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회복
[플레이어 레디. 서브 리.]
어느새 휴식 시간이 종료되고 다시 재개되는 경기.
코트 위로 걸어 들어가는 지혁의 발걸음은 이전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가벼웠다.
그토록 움직임을 제약하던 무거운 족쇄가 풀렸기 때문이다.
‘와. 당장이라도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야. 내 몸이 이렇게 가벼웠었나?’
굳이 시험해보지 않아도 풋워크가 월등히 빨라졌음을 알 수 있었다.
백핸드만 원상태로 돌아와도 감지덕지였지만 이 정도면 코트 커버력도 꽤나 향상되었을 것 같았다.
통. 통. 통.
서브를 하기 위해 비스듬히 선 자세로 테니스공을 바닥에 튕기는 지혁.
예민한 관중들은 왠지 모르게 지혁의 자세가 더욱 안정적이게 변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손목 부상이 회복되고 나서 미세하게 뒤틀려 있던 밸런스가 원래 대로 돌아왔어. 이 정도면 에러가 확실히 줄어들겠네.’
이때까지 스윙을 할 때 무의식적으로 부상 부위 쪽으로 신경이 분산되서 라켓 컨트롤이 하락하는 모습을 많이 보여줬다.
하지만 지금 상태를 보니 이제 그런 불상사는 없을 것 같았다.
“하앗!”
쾅!!
신체의 가동범위가 늘어난 덕분일까 플랫 서브는 이전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서비스코트 위를 때렸다.
그렇게 227km라는 숫자가 전광판에 찍히자 경기장은 순식간에 침묵에 휩싸여버렸다.
별다른 전조도 없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타구의 위력에 깜짝 놀란 것이다.
자선 경기가 거의 종료되기 직전까지 이 정도 수준의 서브를 보여주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와. 내가 최대치로 잡았던 것보다 훨씬 빠른데? 속도가 제법 나올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예상 이상이야.’
테니스가 전신의 협응력을 이용하는 스포츠라는 걸 새삼스레 깨닫게 된다.
주력으로 사용하는 손이 아닌데도 이런 막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니.
과연 스트로크는 얼마나 변화했을지 벌써부터 기대감이 무럭무럭 생겼다.
‘두 달 넘게 봉인하고 있던 양손 백핸드도 써봐야지. 부디 실력이 녹슬지 않았으면 좋을 텐데.’
그동안 부상이 덧날까 봐 재활 운동을 제외하면 연습조차 하지 않아서 조금 걱정이 되었다.
솔직히 두 달이면 실전 감각이 대부분 사라지고도 남는 시간이었으니 말이다.
탕!!
[포티 러브.]
지혁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니시코리에게 너무나 쉽게 위닝샷을 얻어냈다.
아무래도 이제까지 받아왔던 수준의 타구를 예상하고 있어서 대처가 미흡했던 모양이다.
[게임 리 2-5.]
[게임 리 3-5.]
그 후 엄청난 속도로 스코어를 추격하는 지혁.
속전속결로 조여 오는 압박에 니시코리는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 광경에 경기를 중계하고 있던 일본 방송의 해설자들은 뭔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 발자국만 남겨둔 상태에서 이게 무슨 일이죠? 니시코리 선수는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집중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골든 보이는 여유를 부리면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에요. 비록 아직은 허용 범위 내에 있어서 괜찮다고 하지만 적당히 플레이하다가 불의의 일격을 맞을 수도 있어요.]
[글쎄요. 말씀하시는 것처럼 니시코리가 그 정도로 어수룩한 선수가 아닙니다. 아무리 나이는 어리다고 해도 무려 세계 랭킹 30위에 올라선 일본 최고의 선수가 만만할 리 없죠. 상황이 갑자기 급변한 원인은 그의 탓이 아닐 확률이 높아요.]
[네? 혹시 제가 모르는 다른 이유가 있다는 건가요? 1게임만 남겨둔 상태에서 눈에 띄는 변수라고 할 만한 것이 생길 리 없는데요. 혹시 있더라도 지금처럼 전반적인 경기 분위기에 커다란 영향을 주긴 힘들 테고 말이죠.]
[두 선수들이 스트로크 주고받는 걸 유심히 관찰해 보세요. 뭔가 달라진 점이 없습니까?]
프로 출신의 해설자의 말에 다른 한 명의 해설자와 의아한 생각을 하고 있던 시청자들의 시선이 집중된다.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너무나 궁금했기 때문이다.
혹시나 다 이긴 상황에서 역전을 당할 수도 있다는 조마조마한 마음도 들었고 말이다.
만약 상대가 다른 선수였더라면 고작 1게임을 남겨두고 이런 걱정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이지혁‘은 절대 가벼운 이름이 아니었다.
전설적인 선수들인 로저 페더러와 라파엘 나달을 차례대로 꺾고 그랜드슬램 최연소 우승이라는 불가능한 기적을 만들어냈는데 솔직히 무엇인들 못하겠는가.
탕!!
자그마한 빈틈을 정확하게 찌르는 지혁의 백핸드 스트로크.
사이드라인 위를 정교하게 공략하는 타구에 관중석에서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극에 달한 라켓 컨트롤에 감탄을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치열한 스트로크 대결을 하던 도중 나온 장면이라 더욱 의미가 있었다.
[······제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방금 골든 보이가 왼 손을 사용해 백핸드 위너를 넣은 것 같은데요. 분명 부상이 전부 낫지 않아서 한 손 백핸드를 강제적으로 사용하고 있던 걸로 알고 있는데 이상하네요.]
[맞습니다. 분명 2세트 후반이 될 때까지 한 번도 보여주지 않던 자세였죠. 그런데 경기가 거의 다 끝난 상황에서 숨겨둔 무기를 꺼냈어요. 뭔가 심경의 변화가 있었나 봅니다.]
[비록 정확하진 않겠지만 조금이나마 그의 생각이 짐작되긴 하네요. 니시코리에 대한 경쟁심 때문이 아닐까요? 워낙 라이벌로 조명되는 언급되는 일이 많은 만큼 승패를 의식하고 있을 테니까 말이에요.]
[단순히 변덕일 수도 있고요. 천재의 마음을 범인이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어쨌든 결과적으로 오늘 경기에서 보여준 열세에 처한 모습은 전부 연기였던 모양입니다. 저 정도 수준의 백핸드라면 부상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저건 억지로 참으면서 발휘할 수 있는 기량이 절대 아니에요.]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해설자.
그 발언의 여파는 엄청났다.
기세등등하던 일본의 테니스 커뮤니티 상황을 완전히 뒤집어버렸으니 말이다.
ㅡ 거짓말하지 마. 케이가 경기에서 우세했던 게 단순히 연기였다고? 그런 만화 같은 일이 현실에서 일어날 리가 없잖아.
ㅡ 맞아. 아무리 테니스의 왕자님이라고 해도 너무 과대평가가 심한 거 아니야? 저 말이 사실이라면 의도적으로 핸디캡을 지고 경기에 임했다는 건데 말도 안 되지.
ㅡ ······부상을 100% 회복했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두 사람의 상태가 최상이라고 가정하면 나는 가능성이 완전히 없다고 장담하긴 어려울 것 같은데.
ㅡ 이제 어떤 게 진실인지 모르겠어. 경기를 보다 보면 뭐가 맞는지 정답이 나오겠지. 우연이라면 니시코리가 이번 경기를 10분 내로 끝내 버리고 만에 하나 그 반대가 맞다고 한다면······역전을 하겠지.
혼란에 빠진 일본 팬들은 일단 섣부른 판단을 보류하고 상황을 지켜보기로 마음먹었다.
비전문가인 자신들끼리 싸워가면서 토론해봤자 정확한 분석이 나올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오래 기다릴 필요도 없이 한, 두 게임만 봐도 대략적인 상황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
지혁이 부상을 회복하고 시간이 20분을 조금 넘었을 때.
니시코리의 전매특허인 잭 나이프 샷이 마치 그를 농락하듯이 코트를 꿰뚫었다.
한 템포 빠르게 옆구리를 관통하는 완벽한 타이밍에 그는 아주 잠깐 움찔하는 모습만 보여줬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려고 해도 이제 와서 쫓아가는 건 물리적으로 너무 늦었다.
[세트 리.]
그렇게 에러 확률이 높은 고난이도 기술이 몇 번이나 반복해서 성공하자 관중들의 얼굴에도 점점 확신이 깃들었다.
무려 6게임을 스트레이트로 이겼으니 여기서 긴가민가할 이유가 없었다.
만약 0-0의 상황이었으면 베이글 세트가 무조건 나왔을 테니 말이다.
후우···.
휴식 시간이 주어지자 여기저기서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한꺼번에 들려왔다.
예상을 한참이나 뛰어넘는 상황이 실시간으로 일어나고 있어서 다른 곳으로 한눈팔 겨를이 없었던 것 같았다.
웅성웅성.
경기가 휴식으로 인해 120초 동안 중단되자 급격히 소란스러워지는 관중석.
팬들은 분명 아까 전까지만 해도 승리를 거의 손에 넣었던 니시코리가 추락하는 상황에 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은 모양이다.
그렇게 경외, 두려움, 애정, 분노 등 복잡한 감정이 담긴 시선들이 섞여서 한 곳으로 집중되었다.
어느새 오늘 이벤트 매치의 주인공이 지혁에게 돌아간 것이다.
‘당황한 얼굴이네. 하긴 이렇게 될 줄 누가 예상할 수 있었겠어.’
지혁은 그리 멀지 않은 옆 자리에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니시코리를 발견했다.
얼마 전까지 하늘을 찌르던 기세는 이미 연기처럼 흩어진 지 오래였다.
3, 4게임을 스트레이트로 빼앗길 때부터 줄곧 저런 반응이었다.
‘경기의 당사자인 만큼 이미 패배를 직감한 거겠지. 나라도 저 상황에 처한다면 답이 안 나올 거야.’
찌릿찌릿.
볼키즈들의 따가운 눈빛이 쏟아진다.
그들도 전부 일본 국적을 가지고 있는 만큼 자신들의 우상이 무너지는 모습이 상당히 못마땅한 것 같았다.
‘분명 열세에 처했을 때만 하더라도 호의적인 분위기였는데 이제야 적진에 들어온 느낌이 드네.’
주변 환경이 나빠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리한 전세가 변하는 건 절대 아니었다.
곧이어 휴식 시간이 전부 흐르자 비로소 마지막 세트가 시작되었다.
[게임 리 1-0.]
[게임 리 2-0.]
철저하게 경기를 다져가며 포인트를 쌓는 모습에 해설자들은 혀를 내둘렀다.
지혁이 자신이 당했던 걸 그대로 갚아준다는 것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사실 이들처럼 전문가들이 아니라 어느 정도 눈치만 있다면 누구라도 알법한 흐름이었다.
[골든 보이가 복수를 제대로 하네요. 제 짐작이긴 하지만 1게임도 내줄 생각이 없는 것 같습니다. 복수를 하는 동시에 반항할 의지조차 밟아버리겠다는 뜻이겠죠.]
[작은 싹조차 남겨두지 않다니 잔인한 수법입니다. 효율을 중시하는 그러면 다른 방법도 충분히 있을 텐데요.]
[이제 니시코리도 경계 대상에 올라간 거겠죠. 어중간한 선수였다면 쓸데없이 체력을 빼며 이런 짓을 하지 않았을 겁니다. 이것도 상대에게 인정을 받아야 가능하죠.]
[하, 골든 보이의 인정이라······. 이걸 좋아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니시코리는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사용하며 필사적으로 게임을 사수하려고 했다.
브레이크를 당하는 건 어쩔 수 없이 포기하더라도 적어도 흑역사가 될 게 분명한 베이글을 피하려고 한 것이다.
벤치에서 쉬는 시간 동안 사정을 봐달라고 하면 정규 경기가 아닌 만큼 부탁을 들어줄 확률이 높지만 그런 짓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탕!!
결국 극심한 열세를 인정하고 랠리 템포를 미친 듯이 올리는 니시코리.
실력의 부족을 극복하기 위해 그가 선택한 건 집중력과 체력이 요구되는 난타전인 모양이다.
분명 이전이었다면 잘 먹혀들 전략이었지만 이제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음. 알아서 자멸하길 기다리면 되겠지. 정면돌파를 하는 방법도 있지만 굳이 상대가 유도하는 판에 들어갈 이유가 없으니까.’