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재활
“리! 두 달 만이지? 이제 몸은 좀 어때?”
경기장에 도착하자마자 지혁에게 반가운 기색으로 먼저 인사를 건네는 니시코리.
롤랑 가로스 이후 처음으로 얼굴을 보는 거라 어색할 수도 있었지만 그의 높은 친화력 덕분인지 경기장의 분위기는 빠르게 좋아졌다.
솔직히 오늘 경기가 자선의 목적을 가지고 있어서 쓸데없는 신경전이 일어나지 않은 것도 있었다.
팬 서비스 측면으로 하는 이벤트라 선수들이 받는 부담감이 비교적 적었기 때문이다.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괜찮아졌어요. 적어도 여기까지 온 팬분들을 실망시키는 일은 없을 거예요.”
“오. 기쁜 소식이네. 하긴 네가 제안을 받아들였다는 자체가 부상이 크게 완화되었다는 뜻이겠지. 조만간 메이저 대회에서 볼 일만 남았겠구나. 골든 보이의 복귀라니, 이 소식을 듣고 두려워할 탑랭커들이 많겠어.”
“그보다 윔블던에서 활약이 대단하던데요? 설마 하드 코드가 아닌 잔디에서 그 정도로 잘할 줄은 몰랐어요.”
“음······. 일단 칭찬을 해줘서 고마워. 하지만 8강에서 3-0으로 처참하게 패배했는 걸. 너한테 좋은 평가를 듣기에는 아쉬운 점이 많은 대회였어.”
“아뇨. 8강의 상대가 그 라파엘 나달이었잖아요. 요즘 그는 무적이나 다름없어서 니시코리가 아니라 어떤 선수가 그 자리에 있었다고 해도 이기는 건 불가능했을 거예요.”
지혁의 말대로 나달은 윔블던을 별다른 위기 없이 가뿐하게 우승을 했다.
잔디 코트에 특화된 페더러를 결승전에서 만났음에도 물오른 기량만으로 완벽하게 압도해버린 것이다.
클레이의 라파엘 나달, 잔디의 로저 페더러라는 말이 있다는 것을 생각했을 때, 테니스 팬들의 예상을 크게 벗어난 대사건이었다.
페더러는 지난 7년간 윔블던에서 우승 6번, 준우승 1번을 했으니 말이다.
“글쎄. 너는 그런 무시무시한 괴물을 이겼잖아. 그것도 클레이 코트에서 말이야.”
“뭐, 그날따라 운이 받쳐준 덕분이죠. 아마 똑같은 상황이 다시 주어지더라도 그때처럼 좋은 결과를 얻는 건 힘들 거예요.”
“그게 단순히 운만으로 될 리가······.”
서로 티격태격하며 대화를 나누는 지혁과 니시코리.
관중들은 사이가 좋아 보이는 두 선수의 모습을 흐뭇한 표정으로 구경했다.
“와. 케이랑 골든 보이는 엄청 친하구나. 나는 기사에서 하는 말들이 전부 헛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천재들끼리 통하는 게 있나 봐. 두 사람은 공통점이 엄청 많잖아.”
“앞으로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면 좋겠네. 괜히 이전처럼 이상한 사람들이랑 친해지면 다시 슬럼프가 올 지도 모르잖아. 케이는 갑자기 스타가 되어서 유혹에 너무 약해.”
“응. 나도 동감이야. 성실하기로 유명한 골든 보이라면 크게 도움이 되겠지. 그러니까 일본에 나쁜 인식을 심어주는 일은 절대 하지 말자.”
일본 국적의 팬들은 괜히 이상한 행동으로 선수들의 사이가 틀어질까 염려하며 입을 조심했다.
니시코리가 테니스계에서 정점으로 올라가려면 네임드급 선수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랜드슬램 우승까지 한 지혁이 조력자가 되어준다면 그것보다 좋은 상황은 없을 것이다.
***
지혁과 니시코리가 서로의 근황을 물으며 대화를 이어가고 있을 때.
드디어 자선 경기를 시작할 시간이 되었는지 진행 요원이 신호를 보내왔다.
마음 같아서 느긋하게 진행하고 싶었지만 이번 경기는 일본 스포츠 방송에서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만큼 임의로 지연시키는 게 불가능했다.
그렇게 촬영 장비들이 코트 쪽으로 하나, 둘 집중되자 오늘 경기를 서포트하게 될 볼 키즈들이 자기 자리를 찾아갔다.
그들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게 아무래도 말로만 전해 듣던 정상급 선수들의 실력이 어떨지 잔뜩 기대하고 있는 것 같았다.
ㅡ 이게 얼마 만에 보는 이지혁 경기냐. 그동안 대체할 만한 국내 선수가 없어서 너무 힘들었다 ㅠㅠ
ㅡ ㅇㅈ 나는 국내에 윔블던 출전 자격이 있는 탑랭커가 한 명도 없다는 걸 6월이 돼서야 알았음. 한국이 진짜 테니스 불모지이긴 하더라. 대체 여기서 세계 최강의 재능이 어떻게 나온 거냐고 ㅋㅋㅋㅋ
ㅡ 당연히 돌연변이 케이스지 ㅋㅋ 애초에 지금 인프라로 빅3급 선수를 배출하는 게 가능할 리 있겠냐. 이지혁 은퇴하고 나면 다시 침체기에 들어갈 거 뻔하다. 현역일 때 많이 즐겨둬야지. 경기 놓치고 나중에 후회하면 아무 소용없음.
ㅡ 아, 이지혁 경기 놓치면 인생 절반 이상 손해 본 거나 다름없지 ㅋㅋㅋㅋ
ㅡ 그런데 얘는 부상 중이라더니 이제 다 나은 모양인데? 랭킹 30위 대 선수랑 자선 경기 잡는 자신감이면 공식 대회 참가해도 괜찮은 거 아닌가,
ㅡ 대충 시나리오 나오네. 자선 경기로 얼마나 재활이 진행되었는지 시험해보고 아시안 게임에 턱! 하고 참가하는 거지!
ㅡ ㄴㄴ 요즘 니시코리 실력 미쳤던데 왠지 오랜만에 복귀하자마자 개털릴 것 같다. 첫 번째 한일전에서 지고 나서 일본 얘들이 조롱할 거 생각하니까 벌써 잠이 안 오네 ㅅㅂ
ㅡ 윗 댓이 말한 것처럼 이지혁 실전 감각 다 뒤져있어서 이길 거라고 100% 장담하기 힘듬···. 부디 대참사 일어나지 않게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
니시코리와 지혁의 이벤트 경기는 한국 방송국에 중계권이 팔리지 않았음에도 꽤 많은 숫자의 국내 팬들이 실시간으로 시청을 하고 있었다.
굳이 일본 현지에 살지 않아도 스트리밍으로 도방을 해주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 탓인지 포털 사이트의 검색 순위에는 지혁과 관련된 키워드가 빠른 속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비록 공식적인 대회는 아니었지만 그토록 기다렸던 스타의 복귀전에 이목이 크게 집중이 되었던 것이다.
지혁의 상태는 대부분의 테니스 팬들의 관심사인 만큼 해외 언론 쪽에서도 관련 기사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이것만 보더라도 롤랑 가로스 이후, 그의 영향력이 얼마나 상승했는지 알 수 있었다.
고작 자선 경기를 하는 것만으로 이만한 이슈를 일으키는 건 정말 어지간한 선수가 아니라면 불가능했으니 말이다.
이번 이벤트 매치의 후원을 맡은 스폰서 기업은 들인 비용에 비해 월등한 홍보 효과가 나오자 살판이 났다.
지금 추세라면 적어도 10배 이상의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플레이어 레디. 서브 니시코리.]
형식적으로 하는 몸 풀기가 끝나고 마침내 니시코리의 서비스게임으로 시작된 경기.
방금 전까지만 해도 소란스럽던 관중석은 명성이 자자한 골든 보이의 경기를 직접 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체어 엠파이어가 따로 주의를 주지 않았음에도 정숙한 분위기를 유지했다.
그렇게 수천 명의 시선이 한 곳으로 집중되자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쾅!!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던 경기장의 정적을 깨버리는 커다란 임팩트 소리.
니시코리가 180cm도 되지 않는 단신인 탓인지 서브는 190km가 간당간당한 속도로 코트 위에 떨어졌다.
30위 대의 탑랭커 치고 꽤 느린 편에 속하는 서브였지만 그래도 코스가 꽤 훌륭해서 완전히 무시할 위력은 아니었다.
물론 지혁에게 위기감을 줄 수 있는 수준은 되지 못했지만 말이다.
230km가 넘는 페더러의 서브도 받아낸 그가 이 정도 공격에 대응하지 못할 리 없었다.
탕!! 탕!! 탕!! 탕!!
경기는 대부분의 테니스 팬들이 예상했듯이 스트로크 대결로 접어들었다.
올라운더 스타일의 두 선수가 본격적으로 부딪치게 되자 흥미진진한 장면들이 꽤 많이 나오기 시작했다.
지혁과 니시코리는 워낙 화려한 퍼포먼스와 공격적인 플래이를 선호하는 터라 감탄이 나올 만한 아트 플레이의 향연이 계속해서 이어졌던 것이다.
‘몇 달 사이에 실력이 몰라볼 정도로 늘었구나······.’
마이애미 오픈에서 연습 경기로 붙었던 때가 아직 반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완전히 다른 선수가 되어서 돌아왔다.
‘뼈를 깎는 노력을 했나 보네. 역시 윔블던 8강까지 올라간 이유가 있었어.’
니시코리의 최근 성적이 유별나게 좋았던 게 그저 대진운 덕분이라는 평가가 해외 쪽에서 제법 많이 들렸었다.
하지만 직접 경기를 해보니 그런 말들이 얼마나 개소리였는지 알 수 있었다.
“하앗!”
탕!!
반박자 빠르게 날아오는 니시코리의 포핸드 잭 나이프.
경기 템포를 흔들기 위해 사용한 고난이도의 샷은 그 의도가 완벽하게 성공했다.
팽팽하게 유지되고 있던 균형을 무너트렸으니 말이다.
[피프틴 러브.]
치열한 접전 끝에 첫 번째 포인트를 빼앗기게 된 지혁.
비록 기세를 빼앗겨서 상황이 좋지 않았지만 그의 표정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입가에 커다란 미소가 걸려있는 것이 기분이 굉장히 좋아 보였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경기를 하니까 정말 좋구나. 이 재미있는 걸 지금까지 어떻게 참아왔는지 모르겠어.’
지혁은 온몸에서 흐르는 전율이 사라지지 않자 심호흡을 몇 번이나 거듭했다.
한계치를 넘어간 흥분으로 인해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음 같아서 이 기분을 오랫동안 느끼고 싶었지만 라켓 컨트롤에 지장이 갈 정도라 어쩔 수 없었다.
쾅!!
두 번째 포인트에서도 경기는 거의 비슷한 양상으로 진행되었다.
“이게 탑레벨 선수의 실력인가······. 일본에서 개최되는 대회들과 차원이 다르잖아. 이렇게 차이가 극심할 수가 있나?”
“ATP500급인 도쿄 오픈에서도 이런 경기는 보기 힘들었는데. 골든 보이와 니시코리가 정말 대단한 선수이긴 하구나.”
극도로 수준 높은 스트로크 대결에 좀처럼 시선을 떼지 못하는 관중들.
넋을 잃은 얼굴로 선수들의 플레이에 집중하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충격이 상당한 모양이었다.
하긴 그들이 이 정도 수준의 경기를 어디 가서 경험해봤겠는가.
그랜드슬램을 보기 위해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해외여행을 다녀오는 골수팬이 아니라면 아무리 높아봤자 100위에서 200위 사이의 선수들의 경기만 주구장창 봐왔을 것이다.
쿵!!
무려 13구 만에 들어간 두 번째 위닝샷.
지혁의 전매특허인 리버스 포핸드가 살벌한 각도로 튀어 오르자 관중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환호성을 질렀다.
와아아아아아!
“설마 이런 경기를 보게 될 줄이야. 역시 천재라고 불리는 이유가 있었어.”
“처음에는 티켓 값이 너무 비싸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저렴한 거였어. 만약 다음 이벤트 매치도 일본에서 성사된다면 그때는 경쟁률이 장난이 아니겠는데?”
관중들은 기대를 한참이나 넘어선 경기 내용에 크게 만족한 표정이었다.
두 선수가 어째서 일본의 다른 프로 선수들과 격이 다르다는 평가를 받는지 실시간으로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방송으로 지켜보고 있던 시청자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비록 현장감을 느끼는 건 힘들었지만 해설자들의 상세한 설명 덕분에 선수들이 얼마나 대단한지 더욱 자세하게 알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