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롤랑 가로스
작은 해프닝이 일어나고 다시 재개된 경기.
지혁은 타이브레이크를 하면서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져있었다.
분명 이때까지 나달에게 밀리지 않고 있었는데 갑자기 형편없는 경기력을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턱!
네트 중단에 걸려 떨어지는 지혁의 백핸드 스트로크.
나달은 공짜 포인트를 얻어걸렸지만 당장의 기쁨보다 의아한 생각이 먼저인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허무하게 포인트를 내준 지혁의 플레이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다.
[20-19. 어드벤티지 나달!]
와아아아아!
마침내 길었던 대결이 끝날 기미가 보이자 오랫동안 유지됐었던 침묵이 깨지며 뜨거운 환호성이 쏟아졌다.
이번에야 말로 경기를 마무리 지을 수 있을 거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지혁은 치명적인 실점을 당했음에도 주변의 반응보다 자신의 현재 상태에 온통 신경이 쏠려 있었다.
‘단순하게 넘어갈 상태가 아닌 것 같은데······.’
처음에는 가벼운 타박상이라 시간이 지나면 통증이 가라앉을 거라 생각했는데 움직일 때마다 견디기 힘든 고통이 느껴지는 걸 보니 그 예상은 완전히 빗나간 것 같았다.
[스윙 자세가 조금 이질적인 것 같지 않습니까? 정확하게 짚을 수는 없지만 어딘가 미세하게 뒤틀린 느낌입니다.]
[착각이겠죠. 랭킹 10위나 되는 탑랭커가 그럴 리 있겠어요. 게다가 이지혁 선수의 라켓 컨트롤은 정교하기로 유명하잖아요.]
[하긴 프로 지망생들에게 교보재로 쓰일 만큼 완벽한 기본기를 가지고 있는데 제가 잘못 본 모양이네요.]
해설자들은 처음에는 그저 우연이라고 생각하고 지혁의 실책을 그냥 넘겼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챘다.
정말로 스트로크 정확도가 크게 떨어진 것이 확연하게 보인 것이다.
이 정도면 일반인도 눈치챌 수준이라 모른 척하기도 힘들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죠. 이러다가 정말 세트를 빼앗길 수도 있습니다. 너무 위태로워 보여요. 흔들리지 말고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저희가 모르는 문제가 있는 모양입니다. ······잠깐만요. 아까 이지혁 선수가 넘어질 때 바닥을 짚은 손이 왼손이었죠. 게다가 양손 백핸드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설마 그때 부상을 당한 거라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게 아니라면 위력과 정확도가 떨어지는 한 손 백핸드를 고집할 이유가 없습니다. 평소 주력으로 사용하던 백핸드 자세를 갑자기 보여주지 않고 있잖습니까. 만약 지금이 여유를 부릴 상황이라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가겠지만 그런 것도 아니고요.]
해설자는 화면에서 지혁이 랠리 중인 모습을 가리키며 확신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어색한 플레이 스타일에 설득당하는 사람들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다.
정말로 양손 백핸드가 단 한번도 나오지 않아서 믿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탕!!
스트로크가 점점 길어질수록 유리한 위치를 찾아가는 나달.
지혁은 조금씩 걸음이 모자란 모습을 보이더니 곧 코트 외각을 공략하는 다운 더 라인을 따라가지 못했다.
아아아아······.
그러자 관중석에서 안타까운 목소리가 퍼졌다.
이번에 스트로크를 놓친 건 3세트를 패배했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승리가 멀었는데 이제 가능성이 10% 미만으로 추락해버렸다.
[결국 나달이 이번 롤랑 가로스에서 가장 길었던 타이브레이크를 끝내며 세트를 가져가네요. 가장 기본적인 스트로크 대결에서 밀리니 방법이 없어요.]
[경기장에 있는 팬분들도 아쉬운 반응을 보이는군요. 아, 체어 엠파이어가 지금 메디컬 타임을 선언했습니다. 의료진이 움직이는 방향을 보면 이지혁 선수의 요청인가 봅니다. 악재가 한꺼번에 겹쳤어요]
지혁이 메디컬 타임을 이용해 간의 치료를 받게 되자 해설자들은 걱정하는 시선을 보냈다.
솔직히 경기력에 지장이 있을 정도면 상태가 좋을 리 없다.
진단에 따라 기권이 나올 수도 있었기에 만 명이 넘는 관중들은 의료진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중했다.
조금이라도 소식을 일찍 듣기 위해서였다.
“정밀검사를 해봐야 정확하겠지만 다행히 심각한 부상은 아니네요. 그래도 웬만하면 왼손을 사용하지 마세요. 지금은 괜찮다고 해도 상태가 더 나빠진다면 얘기가 달라지니까요.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시겠죠?”
“······네. 주의하죠.”
의료진은 차마 그랜드슬램 결승전에서 기권을 권유하지 못하겠는지 왼손 사용을 봉인하라고 충고했다.
은근슬쩍 돌려서 말해서 그렇지 사실상 경기를 포기하라는 뜻이었다.
한 손을 묶고 세계 랭킹 1위를 상대하라니 그런 조건으로 세트를 따내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겠는가.
만약 상대가 50위 대의 탑랭커라면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었지만 오늘 경기는 롤랑 가로스 결승이다.
[이지혁 선수가 여기서 경기를 기권하더라도 책망하는 팬들은 없을 겁니다. 무리하지 않아도 돼요.]
[제발 어린 치기에 고집을 부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모든 결정은 선수에게 전적으로 달린 거지만 앞으로 프로로 활동할 시간을 생각하면 기회는 충분히 남아있습니다.]
[의료진이 붕대를 감아줍니다. 부상 부위는 역시 왼쪽 손목이었어요.]
[대화가 길어지니 기권 여부는 조금 더 기다려봐야겠네요. 이제 메디컬 타임도 몇 분 남지 않았으니 곧 어떤 선택을 했는지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지혁이 치료받는 모습이 실시간으로 중계되자 한국 시청자들의 반응은 난리가 났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천재 유망주의 부상은 그만큼 사람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기 때문이다.
만약 여기서 시즌 아웃을 당한다면 한동안 그랜드슬램에 참가하는 국내 선수가 없어서 그런 것도 있었다.
도저히 대체할 방법이 없으니 더 큰 관심을 받게 된 것이다.
ㅡ 아니 얼마나 다친 거야? 이러다가 다음 그랜드슬램까지 영향이 가는 건 아니겠지? 윔블던도 얼마 안 남아서 재수 없으면 불참하는 최악의 경우도 생기겠는데.
ㅡ 아······. 이지혁도 니시코리랑 똑같은 전철 밟는 거 아니냐. 걔도 잭 나이프 계속 쓰다가 부상으로 엄청 고생했잖아. 이름 있는 유망주들은 전부 연례 행사처럼 부상 이슈가 터지네.
ㅡ 랭킹 20위 안에 들어간 적도 없는 니시코리보다 호주 오픈에서 우승하고 시즌 아웃당한 델 포트로가 더 비슷한 케이스지. 그런데 이제 희망이 전혀 없어 보이네 ;;
ㅡ 어휴. 머레이랑 페더러하고 경기할 때부터 알아봤다. 성인 선수들도 소화하는 게 힘든 스케줄을 아직 성장기도 안 끝난 미성년자가 억지로 참아가면서 했으니 문제가 생기는 게 당연하지. 멀쩡한 게 오히려 이상했음.
ㅡ 뛰어다니는 거 보면 골절이나 인대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닌 모양이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다.
ㅡ ㄴㄴ 예전에 팔 부러진 채로 경기한 선수도 있어서 아직 확실한 건 아님. 게다가 이지혁이 인내심이 강한 걸로 엄청 유명하잖아.
ㅡ 너희들 만약에 기권하더라도 경기 끝나고 스포츠 기사에 이상한 댓글 달아서 부담 주지 마라.
ㅡ ㅇㅈ 애초에 결승까지 올라온 것도 기대를 훨씬 초과한 성적임. 이 정도 활약이면 할 만큼 했지. 괜히 멘탈 건드려서 슬럼프 빠지면 우리만 손해다.
시청자들의 전반적인 여론은 기권을 하더라도 얼마든지 이해할 거라는 분위기였다.
그랜드슬램 우승이 중요하다고 해도 지혁의 가치와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었기에 굳이 무리해서 경기를 하는 걸 바라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어차피 비슷한 수준의 대회가 하반기에 많이 열리는 만큼 몸을 사리는 게 여러 측면에서 유리했다.
***
그렇게 몇 분이 지나 메디컬 타임이 끝날 무렵.
결국 지혁은 4세트를 하기 위해 코트 위로 올라가는 모습을 보였다.
그 결정에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관중들은 복잡한 감정이 담긴 시선으로 드문드문 박수를 쳤다.
경기장에서 애매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는 것은 정확한 자초지종을 파악하지 못한 탓이다.
만약 치명적인 후유증이 생길만한 부상을 감수하고 계속 경기를 하는 거라면 절대 좋은 일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플레이어 레디. 서브 나달.]
탕!!
잠시 후, 나달의 서브로 다시 시작한 경기
4세트는 당연하게도 지혁이 일방적으로 포인트를 빼앗기는 모습이 연출되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스코어가 2-0까지 치솟아 버린 것이다
이 지경까지 왔으면 봐줄 법도 하지만 나달은 조금의 자비도 보여주지 않았다.
아무래도 어설프게 봐주는 것보다 빨리 끝내주는 것이 더 배려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솔직히 일찍 휴식을 취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나름 일리가 있는 행동이었다.
쿵!!
지혁은 백핸드를 공략하는 탑스핀 스트로크에 이를 악물며 라켓을 휘둘렀다.
높게 튀어 오르는 타구를 최선을 다해 맞춰보려고 노력해봤지만 왼손을 신경 쓰느라 백핸드 자세는 이미 심각하게 뒤틀린 상태였다.
“크윽······.”
부정확한 임팩트에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는 지혁.
곧이어 손아귀에 쥐어져 있던 라켓이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다.
강력한 스트로크의 위력을 버티지 못하고 힘이 풀려버린 것이다.
[게임 나달 3-0.]
조용하던 코트에서 라켓과 공이 몇 번이나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자 이내 체어 엠파이어의 판정도 떨어졌다.
완전히 기울어버린 스코어에 지혁의 팬들은 한숨을 푹 쉬며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마지막까지 기권하지 않고 경기를 한다는 의미 말고 아무런 희망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패배가 거의 확정된 거나 다름없어서 응원할 기운이 생길 리 없었다.
‘······3-0이라. 차라리 기권하는 게 나으려나.’
그랜드슬램 결승전에 올라온 게 처음이라 차마 도중에 경기를 포기하지 못했지만 이쯤 되니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
괜히 관중들의 시간을 뺏으며 형편없는 경기력을 보여주는 것보다 깔끔하게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지혁이 심란한 표정으로 망설이고 있을 때, 갑자기 익숙한 음성이 머릿속에서 들렸다.
호주 오픈에서 한 번 경험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어플이 위기를 돌파할 해결책을 제시해 주려는 것 같았다.
‘10만 포인트를 사용하여 체력을 당겨 쓸 수 있다고?’
지불해야 하는 대가가 제법 크긴 하지만 그랜드슬램 결승에서 이 정도는 얼마든지 감수할 만했다.
지혁은 즉시 어플을 사용하려고 손을 움직이다가 하단에 숨겨져 있는 페널티를 발견하고 행동을 멈칫했다.
‘······일단 지금 상황부터 벗어나는 게 우선이야.’
이게 옳은 선택인지 확신하긴 어려웠다.
나중에 부작용으로 고생을 할 게 눈에 훤했지만 그랜드슬램 결승을 놓치기엔 너무 아까웠다.
이런 기회가 언제 다시 찾아올 줄 알고 순순히 트로피를 양보한단 말인가.
아마 어떤 선수를 데려다 놓는다고 해도 이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지혁과 똑같은 선택지를 고를 것이다.
오늘 경기에 걸려 있는 보상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어마어마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