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재활
지혁은 코치들과 20분가량 스트로크를 시험하다 훈련을 멈추었다.
아직 부상이 완전히 나은 게 아닌 만큼 자체적으로 활동량을 조절한 것이다.
솔직한 심정을 말하자면 이참에 연습 경기까지 쭉 이어서 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 무리할 단계는 절대 아니라서 내키는 대로 행동할 수 없었다.
오랜 경험으로 봤을 때 모든 사고는 자신을 과신하는 일에서 시작되었으니 말이다.
“후······.”
치솟는 충동을 억누르기 위해 심호흡을 하는 지혁.
잠시 후, 땀이 서서히 식어가자 손목에서 은은한 통증이 올라왔다.
나름 신경을 썼는데도 랠리를 진행하면서 부상 부위에 악영향이 간 모양이다.
‘다른 곳들은 전부 괜찮은 것 같네.’
물론 장시간 경기를 하게 된다면 멀쩡한 부위들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
하지만 아침 조깅조차 힘들었던 최악의 상황에서 여기까지 왔으니 이것만 해도 엄청난 진전이었다.
“지혁아, 어떻게 된 거야? 며칠 사이에 컨디션이 몰라보게 좋아졌는데? 귀국하고 푹 쉬었던 게 도움이 된 건가.”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상태가 훨씬 좋아. 만약 백핸드만 제대로 사용할 수 있었다면 완전히 회복되었다고 해도 믿었을 거야”
코치들은 의문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질문을 퍼부었다.
대체 어떤 방법으로 재활을 했기에 지금처럼 드라마틱한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었는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음······. 대회가 끝나고 시간이 조금 지나니까 몸이 조금씩 괜찮아지더라고요.”
정확한 자초지종을 말하지 못하고 어설프게 둘러대는 지혁.
다행스럽게도 그 변명은 통하는 것 같았다.
하긴 직접 눈앞에서 실력으로 증명했는데 믿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허, 이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건가? 비슷한 경우를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네.”
“피지컬이 다른 또래에 비해 월등히 뛰어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설마 내구력까지 타고났을 줄이야.”
“정말 테니스를 하기 위해 태어난 인간, 그 자체네. 이 정도로 회복 속도가 빠르면 올해 안에 복귀하는 것도 가능하겠어.”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이번에도 만들어지겠구나. 하긴 애초에 정상적인 범주 안에 넣는 게 불가능한 녀석이긴 했지.”
긴가민가한 반응을 보여주던 코치들은 결국 괴물 같은 회복력 덕분에 일어난 해프닝이라고 결론을 지었다.
지난 1년간 지혁과 투어를 다니며 매번 기적 같은 일을 겪어서 현실 감각이 무뎌져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마이애미 오픈과 롤랑 가로스 우승을 하고 나서부터 지혁을 격이 다른 존재로 생각하는 탑랭커들도 상당히 많았다.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성장 속도를 경험하고 경쟁 상대에서 제외해버린 것이다.
‘우리 말고 사람들이 있었잖아?’
그렇게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자 실내 코트의 모습이 조금씩 눈에 들어왔다.
랠리를 하는데 정신이 팔려서 누군가 구경하고 있는 것도 몰랐다.
익숙한 얼굴들이 보이는 게 아마도 아는 사람들인 듯했다.
“······야. 이지혁이 우리를 보고 있어.”
“혹시 허락도 없이 훈련하는 걸 지켜봐서 화난 걸까? 지금이라도 미안하다고 사과를 해야 하나.”
“설마 그럴 리 있겠어. 그 정도로 괴팍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미 소문이 파다하게 났었겠지. 아! 동현이랑 대희가 예전에 인사를 나눈 적이 있다고 했지? 그러면 너희들이 먼저 아는 척해봐. 괜히 안면도 없는 우리가 접근하는 것보다는 낫잖아.”
“······저도 고작 한 번 정도 본 게 전부예요. 친한 사이가 아니라서 누가 말을 걸어도 크게 차이가 없을 걸요.”
지혁이 시선을 주는 걸 알아채자마자 크게 당황한 듯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이는 실업팀 선수들.
만약 일 년 전이었다면 이런 모습을 절대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도 한국에서 제법 알아주는 실력자들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지혁의 위상이 완전히 달라져서 이런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세계 최고의 선수와 국내 한정 여포들을 같은 선상으로 두는 게 상식적으로 가능하겠는가.
아무리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이라도 커다란 벽을 느끼는 게 정상적인 반응이었다.
“저기···. 저번에 같이 친선 경기를 한 거 기억하세요? 동현이랑 같이 봤었잖아요.”
“······몇 개월 만에 보네. 그동안 잘 지냈어?”
쭈뼛쭈뼛하며 말을 걸어오는 대희와 동현.
지혁은 어리숙한 선수들의 모습에 흐릿하게 미소가 지어졌다.
비록 이들이 지금 만만하게 보여도 어디 가서 꿇리는 인물들이 절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기억하고 있죠. 이대희 선수랑 권동현 선수잖아요. 그때 도움을 주셔서 감사해요. 덕분에 인디언 웰스 오픈에서 좋은 스타트를 할 수 있었어요.”
“아! 다행히 기억하고 있었네요!”
“어울리지 않게 겸손은, 네 실력이 받쳐줘서 좋은 성과를 얻은 거지.”
지혁이 예전에 있던 일을 꺼내며 아는 체를 하자 급격하게 자신감을 찾아가는 선수들.
뒤에서 조심스럽게 상황을 보고 있던 나머지 인원들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대화에 끼어들기 위해 재빠른 동작으로 다가왔다.
“이지혁 선수 이렇게 만나게 돼서 영광이에요. 이전에는 대회 중이라 인사를 못했는데 이번에는 볼 수 있게 되었네요.”
“많이 늦었지만 롤랑 가로스 우승을 축하드려요. 덕분에 한국에서 테니스가 많이 알려지게 됐어요.”
생소한 얼굴의 선수들은 지혁보다 한참이나 나이가 많았음에도 존댓말을 하며 깍듯하게 예의를 차렸다.
어줍잖게 선후배를 관계를 따지기에는 격차가 너무 크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위에서 유심히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이 그런 상황을 애초에 용납하지도 않을 테고 말이다.
“부상이 많이 완화된······.”
“혹시 US 오픈은 참가하실······.”
그렇게 실내 코트에서는 한동안 수다가 이어졌다.
지혁은 이들을 그냥 무시할 수도 있었지만 나중에 재활을 하면서 다시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기에 매정하게 행동하지 않았다.
어차피 일방적으로 손해를 보는 관계가 아니라서 얕은 친분을 가지고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
롤랑 가로스가 끝나고 대략 두 달 후.
지혁은 그간 외부 활동을 하면서 포인트를 모으는데 집중하는 행보를 보였다.
그동안 언론에 나서는 일이 극도로 적었던 스포츠 스타가 방송에 출연하자 처음에는 팬들도 상당히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시간이 한 달, 두 달을 넘어가게 되자 조금씩 불만이 터져 나왔다.
테니스 선수가 대회에 집중하지 않고 딴 길로 새는 게 전형적인 유망주의 타락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인터뷰에서 아프다고 했던 사람이 갑자기 달리는 예능에 출연해서 활약까지 했으니 오해가 생길 법도 했다.
‘이제 고지까지 얼마 남지 않았어. 잘하면 이번 이벤트 매치에서 400만 포인트를 모을 수 있을 거야.”
현재 지혁이 있는 장소는 도쿄의 어느 호텔이었다.
굳이 번거로운 과정을 감수하며 일본으로 오게 된 이유는 수억 엔의 섭외비를 받고 자선 경기를 하기로 계약해서였다.
‘니시코리 케이라······. 쉽지 않은 상대가 걸렸어.’
만약 본래 실력을 발휘할 수 있다면 아무런 문제 없이 격파하는 게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기량이 크게 떨어진 지금은 승리를 확신하기 힘들었다.
랭킹 30~40위 대의 탑랭커는 절대 무시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시즌 중에 이런 요청을 받아들일 줄이야.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지만 의외네. 나처럼 포인트가 주목적도 아닐 텐데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건가.’
니시코리는 이번 제안을 당연히 거절하려고 했었다.
실제로 처음 계약서와 왔을 때 당시에도 곧바로 관심이 없다는 의사를 보냈다.
하지만 얼마 후, 대전 상대가 지혁이라는 소식이 스폰서에게서 전해지자 굳건하던 결심도 흔들렸다.
비록 공식 경기는 아니었지만 단 한 번이라도 제대로 붙어보고 싶은 마음이 무의식 중에 깊게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 사람들은 니시코리가 이기는 상황을 더 좋아할 테니 팬 서비스 차원에서 져주는 것도 괜찮은 선택지겠지.’
조코비치나 페더러도 이벤트 매치에서 승리를 양보하는 일이 꽤 있어서 이상한 시선을 받지도 않을 것이다.
게다가 마침 공식 경기도 아니라서 기록도 남지 않는 데다가 패배했을 때 페널티조차 없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타협을 하는 게 가장 좋겠지만······.’
지혁은 왠지 니시코리에게 자선 경기를 양보를 하기 싫었다.
이번 대결이 한일전의 성격을 띠고 있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아시아에 존재하는 유일한 라이벌의 기세를 살려주고 싶지 않았다.
약간의 기회만 주어진다면 언제든지 날아오를 수 있는 선수에게 위닝 마인드를 심어주는 건 너무나 위험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가만히 내버려 두어도 몇 년 안에 세계 랭킹 5위 안에 들어가는 무서운 재능의 선수인데 내가 직접 날개를 달아줄 수는 없지.’
***
도쿄에 도착하고 호텔에서 시간을 때우길 며칠.
지루한 기다림 끝에 드디어 자선 경기를 하는 날이 되었다.
벌컥!
선수 대기실의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지혁.
코트가 있는 장소로 이동하던 그의 복장은 오랜만에 보는 테니스복이었다.
무려 두 달 만에 제대로 된 경기를 하는 거였지만 재활을 워낙 부지런히 해서인지 어색함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와아아아아!
지혁이 마침내 경기장에 들어서자 거대한 환호성이 쏟아졌다.
마치 한국에서 응원을 받는 듯한 열기에 얼떨떨한 기분이다.
‘설마 자국 선수의 적에게 이런 환영을 보낼 줄 몰랐는데. 내가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었나 보네. 오늘은 그저 자선 목적의 이벤트 경기일뿐인데 말이야.’
야유를 듣는 것까지 각오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괜한 걱정이었나 보다.
지금 분위기를 보면 승패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 것 같았다.
“골든 보이! 세계 최강의 실력이 어떤 건지 우리에게 보여줘!”
“꺄악! 왕자님, 멋있어요!”
“앞으로 일본에도 자주 방문해주세요! 일본에는 왕자님의 방문을 고대하던 팬들이 정말 많다고요!”
“경기가 시작하면 니시코리를 너무 괴롭히지 마!”
팬들의 장난스러운 분위기에 지혁의 표정도 자연스레 풀어졌다.
저벅저벅.
그렇게 스트레칭을 하면서 굳어있는 몸을 풀고 있자 아까 나왔던 입구에서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고개를 휙 돌려 보니 역시 예상했던 대로 니시코리가 성큼성큼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자신만만한 표정만 봐도 오늘 경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짐작이 갔다.
아무리 세계를 충격에 빠트린 세기의 테니스 천재라고 해도 부상으로 인해 실전 감각이 떨어진 선수는 자신의 상대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꽈악-
‘몇 개월 만에 봤다고 그새 오만해졌네. 오늘 경기로 내가 누군지 기억나게 해줘야겠어.’
지혁은 자신을 가볍게 보는 듯한 니시코리의 태도에 잊었던 악몽을 되살려 주기로 마음 먹었다.
이번에 교훈을 얻게 된다면 정상급 선수에게 부상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