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역대급 테니스 천재가 되었다-110화 (110/241)

110화. 재활

롤랑 가로스 결승이 끝나고 일주일 후.

지혁은 최소한의 운신이 가능할 정도로 몸이 회복되자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굳이 말도 통하지 않는 런던에 머물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원래 계획대로 윔블던에 참가하게 되었다면 계속 유럽에 남아있었을 것이다.

2주 간격으로 시차 적응을 두 번이나 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번에 시즌 아웃을 당하면서 그런 제약은 모두 사라졌다.

대회에 참가하지도 못하는데 유럽에 남아봤자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는가.

어차피 이곳에서 일정이 하나도 없으니 일찍 한국에 돌아가는 게 훨씬 나았다.

파바바바팟!

지혁이 인천 공항의 입국장을 통과하자마자 쏟아지는 플래쉬 세례.

분명 귀국 소식을 알린 적이 없는데 어디서 정보를 입수한 건지 공항에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기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호주 오픈 때보다 더 많네. 이게 몇 명이야.’

아마 그 당시 기자가 대략 200명쯤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인원이 그것보다 최소한 두 배는 되어 보였다.

플랜카드를 들고 있는 팬들까지 합치면 통행하는 게 거의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지혁은 공항까지 마중 나온 사람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짧은 인터뷰를 했다.

그 과정에서 결승전에서 부상을 당한 사실과 윔블던 불참 선언도 자연스레 얘기가 나왔다.

따로 입장 표명을 하려고 했는데 덕분에 수고를 덜었다.

“이지혁 선수의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인터뷰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자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매니지먼트 직원이 끼어들었다.

지혁의 몸 상태를 생각해서 조치를 취한 것이다.

어차피 굵직한 소식을 전부 전해줬으니 기사 거리는 충분히 전해줬다.

이제 자잘한 가십거리만 남았는데 그런 건 굳이 인터뷰를 하지 않아도 알아서 전해질 소식들이었다.

“잠시만요! 아직 질문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시간을 조금 더 내주세요!”

“국민들이 이지혁 선수에 대해 궁금해하고 있습니다!”

“부상이 얼마나 심각한지 정확하게 말씀해주세요! 아시안 게임에 참가하지 못할 정도입니까!?”“복귀 시기는 언제쯤으로 예상하고 계십니까! 설마 US오픈도 건너뛰나요!?”

만류하는 기자들을 뿌리치고 인터뷰장 빠져나가는 지혁과 일행들.

그들은 보안요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신속하게 자리를 떠났다.

괜히 머뭇거리다가 인파에 발목을 잡힐 수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관계없는 공항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기 싫었던 이유도 한 몫했다.

[부상으로 윔블던 불참을 선언한 이지혁. 상태가 좋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테니스 전문가들은 US오픈과 아시안 게임 참가도 불확실하다고 봐.]

[한국이 배출한 역대 최고의 테니스 선수는 과연 그랜드슬램에 무사히 복귀할 수 있을까?]

[이지혁이 본래 실력을 회복하려면 최소 6개월 이상의 재활 기간이 필요.]

[만약 내년 이맘때까지 ATP포인트를 쌓지 못하면 이지혁의 세계 랭킹도 전부 초기화.]

지혁의 인터뷰 기사는 한국 팬들에게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스포츠 선수가 부상으로 인해 은퇴하거나 제 기량을 회복하지 못하는 경우가 워낙 많은 탓에 그가 프로로 복귀하지 못할 거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기 때문이다.

원래 자극적인 정보들은 전혀 근거가 없는 헛소문이라도 빨리 전달되기 마련이었다.

그 덕분에 적지 않은 한국 팬들 사이에서 지혁의 은퇴가 암암리에 퍼졌다.

물론 모든 재활 계획이 완벽하게 준비된 만큼 그런 일이 현실에서 벌어지는 상황은 절대 없을 것이다.

***

몇 개월 만에 한국으로 돌아온 지혁이 인천 공항을 제외하고 가장 먼저 모습을 보인 건 상당히 의외의 장소였다.

대부분의 팬들은 당연히 돈이 되는 광고에 전념하거나 재활을 위한 휴식기를 가질 거라 생각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 예상은 전부 빗나갔다.

달칵.

고급 세단이 목적지에 도착하자 문을 열고 내리는 지혁.

그러자 너무나 익숙한 건물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게 얼마만이지. 너무 오랜만에 와서 기억이 가물가물하네.’

거대한 건물에 검은색으로 적혀있는 글자는 ‘금화 고등학교’였다.

언제나 그랬듯이 외벽에는 현수막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는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건 당연하게도 지혁의 이름이었다.

[금화고등학교 2학년 이지혁, 2010 롤랑 가로스 우승.]

[이지혁 선수의 롤랑 가로스 우승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자랑스러운 금화의 아들 이지혁, 세계를 제패하다.]

고등학교에 그랜드슬램 우승을 축하하는 현수막이 걸려있자 마치 장난을 치는 것처럼 느껴졌다.

솔직히 이번에 지혁이 얻은 성적은 주니어 대회나 참가하고 있을 미성년자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결과였다.

한국이 아니라 전 세계를 범위로 두어도 지난 20년간 비슷한 사례가 단 한 번도 없었던 만큼 테니스를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 이 광경을 본다면 모두 비슷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수십만, 수백만이 넘는 테니스 선수들이 평생을 바친다고 해도 정상의 자리를 밟는 건 고작 다섯에서 여섯 명 남짓이었으니 말이다.

저벅저벅.

지혁은 학교의 외관을 아주 잠깐 살펴보다 이내 교문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이른 아침임에도 등굣길은 학생들이 걸어가는 모습이 제법 보였다.

몇몇 여학생들은 188cm나 되는 큰 키와 운동 덕분에 모델처럼 잘 빠진 지혁이 같은 교복을 입고 있자 힐끗힐끗 훔쳐봤다.

“누구야? 우리 학교에 저런 얘가 있었나?”

“연예인이 전학 온 거 아니야? 옆모습만 봐도 엄청 잘생긴 거 같은데.”

“그런데 어디서 본 얼굴 같아. 혹시 TV에 나온 적이 있나?”

그녀들은 설마 자신들의 눈앞에 있는 남학생이 현재 한국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를 끌고 다니는 인물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솔직히 세계적인 인기를 가진 스포츠 스타를 학교에서 만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하겠는가.

게다가 지혁은 투어를 다니느라 몇 달이 넘도록 등교하지 않아서 학생들 사이에서는 전설처럼 이야기가 전해 질 뿐이었다.

“어어······.”

그렇게 지혁이 교문 근처에 가까워졌을 때.

뭔가 알아챈 여학생 한 명이 갑자기 넋이 나간 얼굴로 이상한 소리를 내었다.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모습을 보면 드디어 정체를 눈치챈 모양이다.

애초에 모자를 쓰거나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것도 아니어서 금방 밝혀질 일이긴 했다.

“이···이지혁이다!”

“응? 이번에 롤랑 가로스에서 우승한 이지혁 선수? 그 사람이 여기에 왜?”

“바보야! 우리 학교의 테니스 특기생이잖아!”

“몇 달 전에 자퇴한 거 아니었어? 1학기 동안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는데······.”

“대회에 참가하느라 바빠서 그렇겠지. 어쨌든 실물을 보는 건 나도 이번이 처음이야.”

우르르르.

마침내 지혁의 정체가 밝혀지자 등굣길 주변은 이렇게 많은 학생들이 어디에 숨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많은 인파가 몰렸다.

현재 한국을 가장 주목을 받는 스타의 등장은 이 정도 영향력을 발휘하기 충분했기 때문이다.

‘이전에도 똑같은 상황이 있었던 것 같은데.’

신기한 건 그때와 다르게 가까이 다가오는 학생들이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냥 걸어가기만 하더라도 자연스레 길이 열려서 교문을 통과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지혁은 인파를 이끌고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

지혁이 교실에 도착한 지 시간이 제법 지났지만 여전히 그의 주변은 투명한 벽이 있는 것처럼 아무도 다가오지 못했다.

그리고 거기에는 친분이 있던 반 친구들도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다른 세계에서 사는 사람을 보는 듯한 눈빛을 보내는 게 다시 친해지는데 시간이 꽤 오래 걸릴 것 같았다.

어쩌면 영원히 관계를 되돌리지 못할 수도 있었고 말이다.

뭐, 애초에 특별한 사이도 아니어서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웅성웅성.

지혁의 주변으로 커다란 공백이 만들어지는 기이한 상황이 계속 이어지고 있을 때, 변화를 만들어낸 건 한 명의 여학생이었다.

긴 생머리에 단아한 분위기의 그녀는 와!하고 탄성이 나올 만큼 예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복도에서 지혁을 구경하고 있던 학생들의 반응을 보면 모두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이름이 아마······이유나였나?’

몇 년 뒤에 한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여배우가 되는 터라 이름이 어렴풋이 기억났다.

‘과거로 돌아올 무렵에도 엄청나게 유명했었지······.’

지혁이 느릿한 걸음으로 다가오는 이유나를 멀뚱히 지켜보고 있자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손을 내밀었다.

분명 금화고 여신이라는 별명답게 도도한 성격으로 유명했는데 지금은 그런 모습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태도였다.

“사···사인 좀 해줄래? 이번에 경기 정말 잘 봤어. 너 정말 멋지더라.”

하얀 종이를 책상에 조심스레 올려두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이유나.

학생들은 그 행동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 자존심이 강한 그녀가 이런 모습을 보일 줄 몰랐기 때문이다.

“와. 이유나는 유명 기획사에 소속된 배우인데 사인을 받네?”

“저렇게 얌전한 모습은 처음 봐. 이지혁 앞이라 그런가?”

“하긴 잘 생각해보면 아무리 연예인이라고 해도 두 사람이 비교가 안 되긴 하지. 이지혁은 이미 세계적인 스타잖아.”

“그런데 두 사람이 같이 있으니까 되게 잘 어울리긴 한다.”

이유나는 자신에 대해 말하는 소리를 들은 건지 얼굴이 더 붉어졌다.

그 가련한 모습에 남학생들의 시선이 더욱 집중되었다.

“잘 봤다니 다행이네. 칭찬해줘서 고마워.”

계속 그녀를 멀뚱히 세워둘 수 없었기에 지혁은 괜히 뜸을 들이지 않고 빠르게 부탁을 들어주었다.

용건이 모두 끝나자 아쉬운 표정으로 자리를 떠나는 이유나.

그녀는 계속 남아서 얘기를 나누고 싶은 얼굴이었지만 다른 학생들의 시선을 무시할 자신이 없는 것 같았다.

‘음······. 내가 고등학교를 다니는 게 가능할까.’

도무지 흩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인파를 보며 속으로 한숨을 쉬는 지혁.

웬만하면 학교를 졸업하고 싶었는데 처음 입학할 때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유명해진 탓에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을 듯했다.

매번 등교할 때마다 지금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면 도저히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솔직히 고등학교 졸업장이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정상급 테니스 선수에게 학벌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프로로 진출하는 게 불확실한 주니어 선수들에게나 대학이 보험 역할을 하지 지혁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아무래도 다시 생각해봐야겠어.’

마침 출석 인정이 되지 않는 일정을 많이 소화해야 할 타이밍이긴 했다.

예정대로 대회를 참가했더라면 문제가 없었겠지만 상황이 변했으니 기존에 새워두었던 계획도 변하는 게 맞았다.

자퇴를 말리던 성민도 분명히 자식에게 어떤 것이 더 중요한 지 알 테니 이전처럼 어렵게 내린 결정을 말리지 않을 것이다.

지혁의 1순위는 언제나 그랬듯이 테니스였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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