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재활
쿵!!
사이드라인을 아슬아슬하게 벗어나는 지혁의 백핸드 스트로크.
네트를 넘어갈 때부터 어딘가 위태위태하다 싶었는데 역시나 결과가 좋지 않았다.
[아웃! 게임 니시코리 4-2.]
‘아직 역부족인가······. 포인트를 따내는 게 생각했던 것보다 쉽지 않네.’
지혁은 서비스게임을 브레이크 당하자마자 고개를 저으며 불편한 심기를 표출했다.
노골적으로 부상 부위를 노리는 니시코리의 플레이가 꽤나 거슬렸기 때문이다.
1, 2게임만 하더라도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던 경기도 어느새 한쪽으로 확연하게 기울었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를 팬들도 느낀 것인지 관중석에서 조금씩 볼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케이가 골든 보이의 백핸드 방향으로만 스트로크를 보내는데 너무한 거 아니야? 굳이 자선 경기에서 냉혹하게 행동할 필요가 있을까? 저건 비겁한 행동이잖아.”
“그런데 두 사람은 서로 친한 사이가 아니었나? 악의가 느껴지는 플레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경기 전에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던 것을 생각하면 너무 의외의 모습이네.”
“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니시코리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 주어진 상황에서 항상 최선을 다하는 게 프로의 자세지. 오히려 주제넘게 봐주는 행동이 상대 선수를 더 기만하는 행동이야.”
“만약 두 선수들이 모두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그 말이 맞겠지. 하지만 지금은 동등한 조건이 아니잖아. 골든 보이는 아직 부상이 낫지 않은 환자라고!”
“공식 대회에 참가하는 선수들이 매번 최상의 컨디션으로 경기에 임하는 것도 아닌데 대체 뭐가 문제야? 그렇게 까다롭게 기준을 잡으면 답도 안 나와. 애초에 최상의 컨디션을 만드는 것조차 선수의 실력에 포함되는 거니까.”
“아니, 그거랑은 다르······.”
일행으로 보이는 관중들은 도저히 의견이 좁혀지지 않는지 서로 격하게 언쟁을 나누었다.
솔직히 관점의 차이에 따라 의견이 얼마든지 나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주변에서 자신을 나무라는 대화가 이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니시코리는 경기에 집중하느라 듣지 못한 것인지 계속해서 백핸드를 집요하게 노렸다.
진지한 표정을 보면 아무래도 승부 이외에 다른 곳에 관심을 줄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게임 니시코리 5-2.]
결국 일곱 번째 게임도 일방적으로 끝나버리자 희비가 갈린 분위기를 한 채 벤치로 돌아가는 선수들.
지혁은 상황이 좋지 않게 흘러간다는 생각에 깊은 고민에 빠졌다.
안 그래도 니시코리가 이전보다 실력이 몰라보게 좋아졌는데 방심까지 하지 않아서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다운 더 라인이 가장 최적의 코스였는데 그게 에러를 저지를 확률도 훨씬 낮았을 테고.’
그런데 굳이 억지로 방향을 틀어서 백핸드를 공략하다니.
노골적인 의도가 너무 확연하게 느껴지는 플레이였다.
아마 100% 확률로 이길 수 있는 방법을 두고 다른 짓을 하지 않겠다는 뜻이겠지.
경기가 지혁의 명백한 열세로 흘러가자 실시간 스트리밍을 통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한국 팬들은 부상이 기대했던 것과 다르게 그리 많이 회복되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그게 아니라면 지금 상황을 도저히 설명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ㅡ 니시코리한테 스트로크를 밀릴 정도면 상태가 많이 안 좋나 본데? 솔직히 냉정하게 생각했을 때 당연히 정반대의 그림이 나와야 하잖아.
ㅡ ㅇㅈ 두 사람이 나달과 붙었던 경기들만 봐도 기량 차이가 현격하지. 이지혁이 롤랑에서 보여준 실력을 그대로 발휘할 수 있으면 무조건 개털어야 정상임. 상식적으로 니시코리 쟤가 빅3급 실력을 가지고 있진 않을 테니까. 만약 그랬다면 진작에 윔블던에서 더 좋은 성적을 얻었겠지.
ㅡ 그 말이 맞지. 일본에서 아무리 아시아 최고의 재능이라고 띄워봤자 현실은 그랜드슬램 8강 따리잖아 ㅋㅋㅋㅋㅋ 어딜 30위 따위가 인간계 최강에 덤비냐고 ㅋㅋㅋ
ㅡ 애초에 같이 묶일 급이 아니긴 하지 ㅋㅋㅋ 미국이나 유럽권은 경쟁자로 여기지도 않는 분위기더라. 탑10안에 들어가는 델 포트로랑 마린 칠리치 정도 아니면 이제 대항마 후보로 취급도 안 해줌.
ㅡ 와. 이지혁은 진짜 자기보다 한참이나 아랫 단계의 선수한테 지고 있어서 속 좀 쓰리겠는데? 어쩐지 표정이 썩었더라 ;;
ㅡ 자존심 엄청 강해서 그럴 걸. 게다가 얼마 전 연습 경기에서 한 번 밟아놔서 역체감이 더 심할 거임.
ㅡ 그거 커뮤니티에서 나온 뇌피셜 아니었음? 분명 공식적으로 붙은 기록이 없는 걸로 아는데···.
ㅡ ㄴㄴ 몇 달 전에 해외 기사로 짤막하게 나온 적 있음. 사전 약속 없이 즉석에서 이루어진 경기라 직접 경기를 본 테니스 팬들은 얼마 없지만.
ㅡ 그러면 오늘 지더라도 결과적으로 통산 전적은 1:1이겠네. 지혁아 이번 경기는 재수 없다고 생각하고 다음에 복수 제대로 해주자 ㅠ
ㅡ 아이 씨 아무리 불리하다고 해도 재수 없는 소리 좀 하지 마라. 아직 전부 끝난 것도 아니잖아 ㅡㅡ 2선승이라서 다음 세트에서 이기면 어떻게 돌아갈지 모른다고.
한국 팬들 뿐만 아니라 경기를 보고 있던 대부분의 시청자들이 지혁의 전망을 나쁘게 보고 있을 때.
니시코리는 마치 그 생각들을 굳혀버리려고 작정한 듯이 1세트를 포핸드 스트로크로 결정지었다.
이전 게임이랑 너무나 비슷한 모습이라 데자뷰처럼 느껴지는 광경이었다.
[세트 니시코리.]
그렇게 1세트가 종료되자 자선 경기를 중계하던 일본 방송의 해설자들은 6-2라는 결과에 놀란 건지 흥분한 표정으로 다급하게 멘트를 쏟아냈다.
아시아 최고, 아니 세계 최고의 재능을 가진 거물을 니시코리가 제압하고 있다는 것은 일본인들에게 정말 어마어마한 대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지혁이 본래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태라고 하지만 그래도 승리는 승리였다.
아마 오늘 경기에서 니시코리가 최종적으로 승리하게 된다면 ‘골든 보이를 큰 격차로 이긴 유망주’라는 호칭이 앞으로 자연스럽게 붙을 테니 그의 존재감도 더욱 높아질 것이다.
어차피 세세한 사정들은 시간이 지나면 전부 사라지고 결과만 남을 테니 말이다.
정확한 자초지종을 알고 있는 일부 팬들이 진실을 말하며 불만을 토로해도 자극적인 정보가 아니라서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할 확률이 높았다.
[니시코리가 격이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려 그랜드슬램 최연소 우승을 한 괴물을 압도하고 있어요!]
[저번 윔블던도 그렇고 정말 놀라운 성장세네요. 최근 실력이 크게 상승한 것처럼 보이는데 특별한 계기라도 있었을까요?]
[케이의 주변인들에게 전해 듣기로 갑자기 훈련에 임하는 태도가 180도 달라졌다고 들었습니다. 시기는 대략 롤랑 전후로요.]
해설자들이 경기력 향상의 원인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토론을 하고 있을 때, 마침 중계 화면에서 선수 관계자석의 모습이 송출되었다.
그렇게 여리여리하고 청초한 미인이 카메라에 잡히자 천천히 움직이던 화면은 우뚝하고 멈췄다.
[와······. 연예인이라고 말해도 믿을 만큼 아름다운 미모입니다. 대체 저 여성분은 누구죠? 외부인이 앉을 수 없는 좌석에 앉아 있는 걸 보니 분명히 선수들과 연관이 있는 분 같은데요.]
[잠깐만요. 저긴 니시코리의 자리입니다. 아! 열애 중이라고 들었는데 아무래도 그의 연인인 모양입니다.]
추측한 대로 청초한 미인의 정체는 유즈키가 맞았다.
그녀는 이벤트 매치가 결정되고 지금까지 계속 걱정했던 것과 다르게 자신의 남자 친구가 예상을 뛰어넘는 경기력을 보여주자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드디어 과거에 당했던 굴욕을 갚아줄 수 있다는 생각에 기쁨이 몰려왔기 때문이다.
[정체불명의 실력이 어디서 나왔나 했더니 사랑의 힘이었나 보네요.]
[보통 선수들이 본업과 관련 없는 일에 한눈을 팔게 되면 랭킹이 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오히려 이전보다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걸 보니 내조를 정말 잘해줬나 봅니다.]
[결혼을 하고 안정감을 찾는 선수들도 꽤 많잖습니까. 아마 이번에도 비슷한 경우겠죠.]
[네. 페더러라는 정말 좋은 예시가 있죠. 부디 앞으로도 지금 같은 관계를 이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지금처럼 선수에게 긍정적인 효과를 줄 수 있다면 저희는 얼마든지 환영이에요.]
경직된 분위기를 전환할 겸 시시콜콜한 얘기를 하며 경기를 진행하는 해설들.
처음 1세트가 시작될 때와 다르게 그들은 어느새 여유를 되찾은 모습이었다.
괜히 지혁의 무시무시한 명성에 짓눌려 압박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아서였다.
***
니시코리의 기세는 1세트를 가져가고 더 이상 올라갈 수 없을 만큼 최고조로 올라갔다.
그 탓인지 지혁도 제대로 된 반항을 하지 못하고 스코어를 헌납할 수밖에 없었다.
나름 최선을 다했지만 부상의 한계를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게임 니시코리 3-0.]
[게임 리 3-1.]
[게임 니시코리 4-1.]
[게임 니시코리 5-1.]
마침내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스코어까지 몰린 지혁.
이제 1게임만 더 빼앗기면 경기의 최종 승리는 니시코리에게 돌아간다.
그 충격적인 상황에 경기장은 절로 조용해졌다.
테니스계에서 전설을 써가고 있는 골든 보이가 이렇게 허무하게 패배할 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이때까지 절대 쉽게 지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메이저 대회 상위 라운드에서 탑10급 선수들이랑 대진이 붙어 패배하더라도 대부분 풀세트까지 가는 일이 다반사였으니 말이다.
‘조금만, 조금만 더. 이제 거의 다 왔어.’
지혁은 최악의 상황을 맞닥뜨렸음에도 평온한 표정이었다.
패배 직전까지 와서도 평정심이 전혀 흔들리지 않는 모습에 서포트를 맡고 있던 볼키즈들은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들의 보기에는 이미 경기가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축하합니다. 400만 포인트를 모으셨습니다. 부상을 전부 회복합니다.]
그렇게 도살장에 들어가길 기다리는 동물을 보는 듯한 시선을 받고 있을 때.
그토록 기다리고 있던 음성이 천상의 아리아처럼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경기 막바지가 되어서야 회복에 필요한 포인트가 완벽하게 모인 것이다.
‘아슬아슬하다고 생각했는데 계산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졌어.’
“음······.”
강렬한 열기가 전신을 휩쓰는 감각에 참지 못하고 신음을 흘리는 지혁.
주변 사람들이 뭔가 이상하다는 듯 시선을 보내고 있지만 휴식 시간이 지속되는 동안 무슨 짓을 하든 개입할 이유가 없었다.
신비한 감각이 느껴지는 상황이 몇십 초 정도 지났을까.
열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꽈악-
‘······완벽하게 회복한 거 같은데?’
왼손을 강하게 쥐어봐도 조금의 통증도 느껴지지 않는다.
지혁은 드디어 본격적으로 반격을 할 기회가 주어졌다는 생각에 숨길 수 없는 미소가 지어졌다.
유심히 옆자리를 지켜보고 있던 니시코리는 그 모습에 불안한 예감이 들었는지 자신도 모르게 몸을 흠칫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