쁘지 않은 스코어이긴 하지만 지혁이 오버페이스를 했는데도 승기를 가져오지 못했기에 유리한 상황은 절대 아니었다.
“아무래도 여기서 체력을 전부 사용할 생각인가 보네. 시기를 잘 맞춰서 내린 결정이긴 해.”
“계획이 틀어지면 사단이 날 텐데. 경기 템포가 빠른 걸 보면 마지막 세트까지 갈 생각이 전혀 없나 봐.”
“무조건 4세트 안에 결정짓겠다는 각오겠지. 나름 괜찮은 전략인 것 같아. 어중간하게 경기를 질질 끌면 유리한 건 나달일 수밖에 없으니까.”
“그래도 기대 이상으로 잘해주고 있긴 하네. 비록 주도권을 잡진 못했어도 클레이의 신을 상대하면서 대등한 실력을 보여주고 있잖아. 만약 저 자리에 다른 탑랭커가 있었다면 이 정도 경기력을 절대 보여주지 못했을 거야. 클레이 코트가 아니었다면 판도가 크게 달라졌을 걸.”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는 경기를 지켜보며 잡담을 나누는 선수들.
하지만 점점 격렬해지는 지혁과 나달의 대결에 그들의 표정은 점점 딱딱하게 굳어가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결판이 날 거라 생각했던 3세트가 무려 1시간을 넘었음에도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통 그랜드슬램보다 아랫 단계에 있는 마스터즈, 챌린저, 퓨처스 같은 대회들의 한 경기가 1시간 내외로 끝나는 경우가 많은 걸 생각하면 이건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
결국 선수들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경기에 할 말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존경심마저 느껴지는 지혁과 나달의 지독한 집념이 화면 너머로 생생히 전해져서 식은땀이 흘렀던 것이다.
이런 명경기가 눈앞에서 펼쳐지는데 한가롭게 잡담이나 떠들 수는 없었다.
***
그렇게 3세트를 시작한 지 시간이 제법 흘렀을 무렵.
지혁은 한층 초췌해진 안색으로 타이브레이크를 치르고 있었다.
잠깐의 휴식조차 하지 못 하고 경기를 치르느라 완전히 만신창이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그와 반대로 나달은 숨만 조금 거칠어졌을 뿐 여전히 멀쩡한 모습이었다.
롤랑 가로스 결승까지 올라오면서 모든 경기를 3-0이나 3-1로 이기고 온 데다가 피지컬이 워낙 압도적이라 이 정도 활동량으로 꿈쩍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탕!!
[12-11 어드벤티지 리!]
포핸드 발리로 간신히 한 포인트를 달아나는 데 성공한 지혁.
팬들은 다시 주어진 기회에 주먹을 꽉 쥐며 기대가 담긴 시선을 보냈다.
이쯤이면 충분히 세트가 마무리되고도 남을 시점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서브권이 나달에게 넘어가자 우세했던 점수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12-12. 나달!]
체어 엠파이의 목소리에 아쉬움과 안도의 한숨을 쉬는 관중들.
아무래도 팬들이 응원하는 선수가 나뉘어 있어서 반응이 각양각색인 것 같았다.
전 세계에서 모인 15,000명의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으니 이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번 롤랑 가로스에서 타이브레이크가 24포인트까지 갔던 적이 몇 번이나 있었죠? 실력이 비슷한 베이스라이너끼리 장기전을 하는 경우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이건 길어도 너무 긴데요.]
[두 선수들이 이번 세트를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포기할 법한 스트로크도 정말 악착같이 따라가서 받아내네요.]
[아! 나달이 이번에도 자신의 서브를 지켜냅니다. 세트를 끝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정말 아쉽습니다.]
[저희가 생각하는 것보다 경기 시간이 훨씬 길어질 수도 있겠어요. 이지혁 선수가 그때까지 버텨주면 좋겠습니다.]
[아마 세트를 내주게 되면 승률이 크게 하락하겠죠. 이렇게 어마어마한 노력을 쏟아붓고도 패배하게 되는 상황은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그런 상황은 절대로 생기면 안 돼요.]
최대한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고 내심 바라고 있던 지혁의 생각과 다르게 경기의 스코어는 끝을 모르고 올라갔다.
처음에는 흥미로운 시선을 보내던 진행 요원들과 볼 키즈들도 이제 완전히 질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휴식도 없이 3게임이 넘어가는 분량의 경기를 하느라 선수들의 상태가 악화되는 게 실시간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가까운 좌석에 앉은 여성 팬들은 지혁이 스트로크를 쫓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고통이 전해지는지 차마 시선을 두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기까지 했다.
탕!!
[17-17 리!]
“허억···. 허억···.”
나달의 수비를 뚫고 어렵게 백핸드 위너를 성공시킨 지혁.
코트의 위치를 가리지 않고 전방향에서 쏟아지는 스트로크를 막느라 호흡은 이미 심각할 정도로 거칠어져 있었다.
솔직히 지금까지 뛰어다닌 거리를 생각하면 탈진하지 않은 것도 신기한 일이었다.
‘이런 페이스라면 얼마 버티지 못할 것 같은데······.’
의지만으로 극복하는 게 가능하다면 어떻게든 참아봤을 것이다.
고통을 참는 건 너무나 익숙하니 어려운 일도 아니다.
하지만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니라 지금 신체가 가지고 있는 한계가 원인이었다.
[아······. 롤랑에서 쌓인 피로가 여기서 터지네요. 더는 경기를 이어가기 힘들어 보입니다.]
[확실히 풋워크가 많이 느려졌습니다. 최고의 컨디션으로 결승전에 올라왔다면 지금과 상황이 달라졌을까요.]
[아마 높은 확률로 그랬겠죠. 페더러와 나달이 그랬던 것처럼 높은 라운드까지 비교적 쉽게 진출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러면 적어도 4세트까지 괜찮았을 겁니다.]
[이지혁 선수가 오늘 뼈저린 경험을 했으니 다음 경기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피지컬 트레이닝에 더욱 집중해야겠어요. 물론 지금도 평균을 상회하는 수준이긴 하지만 메이저 대회 우승을 가지고 경쟁하는 페더러, 나달, 조코비치와 비교하면 아직 많이 부족한 편입니다.]
[그래도 한창 육체가 성장하는 시기라 다른 선수들에 비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거예요. 성장 호르몬이 많이 생성되는 나이잖아요. 타고난 신체 조건과 꾸준한 훈련이 받쳐준다면 충분히 이룰 수 있는 목표일 겁니다.]
해설자들은 결승전의 승자가 이미 정해졌다고 생각해서 롤랑이 끝난 이후의 일을 화제에 올렸다.
눈이 있다면 지혁이 나달을 제압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시청자들도 그 사실을 알고 과반수 이상이 기대를 접고 있었다.
탕!! 탕!! 탕!! 탕!!
“크윽.”
백핸드 코스만 집요하게 노리는 공격에 신음을 흘리는 지혁.
그렇게 스트로크가 같은 코스로 여섯 차례나 반복되다가 갑자기 방향을 바꿔 오른쪽으로 떨어졌다.
퉁!
급하게 달려가며 손을 쭉 뻗자 라켓에서 묵직한 무게감이 자연스럽게 실렸다.
공이 네트를 넘어가는 것을 보면 다행히 나달의 노림수를 막아내는 데 성공한 모양이다.
하지만 급하게 달려온 탓인지 시야가 옆으로 빠르게 기우는 게 느껴졌다.
지혁은 본능적으로 오른손을 뻗으려다가 이내 혹시 모를 부상을 떠올리고 몸을 돌렸다.
잠시 후, 코트에서 쿵!하고 넘어지는 소리와 고통스러운 신음이 동반해서 들렸다.
“으음······.”
[아! 이지혁 선수가 달려가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넘어집니다. 부딪치는 소리가 상당히 컸는데 부상이 없었으면 좋겠네요. 체력이 크게 떨어진 상태에서 악재가 겹치면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겁니다.]
[그나마 주력으로 하는 손이 아닌 왼손으로 바닥을 짚는 모습이 보였는데요. 저 짧은 순간에 대단한 판단련입니다. 부상의 정도는 아직 정확하게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메디컬 타임을 부르지 않는 걸 보면 크게 문제가 없는 것 같네요.]
[네. 경기가 다시 재개됩니다. 몸을 던지는 플레이로 어드벤티지를 얻었으니 이번에야 말로 세트 포인트를 얻어야 합니다. 여기서 경기가 더 길어지면 좋을 게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