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롤랑 가로스
“허억···. 허억···.”
조용한 경기장에서 뚜렷하게 들려오는 거친 숨소리.
선수들은 흙과 땀으로 전신이 더러워진 채 서서 체력을 회복하고 있었다.
1분도 채 되지 않는 여유 시간이지만 다음 게임이 시작될 때 사용할 힘을 비축하기 위해서였다.
‘이제 11-11이야. 앞으로 2세트. 무조건 그 안에 끝내야 해.’
지혁은 그 이상 경기를 소화할 자신이 전혀 없었다.
만약 계획대로 이루어진다면 최종 스코어는 13-11로 종료될 것이다.
볼 키즈들은 조금이라도 더 쉬고 싶은 선수들의 마음을 모르는지 재빠르게 뛰어다니며 자신들이 맡은 임무를 모두 마쳤다.
그렇게 사전 준비가 끝나자 체어에서 경기 시작 신호가 떨어졌다.
같은 시간 S증권 실업팀 숙소.
“롤랑 가로스에서 나달을 여기까지 몰아붙일 수 있다니······. 정말 대단한 녀석이긴 하네요. 앞으로 지혁이가 어디까지 올라갈지 상상조차 되지 않아요.”
흥분이 가라앉지 않는지 몸을 부르르 떠는 동현.
예상을 한참이나 뛰어넘는 지혁의 미친 활약에 숙소에 있던 선수들은 100%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경기는 프로 입장에서 봤을 때 찬사를 보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 지금 중계를 보고 있는 상위 랭킹의 선수들도 비슷한 심정일 것이다.
빅3 이후, 다음 세대를 지배하게 될 황제는 이제 델 포트로가 아니라 지혁이라고 말이다.
“와. 벌써 새벽 4시가 넘었잖아? 그러면 결승이 시작한 지 6시간이 넘었다는 건가? 보통 그랜드슬램이 3시간 내외로 끝나니까 휴식도 없이 두 경기를 연달아 뛰었다는 거네······. 저게 인간이 맞긴 해?”
“베이스라이너의 끝판왕인 나달은 그렇다고 쳐도 이지혁은 엄청 의외인데. 원래 체력에 강점이 있는 선수가 전혀 아니었잖아. 오히려 약점으로 지적받기나 했지.”
실제로 지혁은 다른 탑랭커들에 비해 절대 지구력이 떨어지는 편이 아니었지만 워낙 경쟁자들이 쟁쟁한 탓에 종종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는 경우가 많았다.
분명 억울한 측면이 있다고 해도 랭킹이 높은 선수들이 필연적으로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탑10 안에 들어가는 핵심 선수에게 어중간한 탑랭커들과 똑같은 잣대를 들이밀 수는 없으니 말이다.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봤을 때 곧 결판이 날 것 같은데. 역시 나달이 이기겠지?”
“그래도 이지혁은 단기 결전에서 무시무시한 저력을 발휘하는 걸로 유명하잖아. 그 변수를 무시할 수 없지.”
“저도 지혁이에게 손을 들어주고 싶어요. 솔직히 승률은 비슷할 것 같지만 그게 더 재밌을 것 같거든요.”
선수들은 2:1로 의견이 나뉘어져 자신의 예측을 비교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10여분쯤 시간이 흘렀을까.
TV에서 판도를 뒤바꿀 결정적인 위닝샷이 들어가는 장면이 송출되었다.
와아아아아!
화면 너머로 전해지는 뜨거운 열기에 전염된 것인지 관중들처럼 환호성을 지르는 동현과 실업팀 선수들.
그들은 흥분으로 인해 얼굴이 잔뜩 붉어진 채 지혁의 성과를 극찬했다.
“드디어 첫 브레이크가 나왔어! 너희들도 이지혁이 보여준 슈퍼 플레이를 봤지? 진짜 언제 봐도 장난이 아니구나. 나달도 속수무책으로 당하다니 말이야.”
“여기서 끝장을 볼 생각인가 본데? 경기 템포가 눈에 띄게 올라갔어.”
“스코어가 12-11이니 이제 1게임, 딱 1게임만 이기면 돼요. 마침 다음 서비스게임도 지혁이 차례라서 절호의 기회예요.”
“아무래도 지금 상황을 노린 것 같은데? 잔뜩 벼르고 있었나 봐.”
지혁과 나달에게 휴식 시간이 주어지자 어디서부터 사전 빌드업이 시작했는지 갑론을박을 벌이는 선수들.
시끄러운 목소리와 들뜬 얼굴을 보면 짧은 시간 안에 수다가 끝날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TV에서 체어의 목소리가 들리자 숙소에서 시끄러운 대화 소리가 뚝 끊어졌다.
선수들은 경기를 한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은 간절한 마음에 입을 다물고 집중했다.
***
5세트 24게임.
지혁은 결승전의 마지막 될지도 모르는 서비스게임를 하기 위해 코트 위로 올라갔다.
“후우···.”
정해진 위치에 도착하자마자 저절로 나오는 한숨.
모든 걸 쏟아부은 만큼 만약 이번 게임에서 끝내지 못하면 끔찍한 결과를 맞게 될 것이다.
절체절명의 기로에 선 상황이라 큰 무대 경험이 많았던 지혁조차 손이 가늘게 떨렸다.
극한의 스트레스가 몸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서브 리.]
경기를 시작하라는 목소리를 듣는 순간까지 도무지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지혁은 손바닥으로 몸 이곳저곳을 때렸다.
이렇게라도 해서 굳어있는 근육을 풀어주기 위해서였다.
선수들의 루틴처럼 미신적인 방법이라 효과가 있을지 미지수지만 약간은 도움이 되는 느낌이다.
적어도 경련은 제법 줄어들었으니 말이다.
“하앗!”
쾅!!
커다란 기합 소리와 함께 T존 근처를 공략하는 지혁의 플랫 서브.
타구의 속도가 크게 하락했음에도 서브의 실질적인 위력은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이미 선수들이 크게 지쳐있는 상태라 이 정도만 해도 충분했던 것이다.
탕!! 탕!! 탕!!
지긋지긋한 랠리가 이어지자 지혁은 내심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지친 몸이 머리를 따라가지 못해서 포인트를 따낼 기회를 벌써 몇 번이나 놓쳤다.
간단한 스트로크조차 제약이 걸려서 마치 물 속에서 경기를 하는 느낌이다.
‘쯧. 경기 초반이라면 진작 끝낼 수 있었을 건데.’
결국 먼저 인내심이 바닥나서 공세에 들어서게 된 건 지혁이었다.
앞으로 네 개의 포인트만 얻으면 된다는 생각에 무리를 하기로 결단을 내린 것이다.
탕!!
실책이 나오지 않을 법한 스트로크만 계속 반복되는 상황에서 돌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잭 나이프.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을 노린 절묘한 샷에 나달은 허겁지겁 바운드 지점으로 달려갔다.
슬라이딩까지 하는 위험을 감수해서일까 타구는 간발의 차이로 라켓에 걸려 네트를 넘어왔다.
‘······끈질기네. 얌전히 들어갔으면 좋았잖아. 이것도 받을 수 있나 보자.”
지혁은 그 후로 라이징샷과 발리의 연계로 첫 포인트를 어거지로 가져왔다.
고난이도의 기술이 연달아서 성공하자 주변에서 괴물을 보는 듯한 시선이 쏟아졌다.
이렇게 슈퍼 플레이의 향연이 벌어진 건 찰나의 횟수에 제한을 두지 않고 경기에 임한 덕분이다.
솔직히 3번 연속으로 이 기술을 사용하는 건 처음이었는데 효과를 보니 거의 무적이나 다름없었다.
‘조금 있으면 부작용으로 어마어마한 체력 저하가 닥칠 테니까 퇴로는 전부 끊어졌어. 무조건 여기서 마무리를 지어야 해.’
이제 자신의 선택을 되돌릴 방법도 없다.
무언가에 쫓기듯이 서브를 재개하는 지혁.
웬만하면 개인 정비를 하면서 간격을 두고 싶었지만 언제 부작용이 빚쟁이처럼 들이닥칠지 몰라서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탕!!
[서티 러브.]
두 번째 포인트도 이전과 거의 비슷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나달이 수비를 하느라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모습이 나온 것이다.
갑자기 몇 단계나 올라간 실력에 이상하다는 시선을 보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내 뛰어난 재능 덕분에 생긴 일이라고 생각했다.
원래 지혁은 결정적인 순간에 엄청난 실력을 발휘하는 일이 많았으니 말이다.
쾅!!
[포티 러브. 매치 포인트 리.]
클레이 코트에 내려 꽂히는 스매쉬.
마치 땅에 박혀버릴 듯한 무시무시한 위력에 나달은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하고 공이 지나가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이제 한 포인트만 더 들어가면 끝인가······. 정말 길었어.’
두 번 다시 이런 경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마치 수명을 깎아가며 플레이하는 경험은 어떤 선수라도 반기지 않을 거다.
‘이번이 첫 그랜드슬램 우승이 달려있어서 그렇지 만약 나중에 비슷한 상황이 닥친다고 해도 한계를 넘는 일은 절대 없을 거야.’
오늘 경기가 끝나고 어떤 여파가 닥칠지 벌써 두려울 지경이다.
‘어플에 외상을 달아둔 게 너무 많아서 간단하게 넘어갈 방법은 없겠지······. 내가 윔블던을 출전할 수나 있을까.’
막상 빚을 갚을 때가 다가오니 후회가 밀려왔지만 지금 상황을 되돌리는 건 불가능하다.
지혁은 근심이 가득 담긴 한숨을 쉬며 묵묵히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다.
휙-
곧이어 하늘 높이 던져진 공.
삐걱거리는 몸을 전력을 다해 회전시키자 라켓에서 서브가 번개처럼 쏘아졌다.
쿵!!
[SERVE SPPED 201km/h]
현재 지혁이 얼마나 지쳐있는지 정확하게 수치로 나타내는 전광판.
서브 속도가 25km 이상 떨어진 걸 보면 정상적인 상태가 아닌 건 분명했다.
나달은 지금이 최악의 상황인 걸 알고 있음에도 좌절하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솔직히 6시간이 넘는 초장기전에서 패배 직전에 몰리게 되면 멘탈이 흔들릴 법도 한데 과연 빅3 답게 수양이 대단하다.
아마 그랜드슬램 트로피를 6번이나 들어 올린 경험이 있어서 저런 자세가 가능한 거겠지.
“하앗!”
탕!!
날카로운 각도를 만들어내며 사이드라인을 공략하는 지혁의 한 손 백핸드.
나달은 나름 분전을 했지만 결국 경기의 판도를 바꾸지는 못했다.
마침내 세트를 마무리 짓는 위닝샷이 들어간 것이다.
[게임 세트. 매치 리 6-3, 3-6, 6-7(19-21), 6-4. 13-11.]
체어 엠파이어의 최종적인 판정이 떨어지고 경기장은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관중들도 상황을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조금 필요한 모양이다.
······우와아아아아!
그렇게 몇 초쯤 지났을까.
곧 거대한 함성이 경기장을 뒤덮으며 모든 관중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기립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다.
최연소 그랜드슬램 우승자가 탄생하는 역사적인 순간에 감명을 받은 것인지 눈물을 글썽이는 팬들도 보였다.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은 채 계속 이어지는 찬사.
멍하니 있던 지혁은 그제야 자신이 우승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정말로 내가 이긴 건가?’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신경이 풀리니 피로가 한 번에 덮치는 것 같았다.
“어···어!”
시야가 암전되면서 몸이 옆으로 기울어지는 모습에 볼 키즈들이 놀란 목소리를 내었다.
정신을 차리려고 아무리 발악을 해도 밀려오는 수마를 거역하는 건 어려웠다.
흐릿한 시야 속에서 의료진들이 허겁지겁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쿵!
잠시 후, 경기장에서 무거운 물체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결국 지혁이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혼절해버린 것이다.
그렇게 롤랑 가로스 결승전은 트로피 수여식과 승자 인터뷰도 진행하지 못하고 끝나버렸다.
사상 초유의 사태가 일어난 덕분에 언론은 엄청난 숫자의 기사를 쏟아냈다.
안 그래도 최연소 우승자가 나온 상황에서 부상 이슈까지 겹쳐서 지혁은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사람들의 주목을 더 크게 받게 되었다.
테니스 팬들 사이에서는 이제 빅3가 아니라 지혁을 포함해서 빅4로 부르는 게 맞지 않냐는 얘기가 돌기 시작했다.
최근 성적을 보면 빅3의 말석인 조코비치와 비교해도 전혀 부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 여론이 조금만 더 받쳐준다면 충분히 페더러, 나달, 조코비치와 같은 반열에 들어가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그만큼 최근 메이저 대회에서 임팩트있는 모습을 보여줬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